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강솔은 소울연과 몇 마디 더 주고받고, 도착하면 연락 달라고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강솔은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중간쯤 걸어가다, 강솔은 앞쪽 베란다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진석과 민명주가 난간 앞에 서서 가까이 다가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리가 멀고,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강솔은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한 강솔은 곧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어둑한 조명 아래 서 있던 모습이 강솔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떠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강솔은 다시 고운해와 함께 모델 사진을 보았지만, 자꾸만 무심코 방의 문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여 분 정도 지나, 진석이 명주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강솔은 운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진석의 차가운 얼굴이 은은한 조명 아래 더욱 차분해 보였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기회가 되면 또 모이는 거로 하고.”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운해는 강솔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웃었다. “오늘 고마웠어, 강솔.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 강솔은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 가지고 고마워해요!”밖으로 나가려던 강솔은 무심코 자신의 외투를 깜빡 잊어버리고 놔두고 있었다. 진석이 자연스럽게 강솔의 외투를 챙기려 했지만, 명주가 살짝 그를 막으며 말했다. “오빠, 나 투자할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같이 리스크 분석 좀 봐줄 수 있을까?” 진석은 명주의 의도를 알아채고 잠시 멈칫하며, 투자 이야기를 나누며 명주와 함께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면서 그는 은연중에 강솔을 힐끗 보았다. 강솔은 운해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신의 외투를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진석은 강솔에게
진석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민명주의 말대로 바삭한 슈크림을 사지 않고 두리안 페이스트리만 샀다. 돌아온 후, 그는 종이봉투를 명주에게 건네며 말했다. “바람이 차니 집에 가서 먹어.” 명주와 함께 있던 여자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석 오빠, 너무 치우치시는 거 아니에요? 명주 언니 것만 사다 주시고, 저랑 강솔이는 완전히 잊어버리신 거예요?” 강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진석을 바라보았고, 진석도 강솔을 보고 있었다. 이에 강솔은 바로 웃으며 말했다. “저 배 안 고파요. 마침 요 며칠 동안 엄마가 살쪘다고 잔소리하셔서, 밤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했어요.” 운해는 웃으며 말했다. “넌 전혀 안 쪘어. 아마도 어머니께서 집밥이 맛있어서 더 많이 먹게 되었다고 생각하셨나 보네.” 사람들은 몇 마디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대리 기사들이 차를 가져왔다. 명주는 진석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집에 가서 카톡 해.” 진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강솔은 순간 약간 놀랐다. 그녀는 진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여자와 별다른 이유 없이 카톡을 주고받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날 저녁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진 걸까? 강솔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진석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진석은 술을 마셨기 때문에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강솔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져서 물었다. “한승운과 오연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진석은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조용히 말했다. “이미 연락해 놓았어. 죗값을 다 합하면 몇 년은 그 안에서 지내게 될 거야.” 강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오수재가 나한테 주예형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어.” 진석은 미간을 무의식적으로 찡그리며 강솔을 보았다. 진석의 눈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스며 있었다. “뭐라고 했는데?” 강솔은 진석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했다. “그때 자원봉사 활동에 대해 말해줬어.
강솔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시작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집에 도착한 강솔은 손을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몇 걸음 뒤돌아보며 물었다. “내일 아침에 또 뛰러 가?” “응, 내가 제시간에 깨울게.” “그럼, 잘 자!” 강솔은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가볍게 움직여 집으로 향했다. 진석은 철문 너머로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며 민명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도착했어?” [방금 도착했어. 내일 오전에 시간이 있는데, 너희 집에 갈까?] “그만두자. 그녀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더 이상 필요 없어.” 진석은 점점 더 시도할수록, 오히려 마음이 냉담해지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 이제 막 시작인데. 좀 더 참고 기다려봐.] 하지만 진석은 이제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더 이상 강솔의 마음을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강솔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자신이 우스워 보였다. [나를 믿어봐. 강솔이 너를 신경 쓰는지 확실히 알게 해줄게!] “걔가 나를 신경 쓰든 안 쓰든, 내가 사랑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 그래서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이 말을 나한테 했다면, 난 정말 감동했을 거야!] 명주는 한숨을 쉬고 이어서 말했다. [농담이야! 너는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사실은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거야.][하지만 내가 말해줄게, 강솔과 함께 있고 싶다면, 네가 먼저 다가가야 해. 강솔은 감정에 대해 둔감한 편이니까.][강솔이 예형을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닌 걸 봐도 알 수 있잖아. 걔는 감정적으로 서툰 사람이야.]“나는 일이 잘못되면 감당하기 어려울까 봐 두려워.”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넌 그냥 나를 믿고 따라오면 돼!] “고마워, 정말로.” [정말 고맙다고 하지 마, 난 이제 샤워하러 갈게. 내일 보자!] “그래.”진석은 전화를 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솔은 다급하게 말했다. “소희를 좋아하잖아? 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꾸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 진석은 비웃듯이 강솔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예전에 주예형을 좋아했잖아. 그런데 왜 나를 좋아하게 됐어?” 강솔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한 발짝 물러섰다. “내가 언제 좋아했다고요?” 진석은 강솔을 몰아붙이며 다가와, 벽에 몰아붙이고는 깊이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강솔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 “거짓말!” “난...” 강솔은 겁에 질려 갑자기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급하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자신이 꿈을 꿨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솔의 얼굴에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 남아 있었고, 어둠 속에서 머리를 두드리며 자신이 이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겁에 질려 잠이 깬 강솔은 발코니로 나갔다.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 진석의 방이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직 자지 않았다. 강솔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새벽 두 시였다. 깊은 밤 중에 켜져 있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다음 날 아침, 진석이 강솔을 깨우러 왔을 때, 강솔은 막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발코니로 나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10분만 기다려줘.” 진석은 시계를 한 번 보고 나서 말했다. “좋아, 10분 후에 보자.” 강솔은 얼굴을 씻고 이를 닦으며 옷을 갈아입고, 10분이 되기도 전에 아래로 내려갔다. 강솔은 달리기 시작하며 진석과 맞춰 속도를 냈고, 진석이 물었다. “잠을 잘 못 잤어?” “응?” 강솔은 경계심을 갖고 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너무 잘 잤어. 꿈 하나도 안 꿨어!” 진석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주예형에 대한 일은 이제 다 지나갔어. 인품이 어
강솔은 전화를 끊고 허리를 살짝 풀어준 뒤, 물컵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햇볕을 쬐었다. 그러다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멀리, 빨간색 포르쉐 911이 진석의 집 앞에 주차되어 있었고, 누군가 차에서 내려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진석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록 멀리서였지만, 강솔은 단번에 그 사람이 민명주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순간, 강솔은 어젯밤의 꿈이 떠올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강솔은 물을 다 마시고 자신에게 침착하라고 다짐하며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다. 고운해가 보내준 모든 의상 사진을 고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강솔의 시선은 종종 창밖으로 향했다. 명주가 진석의 집에 갔다니, 분명 진석을 만나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명주가 진석에게 다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는 걸까? 어젯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진석도 명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강솔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진석에게서는 한 통의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회의에 대한 소식도 없었다. ‘두 사람, 혹시 데이트라도 나간 걸까?’ 강솔은 물을 따르러 내려가면서, 윤미래가 꽃게와 오래 끓인 닭 육수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육수를 보온병에 담아 강솔에게 말했다. “진석이네 집에 좀 다녀오려고 해. 이 꽃게 육수는 네 허수희 아주머니가 보내준 건데, 내가 조금 많이 만들었어. 그래서 그녀에게도 좀 나눠주려고 해.” 강솔은 얼른 대답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지런해?” 윤미래가 농담을 하자 강솔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침 진석에게 디자인 자료도 전해줄 일이 있어서요. 겸사겸사 다녀오면 되니까요.” “그래, 그러면 네가 다녀와. 네 허수희 이모께 따뜻할 때 드시라고 전해줘.” 윤미래는 보온병을 뚜껑을 덮어 강솔에게 건넸고, 강솔은 그것을 받아 들고 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진석의 집에 도착하자, 허수희가 마침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진석은 민명주에게 말했다. “네가 말했던 그 투자 건, 내가 분석해 봤는데, 수익이 꽤 높아. 그리고 리스크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 시작해도 괜찮아.” 강솔은 진석을 바라보며, 어젯밤 새벽 2시까지도 그가 잠들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명주의 리스크 분석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그럼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게.” 명주는 진석을 향해 눈에 사랑이 가득한 채 말했다. 진석은 물 한 잔을 따랐다. 원래는 강솔에게 주려고 했으나, 손을 멈추고 결국 명주에게 건넸다. “밖에 추우니까, 따뜻한 물 좀 마셔.” 명주는 따뜻한 물을 두 손으로 받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빠가 이렇게 세심한 줄은 몰랐어!” 강솔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둘이 이야기해. 나는 먼저 가볼게!” 진석은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점심 먹고 가라니까?” 강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오늘 점심에 만두를 만든다고 했어. 제가 좋아하는 소고기 부추 만두요. 이모한테 말씀드려 줘. 난 집에 가서 만두 먹을게요!” 진석은 특별히 뭐라고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솔은 명주에게도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오후에 시간 있으면, 진석 오빠랑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가까워서 금방 갈 수 있어요.” “알겠어!” 명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강솔은 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진석은 강솔이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소파에 몸을 기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네가 보기엔 그녀가 조금이라도 질투하는 것 같아?” “안 그럴까?” 명주는 물잔을 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히려 강솔이 질투해서 자리를 못 지키고 떠난 것 같던데.” 진석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가 왜 그걸 못 봤지?” 분명 평소와 똑같이 웃고 있었는데 말이다. 명주는 웃으며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 금방 들통날 거야.” 진석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
윤미래는 강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강솔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오랜만에 TV를 켜서 그런지 나오는 사람 중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골라 조금 보았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마침 윤미래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윤미래의 표정에는 약간 실망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이제 우리 강솔이랑 진석이는 가망이 없겠네.”점심으로 나온 찐빵은 강솔이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 소였지만, 오늘따라 입맛이 없었다. 평소에는 네 개를 거뜬히 먹던 강솔이었지만, 오늘은 하나만 먹고도 배가 불렀다. 강솔은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뒤척이던 끝에, 아마도 어젯밤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2시 반이었다. 일어나서 고운해에게 보내줄 모델 사진들을 정리했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모든 작업을 마쳤다. 물을 마시러 일은 정말 끝났구나.” “무슨 일인데요?” 가사도우미인 오해현이 차를 따라 윤미래에게 건네자 윤미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방금 진씨 저택에 갔는데, 진석을 찾아온 여자애가 있더라고. 점심도 진씨 저택에서 먹고, 방금 두 사람이 함께 나가는 걸 봤어.” 강솔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저랑 진석이로 농담하지 말라고요.” “그땐 몰랐으니 그랬지. 이제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윤미래는 아쉬운 듯 말했다. “정말 아쉽구나!” 오해현이 물었다. “그 여자애는 어땠나요? 설마 아가씨보다 예쁘진 않겠죠?” 강솔이 대답했다. “저보다 예쁜 건 물론이고, 말도 잘하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출중하더라고요. 진석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이죠.” 윤미래가 손을 들어 강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딸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아!” 강솔은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며, 윤미래 품에 기대어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네요!” “기분 좋지
이상하게도 긴장되었다. 진석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어도, 강솔은 지금처럼 떨리지 않았다. 휴대폰이 끊기기 직전에야 강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진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나 너희 집 앞이야. 잠깐 나와봐.” 강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벽 너머에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나와서 얘기해.” “아.” 강솔은 대답하고 신발과 외투를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진석이 서 있는 모습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강솔은 발걸음을 늦췄지만,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순간 강솔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당장 돌아가고 싶어졌다. 발소리를 듣고 진석이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진석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알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고상하고 차가워 보였다. 강솔은 입을 다문 채 가까이 다가갔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진석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슈크림 빵, 네가 좋아하는 맛으로 샀어.” 진석은 오후에 민명주와 함께 있지 않았고, 그저 같이 나가 친구 두 명을 만나 저녁을 먹고, 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에 가던 길에 어제 들렀던 디저트 가게에 들러 강솔이 좋아하는 슈크림 빵을 샀다. 그러나 강솔은 받지 않았다. “말했잖아. 요즘 살쪄서 밤에는 안 먹어.” “그럼 내일 아침에 먹어. 냉장고에 넣어둬.” 진석은 여전히 슈크림 빵을 내밀자, 강솔은 그제야 받아 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으니 이제 돌아가.” 진석은 움직이지 않고 강솔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물어볼 말이 없어?” “어?” 강솔은 당황해 눈을 들어 진석을 보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없어?” 진석은 다시 물었으나 강솔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강솔이 말을 마친 순간, 이마에 찬 바람이 스쳐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