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너무 늦게 온 거야!” 강솔은 냉담하게 말했다.“이제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만약 심서진의 일이 없었다면, 예형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더라도, 그녀는 아마도 그 관계에서 스스로를 희생하며 견뎌왔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섣달그믐날 이후로, 강솔과 주예형은 다시는 함께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주도적으로 나설 수도,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더러운 오점이 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사랑하지 않는다고?” 예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 이제 사랑하지 않아!” 강솔은 차분하게 말했고, 예형의 얼굴에 상처 입은 표정이 떠올랐다.“처음에 네가 나에게 고백할 때, 네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했잖아. 몇 년간 나를 짝사랑했다고.”“나는 그것을 믿었어. 하지만 우리가 헤어진 지 이렇게 짧은 시간 만에, 네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야?”“내가 너에게 상처를 준 건 이해해. 네가 화나고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렇지만 왜 이렇게 빨리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그럼, 내가 왜 너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아?” 강솔이 묻자, 예형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는 나에게 말했었잖아. 그 봉사 활동을 하면서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맞아. 그 활동에서 나는 네가 당당하고, 착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봤어. 네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강솔은 슬프게 웃었다.“하지만 나중에야 알았어. 그 모든 게 거짓이었어. 다 네 계략이었고, 진짜 모습은 그저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었어.”“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사실 위선자였다는 걸 알게 된 거지!”그 말에 예형은 깜짝 놀라며 강솔을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무슨 거짓을 꾸몄다는 거야?”“더 이상 속일 필요 없어. 명절 때, 나는 대학 동창을 만났어
함께했던 기억도 퇴색된 얼룩처럼 변해버렸다. 한참을 더 앉아있던 강솔은, 결국 완전히 식어버린 핫초코를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회사로 돌아와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아직 얼굴에 남아 있는 슬픔을 거두지 못했다. 이때, 강솔은 자신이 앉아야 할 의자에 앉아 있던 진석과 시선이 마주쳤다.진석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손에 든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갔다 온 거야?”아마도 가정 환경 때문에, 진석은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었고, 평소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자주 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강솔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강솔은 진석이 무서웠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부모에게 들킨 것 같은 긴장과 불안이 그녀를 휘감았다.진석이 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늘 세심하고 따뜻하게 자신을 돌봐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마치 아버지 같은 위압감도 있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강솔은 솔직히 말하기로 결심했다.“나 주예형을 만나고 왔어.”순간, 진석의 눈빛이 차갑고 어두워지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너에게 사과하고, 아직도 너를 좋아한다고 했겠지?”강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맞아.”“혹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진석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손에 든 만년필은 허공에 멈춰 있었고, 갑자기 불안해졌다.“미안해, 나는 여전히 주예형을 좋아해. 그에게 돌아가기로 했어.”강솔의 다음 말이 이럴까 봐 두려웠다. 강솔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미칠 것이었다. 그러나 강솔은 잠시 얼굴빛이 변하더니, 곧 말했다.“그럴 리가 없지. 당연히 나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어. 그 사람이 나를 배신했고,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는지 다 알게 되었어.”“근데 어떻게 다시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겠어?”진석은 표정 변화 없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에 든 만년필을 한 번 돌리고 말했다.“이리 와.”강솔이 진석의 쪽
운성.임시호와 노정순은 운성에 가보겠다고 줄곧 말해왔는데, 마침 소희와 임구택이 강재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었다. 이 기회를 빌려 두 사람의 결혼식 이야기도 나누기로 했다.강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였다. 강재석은 미리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모두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가사도우미인 이미수가 점심 준비가 다 됐다고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임시호는 일어나 강재석에게 술을 따라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소희와 구택이가 상의해서 결혼 날짜를 4월 29일로 정했습니다. 그날이 구택이 생일이라 소희가 신경을 많이 썼어요.”“저희는 기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직접 찾아뵙고 어르신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강재석은 소희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 어느 날이든 좋은 날 아니겠나? 난 아무 의견 없다네!”노정순이 말했다.“어르신께서 워낙 개방적인 분이라 소희 같은 훌륭한 아이를 잘 키우신 거죠.”강재석은 진지하게 말했다.“소희는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했고, 그 덕에 철이 일찍 들었지. 예전에는 오해가 있었지만 이제 더는 그 얘기하지 않겠네.”“앞으로는 두 사람이 나 대신 소희를 잘 돌봐주셨으면 좋겠어.”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제가 잘못했죠. 소희가 저를 기다리던 그 3년을 허비했으니, 이제부터는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임시호와 노정순 앞이라 소희는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누가 너한테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라고 했어?”그러자 구택은 소희를 바라보며 웃었다.“다들 알고 있잖아!”이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임시호도 말했다.“예전에는 소희와 구택이의 인연을 몰랐었지만, 다행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네요.”“소희는 우리 임씨 집안의 며느리로 정해져 있었던 거죠. 인연이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절대 비껴가지 않는 법이니까.”“좋은 말이군!” 강재석은 웃으며 말했
강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너희 둘이 먼저 놀고 있어라. 난 한 시간만 잘 테니, 한 시간 후에 구택이가 와서 나랑 바둑 두자꾸나.”“네, 그럴게요!” 구택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강재석이 낮잠을 자러 간 후, 소희와 구택은 후원으로 향했다.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 검고 긴 눈동자에 오후의 햇살이 비치며 온화한 빛을 띠고 있었다.“소희야, 드디어 우리 결혼하게 되었네!”두 집안이 서로 만난 후에야 결혼이 확정된 느낌이 들어, 그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소희는 정교한 이목구비에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 대체 나한테 어떤 예물을 준비한 거야? 설마 또 집을 준비한 건 아니겠지?”“맞아, 엄청나게 많은 집!”구택은 소회를 들어 올리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너에게 언제나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줄 거야.”소희는 귀가 뜨거워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그렇게 변덕스럽지 않아. 나는 청원이 제일 좋아.”그러자 구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네가 이런 말을 하니, 내가 너를 처음 만난 게 청원 때문이었던 게 의심스럽네!”“물론 진짜지,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해?”소희는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구택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난 뭐지?”소희는 그를 끌어안고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당신은 청원 안에 있잖아. 당신 없이는 청원이 있을 수 없지.”구택은 한순간에 표정이 풀어지더니, 소희의 얼굴을 살짝 키스하며 말했다.“욕심도 많네. 나도 갖고 싶고, 행복도 원하고, 집도 원하다니.”소희는 문득 구택이 예전에 했던 질문이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내가 노리는 목표는 절대 놓친 적 없어!”“내가 너의 오래된 목표 중 하나겠네?”소희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절대 놓칠 수 없는 대상이지!”구택은 흐뭇하게 웃으며 소희를 안고 복도를 걸어갔다.“한 시간. 그동안 우리 뭐할 수 있을까?”구택의 낮은 목소리에 소희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 급히 고개를 들
주란아는 넘버 나인에 미리 방을 예약했고, 모두가 차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명절이라서 그런지, 강성의 거리는 온통 불빛으로 가득 차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차 안에 있어도 도시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심은 창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며 문득 강시언을 떠올렸다. 그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는 습관처럼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시언도 저쪽에서 명절을 보내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시언은 이런 명절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아심을 떠올릴까?아심은 고개를 떨구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럴 리 없었다. 애정 따위는 시언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지난 연휴 동안 시언이 보여준 배려는 그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이었을 것이다.아심은 고개를 들어 다시 창밖을 보며, 더 멀리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언이 무사하길 간절히 빌었다.넘버 나인에 도착해 6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아심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온통 신선한 꽃들로 가득했다. 이에 아심은 잠시 놀란 듯 멈춰 섰다그 순간, 지승현이 꽃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며, 손에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불빛 아래 붉은 장미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화려해 마치 그곳에 서 있는 강아심 같았다.승현은 두 손으로 꽃을 건네며 말했다.“명절 축하해!”아심의 뒤에서 놀라움과 감탄의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심은 고개를 돌려 아현을 바라보았고, 아현은 란아의 뒤로 숨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에 란아가 웃으며 말했다.“인정할게요. 지승현 씨가 저한테 부탁했어요. 오늘 다 같이 사장님과 명절을 보내자고 말이에요.”“지승현 씨는 미리 와서 준비했고, 우리는 사장님을 여기로 데려오는 역할을 맡았죠.”승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절대 화내지 마. 이건 내가 모두를 설득해서 한 일이니까, 화가 났다면 나한테 화를 내.”아심은 꽃을 받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모두가 나랑 함께 명절을 보내주려고 한 건데
아심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이 없었다. 이때 정아현이 쿠키 한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사장님이 좋아하시는 거예요. 전부 사장님 몫이에요!”다른 사람들도 모여들어 아심과 함께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서, 명절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리고 지승현은 모두의 성화에 못 이겨서 남은 인생이라는 노래를 불렀다.노래를 부르다 말고 그는 자꾸 아심을 쳐다보았지만, 아심은 화면을 응시하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분위기에 속하지 않는 듯했다. 승현은 아심의 이런 성격이 좋으면서도 가슴이 아팠다.마음이 아련해지면서, 노래는 점점 더 진지하고 감정이 실려 불리게 되었다. 그가 노래를 끝내자,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승현은 아심을 돌아보며 말했다.“노래 하나 부르지? 내가 도와서 곡을 선택해 줄게.”이에 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노래 못 불러.”승현은 아심을 강요하지 않고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다시 그녀 옆에 앉았다. 방 안에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모두가 승현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 승현은 언제나 부드러운 성격으로 그들과 어울렸고, 그러면서도 틈틈이 아심을 세심하게 챙겼다. 그의 배려 깊은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좋은 인상을 주었다. 아현은 아심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장님, 지승현 씨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아심은 장난스럽게 물었다.“그런 남자가 마음에 들어?”그러자 아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저분이 저한테 관심 있겠어요? 사장님도 알면서 왜 그러세요!”아심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쥐고 미소만 지었고, 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사장님, 저는 사장님을 상사로도 친구로도 생각해요. 오늘 술을 마셨으니, 한마디만 솔직하게 할게요.”“사장님은 언제나 옆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아심은 아현을 바라보며 물었다.“하고 싶은
사람들은 늦게서야 흩어졌고, 모두 술을 마셨기에 대리 운전을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지승현은 굳이 강아심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섰고,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아심은 그 자리에서 그를 거절할 수 없어 말없이 승낙했다. 차 뒷좌석에 앉자, 지승현이 패션 후르츠 맛 요거트 병을 내밀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패션 후르츠 맛이야.”아심은 잠시 그를 보며 웃으며 물었다.“언제 샀어?”“방금 대리 기사를 기다리면서 맞은편 가게에서 샀어. 네가 술을 좀 많이 마셨잖아.”“밤에 속이 불편할까 봐, 특별히 가게에 부탁해서 네가 좋아하는 시리얼과 말린 과일도 넣었어. 한번 먹어봐.”어두운 조명 아래, 승현의 얼굴은 따뜻해 보였고, 아심은 요거트를 받아 들고 말했다.“고마워.”“나한테 고맙다고 할 필요 없어.”승현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아심은 요거트 병을 쥐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가 참 고맙게 느껴졌다.“참!”승현이 웃으며 말했다.“네 회사 업무를 몇몇 협력사에 소개했어. 걱정하지 마. 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회사들이야. 절대 임성현 같은 일은 없을 거야.”아심은 임성현 이야기에 자연스레 강시언을 떠올리며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얼굴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굳이 이렇게 부탁할 필요는 없어. 회사 일도 충분히 바쁜걸.”“네가 돈을 얼마나 벌든 상관없다는 건 알아. 그냥 네가 하는 일이 정말 훌륭하다는 걸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해서야.”승현은 밝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한마디면 되는 일이니까. 네가 잘해서 그들도 이익을 얻을 테고, 나중에 그들이 나한테 고마워할걸?”승현의 농담 섞인 말에 강아심도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가 한결 편해졌다.“그래도 고마워.”“그럼 네가 큰 계약을 따면, 나한테 밥 한 끼 사줘.”“알겠어!”차가 아심이 사는 곳
강솔은 갑자기 한 가지가 떠올랐다.“맞다, 전에 경성에서 스승님께 드리려고 산 목도리가 있었는데, 지난번에 스승님 댁에 갈 때 깜빡하고 가져가지 않았어. 일단 집에 가서 목도리 좀 가져올게.”지난번에 진석을 피해서 강성으로 돌아왔을 때, 마음이 불안정해서 소희와 함께 스승님을 보러 갔을 때도 목도리를 깜빡 잊었다.“그래.”진석은 차를 몰아 강솔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강솔은 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주예형의 차가 아파트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에 강솔은 살짝 놀랐다. 오늘 카페에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눈 뒤, 더 이상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시 강솔의 집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근데 도대체 왜 또 찾아온 걸까?진석은 예형의 차를 몰랐지만, 강솔의 표정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그는 얼굴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내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고, 진석은 강솔의 손을 꼭 잡고 아파트로 올라갔다. 예형의 차를 지나칠 때, 강솔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살짝 빼려 했다.진석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강솔은 힐끗 쳐다보며 손을 놓지 않았다. 강솔도 이제는 담담해졌다. 그녀는 차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고, 모르는 척했다.아파트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석은 강솔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왜 피했어? 그 사람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알까 봐?”“아니야!”강솔은 급히 설명했다.“그 사람이 오해할까 봐.”진석의 화가 치밀었고, 얼굴은 점점 더 무섭게 굳어지며 말했다.“오해? 그 사람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알까 봐 그렇게 두려워해? 아직도 그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어?”“그런 뜻이 아니야!”강솔은 답답해하며 말했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사람이 내가 오빠 때문에 자신이랑 헤어졌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된다는 거야.”강솔은 급하게 말하면서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아마 오늘 예형의 그 말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