강솔이 진석의 집에 도착했을 때, 허수희는 전화를 걸고 있었다. 허수희는 강솔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전화 저편에 말했다.“그래, 일단 그렇게 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끊어.”전화를 끊고 허수희는 강솔을 맞이하며 말했다.“네 옷 몇 벌 만들어 놨는데, 와서 입어봐.”강솔은 패딩을 벗고, 짧은 머리를 귀엽게 넘기며 활기찬 웃음을 지었다.“저 옷이 이미 많아서 안 만들어도 돼요!”허수희는 웃으며 말했다.“여자아이는 옷이 많아야지.”그러고는 상자에서 옷을 꺼내며 말했다.“이 옷 먼저 입어봐.”강솔은 옷을 받아 들고 펼쳐보며 놀라서 말했다.“드레스잖아요?”허수희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드레스가 왜 안 돼? 너는 디자이너인데, 매일 너무 평범하게 입는 것 같아!”강솔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입어볼게요.”“그래, 어서 가서 입어봐!”허수희는 사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강솔은 드레스를 들고 1층 게스트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갈아입고 나온 강솔을 본 허수희는 눈이 반짝였다.“정말 예쁘네!”검은색 벨벳 드레스는 몸에 꼭 맞고, 강솔의 짧은 머리와 어우러져 고급스럽고도 귀엽게 보였다. 기분이 좋은 강솔은 한 바퀴 돌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예뻐! 우리 강솔이는 원래 멋을 부리지 않아서 그렇지, 꾸미기만 하면 정말 아름다워!” 허수희는 그녀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했고, 강솔은 허수희의 어깨를 안으며 말했다.“이모, 이모 안목이 높아서 드레스도 이렇게 예쁘네요!”허수희는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다른 옷들도 입어봐.”“잠시 후에 입어볼게요. 진석이가 회의하자고 해서, 회의 끝나고 다시 하나씩 입어볼게요.” 강솔이 웃으며 말하자 허수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휴가 중에 무슨 회의야?”강솔은 장난스럽게 말했다.“어쩔 수 없어요. 보스니까, 말하는 대로 해야 해요!”“내가 가서 그만두라고 할까? 너를 너무 혹사하지 못하게!”“제발 그러지 마세요!” 강솔은 과장되게 말했다. “이모도 아시잖
강솔은 휴대폰을 찾으려다가 자신의 휴대폰이 패딩 주머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아, 정말 쪽팔려!” 강솔은 분노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평소에 진석에게 장난을 치긴 했다, 하지만, 작업실에서는 총괄 디렉터로서 언제나 우아하고 단정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진석과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었다.하지만 조금 전, 강솔은 거의 진석에게 달려들 듯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그뿐만 아니라 숟가락으로 생강을 먹여주려고 하면서 애교가 넘치게 진석의 부르기까지 했다.강솔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소파에 주저앉아 얼굴을 묻었다.“이제 못 살아!”진석은 그릇을 들어 천천히 대추를 다 먹고는, 강솔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강솔은 소파에 엎드려 있었는데, 자신이 치마를 입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치마가 말려 올라가 두 개의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균형 잡힌 다리가 검은색 벨벳 드레스와 대조를 이루며 눈부시게 빛났다.진석은 목이 말라 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창문이 열려 있어. 정말 못 살겠으면 그냥 뛰어내려.”강솔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2층이라 죽지도 않아!”“죽지는 않겠지만, 장애인이 되면 내가 널 돌봐줄게. 지금도 거의 비슷하잖아.” 진석은 담담하게 말하자, 강솔은 쿠션을 안고 일어나며 물었다.“거의 비슷하다니, 무슨 말이야?”“잘 생각해 봐.” 진석은 눈을 들어 그녀를 보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네가 아플 때는 내가 널 돌봐주고,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내가 사다 주고, 심지어 네가 매달 쓰는 돈도 내게서 나간다고.”강솔은 점점 더 눈이 커지며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이에 강솔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이미 네가 나를 챙겨주고 있으니까, 굳이 나를 장애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 괜히 힘들게.”진석은 강솔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은 네가 일
강솔은 화가 나서 손을 뻗어 진석을 때리려 했지만, 진석이 힘을 줘 허리를 더 눌렀다.“움직이지 마!”“응.” 강솔은 아프면서도 시원해서 무심코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진석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눈빛이 더 깊어졌다. 강솔의 허리를 누르고 있는 진석의 손은 그녀의 부드럽고 연약한 몸을 느꼈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강솔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물었다.“근데 왜 강성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자신은 감정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집에 있는 것이지만, 진석은 왜 떠나지 않았을까? 진석은 숨을 내쉬며,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처리해야 할 일이 좀 남았어.”“무슨 일이야?” 강솔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석은 강솔의 질문에 답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뭘 그렇게 많이 묻는 거야?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이에 강솔은 놀라며 말했다.“난 그냥 물어본 거야. 왜 화를 내?”진석은 점점 더 답답함을 느끼며, 짜증이 나 얼굴을 굳히고 말을 잇지 않았다. 강솔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일어나려고 팔을 짚었다.“그만해. 이제 내가 할 수 있어. 집에 갈게!”“움직이지 마!” 진석은 강솔의 허리를 단단히 누르며 힘을 주었다.“아야!”강솔은 가볍게 소리쳤고, 몸이 소파로 푹 파묻히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살살해!”진석의 손이 더 단단히 쥐어졌고, 하마터면 욕설이 터질 뻔했다. 진석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허리를 주물렀다. 둘 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진석이 힘을 줄 때마다 강솔은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냈다.이 상황은 진석에게는 고문 같았고, 손을 놓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고문이었다.방 안의 공기는 점점 무겁고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지어 둔감한 강솔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진석이 만지는 곳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진석의
진석은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한 후, 담담하게 말했다.“저녁에 몇몇 동창들과 모임이 있어.”그 말에 강솔은 웃으며 말했다.“잘 됐다! 그럼 나도 저녁에 너랑 같이 가자.”진석은 속으로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느끼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너도 나랑 같이 가겠다고?”강솔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응, 오늘 밤에 우리도 동창 모임이 있어. 장소도 같은 스타라이트니까, 네 차 타고 갈래. 내가 차를 안 가져가도 되잖아!”진석의 마음속에 잠깐 피어올랐던 부드러운 감정이 사라졌고, 이내 물었다.“몇 층인데?”“3층이야.”진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갈 때 데리고 갈게.”“고마워, 진석!” 강솔은 눈을 살짝 감고, 컴퓨터를 안고 일어섰다.“나 집에 갈게, 잘 있어!”그러자 진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몇 시인데 벌써 집에 가? 퇴근했어?”“아?” 강솔은 잠시 멍하니 있자, 진석은 몇 개의 디자인 문서를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이 디자인 작업들을 해 질 때까지 마쳐, 그렇지 않으면 동창 모임에 갈 생각도 하지 마.”강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서를 집어 들고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정말 못된 자본가야!”진석은 강솔의 작은 불평을 들으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서류를 다시 검토했다. 강솔은 점심을 진석의 집에서 먹고, 오후 내내 두 사람은 계속 일했다.하나의 책상에서 서로 마주 앉아, 한쪽은 서류를 검토하고, 한쪽은 디자인 작업을 했다. 각자 할 일을 하면서 가끔은 말다툼하기도 했고, 가끔은 일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평화로웠다.해가 질 무렵, 강솔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일어서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보람찬 하루를 보내니 정말 기분이 좋아!”진석은 의자에 기대어 강솔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허리는 이제 괜찮아?”강솔은 몸을 돌리며 놀라며 말했다.“아주 좋아졌어! 역시 진석 사장님은 대단해!”진석은 강솔의 칭찬에 반응하지 않고 말했다.
강솔은 손을 들어 귤을 받으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귤을 까먹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솔은 원래 치마를 입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옷을 갈아입고 나갈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도 충분히 예쁘다는 진석의 말이 떠올랐다.강솔은 거울 앞에 서서 치마를 입은 자신을 보며, 정말로 꽤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치마 앞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기분이 갑자기 아주 좋아졌다.진석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 강솔은 외투를 챙겨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패딩 대신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입었다.윤미래가 설날에 사준 코트로, 밝고 쨍한 옷이라 약속에 갈 때 입기에 좋다고 했다. 원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집을 나서기 전에 옷장 속에서 이 옷이 눈에 딱 들어왔다.쨍한 색감의 코트에 검은색 치마, 시각적으로 한눈에 확 들어오게 잘 어울렸다. 진석이 아름다운 강솔의 모습을 보자 검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수축했다. 강솔의 원래 귀여운 단발머리도 약간의 섹시함과 멋스러움이 더해졌다.“가자!” 강솔은 밝게 웃었다.진석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을 살짝 더 움켜쥐었다. 그의 선글라스 뒤로 숨겨진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또한 마음속에는 약간의 긴장과 함께 더 큰 부드러움이 넘쳐났다.강솔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는데 이윤주가 도착했는지 물어보는 메시지였다. 강솔은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입력했다.[곧 도착해. 지금 가고 있어.]진석은 눈꼬리로 강솔을 슬쩍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모임에 누가 오는데?”“이윤주, 소울연 같은 애들이야. 너도 아는 애들이지.”“남자도 있어?” 진석은 마치 무심한 듯 물었다.“아마 없을걸.”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술 적게 마시고, 과한 게임은 하지 마. 모임 끝나면 내가 널 데리러 올게.”강솔은 매번 모임 때마다 진석이 해주는 당부에 익숙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걱정하지 마. 다들 내 친구야!”“친구라고 해서 방심하면 안 돼. 이런 자리에서
강솔은 잠시 멈칫하며, 주예형을 떠올리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날들을 되새겨보면, 그것이 마치 전생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솔직히 말해서, 이별 후에 진석이 곁에 있어 주어 다행이었다. 매일 강솔과 함께 달리기하거나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항상 무언가 할 일을 찾아주었다. 덕분에 강솔은 방에 틀어박혀 자신을 연민하지 않을 수 있었다.강솔은 고개를 들고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앞을 봐야지. 이미 헤어졌으니까, 울고불고 해봐야 소용없잖아.”“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 이윤주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강솔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윤주는 약간 아쉬운 듯 말했다.“다시 만날 생각은 없는 거야?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그냥 포기해?”강솔은 단호하게 말했다.“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야. 완전히 끝났어.”생각해 보면, 주예형을 짝사랑했던 그 시절은 사실 그와는 큰 관계가 없었다. 그때 강솔은 예형의 앞에 자주 나타날 용기도 없었다. 그저 본보기로 삼아 자신을 독려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그래서 그 시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동안 강솔은 많은 것을 배웠고, 얻었다. 그것이야말로 짝사랑했던 결과였다. 비록 그 후에 이런 비참한 이별을 겪었지만, 짝사랑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후회되지는 않았다.“야, 너희 둘이서 무슨 비밀 이야기하는 거야!” 소울연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다 같이 모였는데, 너희만 따로 얘기하면 안 되지!”강솔은 바로 웃으며 말했다.“울연아, 나 들었어. 약혼했다며? 그런데 왜 초대장도 안 보내고, 서운하게!”그러자 울연은 쑥스러운 듯 말했다.“그냥 약혼이니까, 두 집안끼리 간단히 식사만 했어. 결혼할 때는 꼭 초대장 줄게. 그리고 너희들 다 내 들러리 해줄 거지?”“당연하지. 근데 약속해, 들러리는 축의금 안 내는 거야!” 윤주가 농담하자, 모두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문이
오연서는 술 한 잔을 마시고, 짙은 화장이 조명 아래서 마치 팔레트처럼 보였다.“아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내 남자친구가 스타라이트의 매니저야. 오늘 마음껏 놀고 마셔. 내가 남자친구에게 40% 할인을 부탁했거든!”이윤주는 혀를 차며 낮은 목소리로 강솔에게 말했다.“왜 굳이 모임에 참석하고 싶어 했는지 알겠네. 자랑하려고 온 거였어. 클럽 매니저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하는 거지?”소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돈이 있나 보지!”그녀는 계속해서 설명했다.“오연서는 졸업 후 몇 년 동안 일도 안 하고 남자에게 의지해서 살았어. 지금 이 남자친구는 매달 1000만 원씩 용돈을 준다고 하더라고.”“그래서 맨날 채팅방에서 자랑해 대는 거야. 너희가 채팅방에 없어서 몰랐지.”강솔은 점점 어이없어졌다.‘지금 무슨 시대인데, 남자에게 의지해서 사는 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니?'“강솔!” 기연이 갑자기 물었다.“지금 뭐 하고 있어?”“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좋네. 남자친구는 있어?”강솔은 잠시 멈칫하고 대답했다.“없어.”“설마 아직도 예형 선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지? 들은 바로는 그 사람, 지금 회사도 차리고 상장까지 했다고 하더라.” 기연이 웃으며 말했고, 그녀의 말에는 강솔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이에 강솔은 담담하게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그 사람을 꽤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네.”기연의 얼굴이 잠깐 굳어졌다.“같은 반 동창이니까 당연히 관심이 가지. 맞다, 우리 오수재 오빠도 여자친구가 없는데, 같은 학교 동문끼리 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어?”수재는 슬쩍 강솔을 보며, 담배를 손에 쥐고 비웃듯 말했다.“한기연, 무슨 농담이야?”연서는 말을 보탰다.“왜? 강솔이 너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네가 잘생겼고, 집도 잘 살고, 지금 직장도 좋은 건 맞지만, 강솔이도 만만치 않잖아. 적어도 예쁘잖아, 안 그래?”연서의 말은 분명 강솔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강솔의
오연서는 카드 한 장을 입술에 붙인 채 고개를 돌려 한기연에게로 향했지만, 갑자기 김명상이 끼어들어 그녀의 입술에 있는 카드를 입으로 받으려 했다. 예상치 못하게 카드는 떨어졌고,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연서는 놀란 척 입을 벌렸고, 김명상은 그 틈을 타 더 깊이 키스했다.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연서는 그제야 명상을 밀어내며,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김명상, 정말 못됐어!”이에 명상은 태연하게 말했다.“너와 잘 맞춘 거지 뭐!”연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이 게임 어때? 카드가 떨어지면, 두 사람이 함께 벌칙을 받아야 해!”“어떤 벌칙을 받는데?” 오수재가 묻자 김명상은 테이블 아래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며 말했다.“여기 있잖아. 주사위를 던져서 선택된 벌칙을 받는 거야.”모두 이견 없이 동의하며 둥글게 둘러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이 게임은 자극적이면서도 은근히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솔은 진석이 자신에게 과도한 게임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섰다.“너희들끼리 해. 난 안 할래.”“왜 그래?” 수재가 물었다.“다들 성인인데, 왜 이리 새침 떠는 거야?” 연서가 비꼬듯 웃으며 말하자 한기연도 동조하며 말했다.“강솔은 그럴 수 있지. 아직 연애도 안 해봤을지도 모르니까!”두 사람은 합세해 강솔을 놀리자, 윤주는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치며 말했다.“아직도 시비를 걸고 싶은 거야?”연서와 기연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고, 수재는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강솔은 안 해도 돼. 우리가 할 테니, 강솔은 옆에서 보기만 해.”다들 게임을 시작했고, 강솔은 소파에 앉아 혼자 모바일 게임을 하기로 했다. 그때 진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뭐 하고 있어?]강솔이 답장했다.[모바일 게임 중이야.][모임이 재미없어?][아니야. 그들이 게임하는데 나는 참여하지 않았어.]몇 초 후, 진석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내 쪽으로 올래?]강솔은 웃으며 답장했다.[아니야. 네 친구들 나랑 안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