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할 걸 왜 말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 나잖아.] 윤미래는 목이 메인 듯 말했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강솔은 윤미래 달래며 말했다. “윤미래 여사님, 너무 쉽게 감정적으로 굴지 마세요. 나이도 있으시니 좀 차분해지셔야죠.” 윤미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난 괜찮은데, 진석이가 너한테 오랫동안 마음을 줬으니, 그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지는 마라.] 강솔은 엄마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나도 지금 마음이 혼란스러워요. 나 방금 주예형이랑 헤어졌잖아요. 아직 오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 사람에게 느끼는 게 오랜 의존인지, 다른 감정인지 구별이 안 돼요. 나도 제대로 생각해 보고 싶어요. 그게 그 사람한테도 공평하니까.” 윤미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괜찮아. 진석이는 기다릴 거야.] 그 말은 강솔의 마음을 울컥하게 했지만, 동시에 달빛처럼 부드러운 위로가 되었다. 강솔은 창가로 걸어가 차가운 바람을 한 모금 들이마시며 머리를 맑게 했다. “알았어요, 엄마. 나 이제 디자인 수정 좀 하고, 금방 잘게요.” [너무 늦지 않게 자라.] “네.” 강솔은 전화를 끊고, 어지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진석이 했던 말은 강솔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때문에 이틀 동안 마음이 어지러워 편히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천천히 생각하고, 진석을 다시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솔은 다시 방으로 돌아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디자인 수정에 집중했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에 빠지지 않았다....다음 날, 강솔은 드디어 회사에서 진석을 보았는데 소희와 함께 왔다. 소희가 회사에 온 건, 그녀의 신분이 공개된 이후 처음이었다. 직원들은 흥분했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존경과 호감을 표했다. 진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소희가 앞으로 자주 올
“당연한 일이죠.” 소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온옥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King인 줄 몰랐어요. 혹시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면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걸 마음에 두었더라면, 부총감님이 아직 여기 앉아 있지 않았겠죠.” 온옥은 더욱 자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해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너그럽게 대해주셔서요.” 소희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전 일은 모두 지나간 일이니, 다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앞으로 회사에 새로운 직원들이 올 텐데, 부총감님도 새 직원들에게 더 너그럽게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온옥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명심할게요.” “소희!” 기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소시연이 달려 들어왔다. 시연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구나!” 소희는 웃으며 물었다. “어디서 이렇게 급하게 달려왔어?” “오늘 잡지 촬영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시연은 미소를 띠고 대답하자, 그 틈을 타 온옥은 자리를 떠났다. 강솔은 턱을 괴고 반짝이는 눈으로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희, 너 아직 모르지? 우리 시연이가 이제 꽤 유명해졌어. 조만간 연예인으로 데뷔해도 무방해!” 시연은 소희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본업이 디자이너야. 북극 디자인 작업실의 일원이 됐으면, 영원히 그곳의 사람이 될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해. 꼭 회사에만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사람마다 목표가 다르잖아. 그게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는 아니지.” 소희의 말에 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 회사 떠날 생각 없어. 너 모르는 거지? 지금 북극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연예인보다 훨씬 가치가 높아!”“내가 지금 이 정도로 주목받는 것도 북극 디자이너라는 타이틀 덕분이야. 회사 떠나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지.” 시연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
강솔은 진석의 사무실 앞에 도착해 손을 들어 노크했다. 곧 안에서 진석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강솔의 심장은 이미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강솔은 속으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오빠가 나를 좋아하지, 내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게 아니잖아!' 그날 밤도 자신을 강제로 키스한 거고, 만약 잘못이 있다면 진석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말도 안 돼!' 강솔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걸며 다독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침착해야 해. 무심한 척해야 해.'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 밑이 약간 검게 변한 것이 걱정되었다.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추궁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주예형 때문이라고 말하면 더 화를 낼까?’ 강솔이 머뭇거리던 찰나, 갑자기 문이 열렸다. 진석이 서서 강솔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문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강솔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반발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어떻게 제가 감히 사장님께 문까지 열어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진석은 쌀쌀하게 말했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성질은 대단하네.” 강솔은 그를 노려보았고, 진석은 사무실 안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문 닫아.” 강솔은 진석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두 사람의 말다툼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졌기 때문인지, 강솔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진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물었다. “왜 불렀어요, 사장님?” 진석은 자신의 책상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모가 너한테 줄 물건을 내게 맡기셨어.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가져가.” “우리 엄마가 뭘 보냈는데?” 강솔은 호기심에 물었는데, 엄마에게서 들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직접 와서 보면 알겠지.” “왜 직접 가져오지 않고, 굳이 내가 가야 하지?”
진석은 어떻게 강솔을 대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저 강솔을 꼭 안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달래기 시작했다.“울지 마.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어. 널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네가 나를 못 떠나서 망설일 줄 알았지.”“그런데 네가 그냥 가겠다고 하니까 내 체면이 완전히 없어진 기분이야.”강솔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몇 번 훌쩍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널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을게. 시간을 줄게. 네가 나와 함께할지 말지 결정할 때까지, 넌 여전히 내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를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어?”강솔은 다시 눈물이 쏟아졌고, 흐느끼며 말했다.“제발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 하면 내 죄책감이 더 커져.”“죄책감만 있고, 감동은 없어?”“감동만으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거라면, 그게 오빠가 원하는 사랑이야?”진석은 잠시 망설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아니야.”“그러니까, 난 감동해서 오빠랑 함께할 수 없어.” 강솔은 울먹이며 말했다.“이해해?”진석의 가슴은 더 아팠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해해.”강솔은 진석의 품에 안긴 채 몇 번 더 훌쩍였고, 바로 서며 진석의 셔츠에 눈물을 닦아냈다. 진석의 가슴 한쪽이 다 젖은 것을 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진석은 고개를 숙여 젖은 셔츠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러면 회사 사람들이 네가 내 품에서 울었다는 걸 다 알겠네?”강솔은 순간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그러니까 나가기 전에 잠깐 기다려.”진석은 강솔의 눈물을 닦아주며,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쳤다. 진석의 손가락이 강솔의 눈을 스쳤을 때, 강솔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강솔의 속눈썹이 진석의 손가락 끝을 스치자,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감정으로 뒤흔들렸다. 강솔의 이 순진하고 순종적인 모습이 진석의 마음을 녹였고, 진석의 시선은 강솔의 입술로 내려갔다. 진석은 그날 느꼈던 강솔의 입술 맛을 떠올리며 목구멍이 건조해졌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심서진이었다. 어제 전화를 걸어온 목소리는 낯선 사람이었는데, 서진이 부탁한 것이었을까? 혹시 직접 전화를 걸면 강솔이 만나주지 않을까 봐 그렇게 했던 걸까?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일부러 강솔을 만나려는지 알 수 없었다. 강솔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냉랭하게 말했다.“당신이 절 찾은 건가요?”서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강솔 씨가 저에 대해 오해가 있을까 봐, 다른 사람에게 전화 부탁을 했어요. 부디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강솔은 서진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형을 유혹해 현장에서 딱 걸렸으면서도, 이렇게 평온하게 자신 앞에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다니.강솔은 이 여자가 정말 뻔뻔한 건지, 아니면 내면이 강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어차피 찾아오는 사람은 다 손님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본론이 뭔지 말해요.”“사실은요.” 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예형 선배와 제가 며칠 후에 고향에 내려가려고 해요. 같이 가는 거예요.”서진은 마지막 문장을 일부러 강조하고는 계속 말했다.“이번에 내려가서 두 집안에서 결혼 이야기를 하게 될 거예요. 아마 결혼이 성사되면, 약혼식도 바로 할 예정이니까요.”“그래서 오늘 약혼반지를 미리 맞추려고 해요.”서진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강솔을 바라보았다.“강솔 씨가 주얼리 디자인에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와 예형 선배의 약혼반지를 강솔 씨께 부탁드리고 싶네요.”강솔은 어릴 적부터 쌓아온 교양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의 얼굴에 뜨거운 커피를 끼얹고 싶었을 것이다.세상에 남자를 뺏는 여자도 많고, 그런 일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는 여자는 처음이었다.이미 예형을 빼앗아 갔으면서도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은 전혀 없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렇게 찾아와 자랑하다니!겉으로는 온순하고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으
진석은 다이아몬드를 한 번 살펴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이아몬드는 심서진 씨의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건 다이아몬드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인데, 크기와 디자인이 마음에 드시나요?” 서진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네, 만족해요!” 강솔은 계속 진석을 바라보며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심서진 씨를 위해 이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주문하겠습니다.”진석은 직원에게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직원은 바로 주문을 처리하러 가자, 서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참 예쁘네요.” “이제 이 다이아몬드는 심서진 씨의 것입니다. 원하시면 새로운 이름을 직접 붙이셔도 됩니다.” 진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다이아몬드의 세팅 디자인에 대해 상의해 볼까요?” 서진은 진석의 말에 들뜬 표정을 지으며 약혼 반지의 디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석은 강솔에게 그것을 모두 기록하게 했다. “저희는 심서진 씨의 요청에 맞춰 완벽한 약혼반지를 디자인할 것입니다. 이틀 후에 디자인 초안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직원에게 지시했다. “심서진 씨에게 가격을 알려주세요.” 직원은 계산을 시작한 뒤 서진에게 가격표를 건넸다. “심서진 씨, 다이아몬드의 가격과 반지 제작 비용, 그리고 디자인 비용까지 총합 13억3천만 원입니다.” “저희는 총금액의 30%를 계약금으로 받고 있으니 오늘 3억8천8백만 원을 먼저 결제해 주시면 총감님이 반지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요?” 서진은 비서가 말하는 13억3천만 원이라는 금액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이, 이렇게 비싸요?”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이미 설명해 드렸습니다. 심서진 씨도 아까 보셨잖아요.” 직원이 말했다. “그리고 총감님의 디자인 비용도 따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서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강솔은 진석의 말에 순간적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물컵을 집어 드는 척했다. 진석의 말에 찔린 심서진은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고, 주예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예형은 금방 도착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회사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진석은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대신 직원이 상황을 예형에게 설명하자, 예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13억3천만 원이라고요?” 강솔은 냉담한 표정으로 예형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그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서진을 내보내겠다고 했었는데, 이제 와서 약혼하려 하다니! 강솔이 이 생각을 하던 찰나, 예형이 갑자기 서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언제 너랑 약혼한다고 말했어?” 서진은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아니, 며칠 후에 집에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그래, 집에 같이 가자고 했지. 하지만 내가 약혼한다고 말했어?” “내가 부모님을 데리고 선배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선배도 거절하지 않았잖아!” 서진은 예형을 놀란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양가 부모님이 만난다고 하면 당연히 약혼하는 거 아니야?” 이에 예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그걸 약혼이라고 생각한 거야? 난 그냥 부모님들끼리 인사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약혼 이야기는 너 혼자서 한 거잖아!” 서진은 강솔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리며 곤혹스러워했다. 그녀의 평소 부드럽고 순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격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선배, 선배가 어떻게 이렇게 말을 바꿔요?” 그러자 예형은 냉정하게 말했다. “난 너랑 사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약혼하겠어?” 서진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모든 걸 선배한테 줬잖아요. 그리고 선배는 나를 책임지겠다고 했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예요?” 예형은 놀란 눈
복도에는 언제든 사람들이 지나갈 수 있어서 강솔은 긴장한 나머지 물러나려 했지만, 마치 몸이 마법에 걸린 듯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강솔은 눈만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진석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너를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내가 널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야. 예전에 주예형은 지나간 일이야. 다시는 날 떠날 수 없을걸, 한 번만 더 도전해 봐.”강솔은 놀란 눈으로 진석을 바라보았다. 진석은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갑자기 몸을 숙여 입술에 키스했다. 차갑고 부드러운 촉감에 강솔의 몸이 떨렸다.진석은 짧게 한 번만 입맞춤하고는 곧바로 몸을 떼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강솔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자, 강솔은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던졌다.‘또 강제로 키스를 당했어!’진석은 하루 종일 회사에 있었고, 강솔은 사무실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점심도 비서가 사무실로 가져다주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강솔은 일부러 일을 핑계로 사무실에 더 머물렀다. 진석이 먼저 떠나길 기다렸다. 회사는 점점 조용해졌고, 강솔은 도면 두 장을 수정한 뒤였다.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아직 안 가?”강솔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나, 나 아직 일이 남아서. 먼저 가. 나중에 시간 되면 갈게.”진석은 강솔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강솔, 도망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누가 도망친대?” 강솔은 콧방귀를 끼며 짐을 챙겼다.“가면 되잖아. 누가 겁먹었대?”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걸어 나갔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고, 진석은 회사를 떠났다. 날씨가 좋지 않아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아직 여섯 시도 되지 않았지만, 하늘은 이미 깜깜했다.“먼저 저녁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진석이 운전하면서 묻자 강솔은 창밖을 보다가 말했다.“저 앞에 있는 거리의 레스토랑이 괜찮아. 거기로 가자.”진석은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