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심은 어색함을 달래려 변명했다.“차를 타지 않은 건, 당신이 예전에 다른 사람의 선의에 쉽게 마음을 놓지 말라고 했잖아요.”강시언은 애매한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응.”그는 본인이 차를 타지 않은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 아심은 왠지 말을 덧붙일수록 더 꼬이는 느낌에 창피함을 느꼈다.“차라리 도도희 이모의 차를 탔어야 했나 봐요. 당신을 보호하려던 게 오히려 짐이 됐네요.”시언은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짐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아심은 시언의 말에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 땅에 겹친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나는 짐인가요?”“아니야.”시언의 대답에 아심은 마음이 풀어졌고, 살짝 시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때 왜 저를 꼭 떠나게 해야 했던 거예요?”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질문이 드디어 아심의 입 밖으로 나왔다.이에 시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전과 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그때 널 노리는 자들이 있었고, 그 세력은 상당히 강했어. 당장 그들을 처리할 수 없어서 네가 안전하게 떠나는 방법밖에 없었어.”아심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깜박이다가 멀리 어둠 속의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사실, 짐작은 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직접 들어서 고마워요.”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궁금한 건 앞으로도 전부 말해 줄게.”“그래요.”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시언이 물었다.“춥지 않아?”아심은 머리를 저었다.“안 추워요.”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편안함에 잠이 쏟아질 듯했지만, 그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 깊숙이 한 줄기 쓸쓸함이 밀려와 묘한 슬픔이 가슴을 찔렀다. 아무리 애써도, 눈물이 한 방울 눈가를 타고 흘러내려 시언의 목덜미에 떨어졌다.아심은 당황해 급히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냈지만, 이미 그의 등이 순간적으로 굳어짐을 느꼈다.시언은 잠
아심은 반쯤 눈을 감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었다 짧아지고, 다시 길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 산맥은 마치 야생의 짐승처럼 지평선 위에 웅크리고, 하늘의 초승달은 구름에 가려져 흐릿해졌다.아심은 주머니 속의 부적을 꺼내어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이게 꿈이라면, 조금 더 늦게 깨어나게 해주세요. 길도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그 순간 아심의 기억은 한때 사막에서의 일로 돌아갔다. 그날, 다리가 붓고 걸을 수 없었을 때도 시언이 아심을 업고 메마른 사막을 걸어 나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현기증이 날 정도였고, 시언은 아심이 잠들지 못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 기억이 가물가물한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헷갈리지만, 분명 그때부터였다. 시언에게 느끼는 감정이 경외와 두려움을 넘어선 다른 무엇이 되었던 것은.다시 시언의 등에 기대자,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해 아심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또다시 같은 길을 걷는 건 아닌지.‘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았으니, 이제 여기서 끝내자.’새로운 길을 선택했으니, 그 길을 뚜렷이 걸어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아심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을 원하지 않아. 그저 냉철하게 깨어 있고 싶을 뿐. 그렇게 또다시 결심하며, 스님의 충고가 떠올랐다. 거울 속의 꽃, 물 위의 달과 같은 헛된 꿈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이....반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장원에 도착했다. 아심은 시언의 등에서 내려와 두 걸음 물러섰다.“수고했어요, 고마워요.” 아심은 이전보다 한층 더 거리감을 두며 차분히 말했다.시언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아심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심은 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다른 일행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휴식 중이었다. 도도희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모두 기다리려 했지만 내가 그냥 먹고 쉬라고 했어.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푹 쉬도록 해.” 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녁은 너희 방으로 보내 뒀으니 천천히 먹고 일찍 자.”
“나 먼저 올라가서 씻을게요.” 아심은 하루 종일 산을 오른 탓에 온몸이 땀에 젖어 빨리 샤워하고 싶었다. 시언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두 발짝 걷던 아심은 문득 돌아서며 말했다.“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요.”시언은 고개를 돌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물 안 닿게 샤워할 수 있어?”“잘 감싸면 되잖아요.” 아심이 대답했다.“괜찮아.” 시언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아심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답답함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언은 이미 티셔츠를 벗고 있었고,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나 있었다. 아심은 순간 심장이 뛰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심이 들어온 것을 본 시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옷장에서 새 옷을 꺼내더니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아심은 시언을 따라 욕실로 들어가던 중, 그가 바지를 벗으려는 것을 보고 얼떨결에 외쳤다.“벗지 마요!”시언은 차분한 눈빛으로 아심을 응시하며 물었다.“이 상황이 모순되고 혼란스럽지 않나?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아심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가에 희미하게 물기가 맺혔다.잠시 후, 아심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시언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무거워진 마음을 느꼈다. 산을 오른 하루의 피로보다도, 조금 전의 순간이 자신의 에너지를 앗아가는 듯했다.갑자기 문이 다시 열리며, 아심이 의자를 들고 들어와 차분히 말했다.“앉아요.”“뭘 하려고?” 시언은 눈빛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앉으라면 앉아요.” 아심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도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시언은 잠시 주저했지만, 결국 의자에 앉았다.“일부러 화내게 하려는 건 아닌데, 정말 괜찮아. 다치면 원래 스스로 치유하는 법이라.”시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워기가 위에서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아심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작은 승리감이 엿보였다.
아심은 샤워를 도와주는 중 불가피하게 손이 닿을 때마다 시언의 탄탄한 피부에서 전해지는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언의 단단한 근육은 아심의 부드럽고 하얀 손과는 대조를 이루며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아심은 거리낌 없이 시언의 가슴부터 아래로 거품을 발라 내려가며 씻겨 주었고, 다시 위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시언이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의 팔 근육은 긴장으로 인해 힘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됐어, 이제 나가.”아심은 장난스럽게 말했다.“한 번 더 발라야 깨끗해질 텐데요. 다 끝나고 나면 바디크림도 발라줄 수 있는데, 어때요?”시언은 그윽한 눈빛으로 시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더 안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장담 못 해.”아심은 시언의 시선을 피하며 잠깐 내려다보았다가 얼른 거품을 씻어주고 나와버렸다.문을 닫자마자 안에서 시언의 낮은 앓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심은 순간 긴장했지만, 곧 시언의 상처에 물이 닿았을까 걱정되어 손을 문에 올린 채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곧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사실 아심은 바로 위층으로 가려 했지만, 거실을 지나자 진서하가 식탁에 저녁을 세팅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젖은 티셔츠와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심은 이런 상태로 밖에 나가면 오해를 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언의 방에 다시 돌아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시언이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머리를 닦으며 방에서 나왔다. 그가 잠시 멈춰 아심을 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아심은 말했다.“진서하 씨에게 나가서 쉬라고 해 주세요.”시언은 아심의 젖은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옷장에서 자기 티셔츠 하나를 꺼내 아심에게 건넸다.“여기서 씻어. 샤워 후에 와서 저녁 먹자.”“저도 제가 쓰는 전용 바디워시와 크림을 써야 해요. 게다가 티셔츠만 갈아입을 수도 없고요. 먼저 내보내 주세요.” 아심이 단호히 말했다. 시언은 아심을 잠시 바라보
강시언의 눈에는 냉랭한 기운이 가득했고, 말투도 차가웠다.“이미 선택한 거 아니야? 뭘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거지?”시언은 말을 마치고 손을 닦은 후, 그대로 돌아섰다. 아심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설거지하다가, 목이 메어 삼키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강성으로 돌아갈 거예요.”시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더욱 차가워졌다.“마음대로 해. 네 일은 네가 알아서 결정해.”시언은 그 말을 남기고 더 이상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아심은 두 손으로 주방 싱크대의 차가운 대리석을 힘껏 짚고,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후에야 남은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다.주방과 식당을 모두 정리하고 불을 끄고 나서, 아심은 무의식적으로 1층 방 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침대에 누웠지만 하루의 피로가 몰려와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산속의 별은 유난히 밝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지만, 아심이 올려다본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달도 희미하게 노란빛만 남겨둔 채 숨은 듯했다.‘비가 오려나. 내일은 산에서 내려간 후에 비가 왔으면 좋겠어.’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심은 문득 아래층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시언 역시 잠들지 않은 듯했다. 베란다에서 몸을 살짝 기울이면 시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아심은 그 충동을 꾹 참으며 다시 하늘의 별을 찾기 시작했다.목이 뻐근할 정도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멀리 있는 작은 별장을 보았고, 무언가에 끌리듯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핏 보니 기주현이었다.발목을 다친 주현이 왜 방에 들어가 쉬지 않고 풀밭에 앉아 있는지 의아했다. 아심은 의아해하며 외투를 걸치고 주현에게 다가갔다....가까이 다가가자 역시 주현이 맞았다. 주현은 혼자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심을
“처음엔 응원했는데, 이렇게 여기저기 떠돌면서 연애 한 번 못 하는 걸 보더니 슬슬 초조해지신 거죠.” 주현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결혼하라고 하신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요. 매번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기정사실로 만들었죠. 소개팅 상대도 이미 정해 놨다더라니 까요.”“집에 가자마자 혼인 서류 쓰고, 결혼식 올리고, 결혼식 끝나면 바로 신혼 방 입성.”아심은 주현의 불만스러운 투에 웃음을 터뜨렸다.“뭐 그렇게 빨리 진행되겠어요?”주현은 볼을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집이 돈은 있어도 권력은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 부모님은 항상 권력 있는 가문으로 시집가길 바라시고요.”“이번 소개팅 상대도 무슨 과장의 아들이래요. 심지어 우리 남동생은 그쪽 도움 덕에 공무원 자리까지 잡았다고 엄청나게 만족하시더라고요.”“그러니 가자마자 결혼식 올리고 신혼 방 입성, 그게 전혀 과장된 얘기 아니고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싫다면 반대할 수도 있죠.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평생의 반려자를 대신 정해 줄 순 없으니까.”주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싫죠, 게다가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할 리도 없고요.”“근데 만약 그 사람이 키도 크고 잘생겼다면?”“그렇더라도 안 좋아할걸요!”아심은 주현의 단호함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역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네요?”주현은 얼굴이 붉어지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리란 법은 없잖아요.”아심은 주현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마음에 둔 사람에게 고백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나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아심이 말하자, 주현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절대 안 해. 거절이라도 당하면 나중에 얼굴을 어떻게 보고 지내요? 설령 사귀게 된다 해도 평생 그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 거라고요.”“사랑이
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내려왔고, 기주현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덕분에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사실 그 사람에게도 말해줄 수 있을 거예요.” 강아심이 용기를 주자, 기주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꿈 꿔요!” 주현이 밝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잘 자요.”아심도 미소로 답하며 각자 방으로 향했다.아심은 잠자리에 들려고 걸음을 옮기다가, 시언이 발코니의 라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가 없었던 걸 보면, 언제 나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시언과 인사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어느새 그의 발코니 근처까지 다가가 있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시언이 시선을 주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아심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입가의 미소도 어색하게 굳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심은 주저앉을 듯한 마음으로 시언의 닫힌 커튼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침대에 누워 짐을 정리하며 시간이 흘러,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되었다. 피곤함에 서서히 잠이 들었지만, 한밤중에 번쩍이는 섬광에 눈을 떴다. 바로 뒤이어 쿵! 하는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다.커튼을 닫지 않은 덕분에 번개가 방 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곧이어 천둥소리가 연이어 터지며 하늘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아심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아심은 발코니로 나가서 밖을 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져 내리며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번개와 천둥이 뒤섞인 채, 하늘에서 내리치는 빛이 산을 가를 듯 무섭고도 위엄이 가득했다.세찬 비바람과 천둥소리 속에서, 산속의 비가 주는 압도적인 힘을 아심은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다.그때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언이 밖으로 나와 아심처럼 대리석 난간 앞에 서 있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귀마개를 꺼내 귀에 꽂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천둥소리는 이중으로 차단되어 이제 아심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비바람 소리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곧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강아심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전 여덟 시였다. 커튼을 열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빗줄기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 발코니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언이 아직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비 오는 날 산속의 공기는 더 촉촉하고 신선했으며, 흙과 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안개에 휩싸여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아심은 난간에 기대어 잠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여 내려다보니, 시언이 나타나 말했다.“아래로 내려와서 밥 먹어.”아심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세수하고 갈게요.”아심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준비를 마쳤다. 옷을 갈아입으며 옷장 앞에 놓인 여행 가방을 보자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아마 오늘은 떠나지 못할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내려가자 시형은 평소처럼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아심은 가볍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시언은 아심을 힐끗 쳐다보곤 휴대폰을 내려놓고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심도 조용히 앉아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오랫동안 고용된 군인이었지만, 시안은 식사할 때 급하게 먹는 법이 없었다. 시언의 타고난 예절과 품위는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듯했다.한참 후, 도우미가 수프를 들고 왔을 때,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는 두 사람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아심은 프랑스식 긴소매 드레스를 입고,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어깨에 흩날리며, 식사 중에도 곧은 자세와 단정한 매무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살짝 숙인 고개와 우아한 목선이 마치 그림 속 주인공처럼 고혹적이었다.반면 아심의 맞은편에 앉은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