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방연하가 왜요?”구은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영하가 우리 둘이 새벽에 밖에 나갔던 걸 은근히 언급했잖아. 굳이 방연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첫째, 나는 방연하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내 눈엔 그저 네 친구일 뿐이야.”“둘째, 나는 걔를 좋아하지 않아. 단지 걔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걔의 소유물처럼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은정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기억해 둬. 너는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걔에게 설명해 줄 의무가 없어.”유진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은정은 계속해서 말했다.“이번 주말은 즐겁게 보내려고 나온 거니까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아.”“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방연하한테 분명하게 말할 거야. 더 이상 나한테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유진은 가만히 듣다가 중얼거렸다.“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은정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예전에 유진에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제는 그 말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만 같아,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은정은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낮추며 물었다.“그런 말을 전에 들어본 적 있어?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은정은 약간 실망한 듯했지만, 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한층 깊어졌다.“그냥 내가 한 말만 기억해 두면 돼.”그러자 유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진짜로 연하한테 마음을 줄 생각 없어요?”‘이번 여행에서 연하와 함께 지내면서, 연하의 성격도 어느 정도 알았을 텐데.’은정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깊어졌다.“그럼 너는? 정말 나랑 걔가 이어지길 바라는 거야?”은정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유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은정은 유진의 부드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결국 참았다.“그냥 신경 쓰지 마. 난 걔를 좋아하지 않아. 그러
강렬한 햇살이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 안은 따뜻했고, 반복되는 도로 풍경이 졸음을 유발했다.전날 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임유진은 지루한 차 안에서 금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들었다.햇살이 유진의 얼굴을 비추며 피부를 더욱 맑고 투명하게 만들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편안하게 잠든 모습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구은정은 차 속도를 줄이고, 보다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운전했다.한 시간이 지나 강성에 도착하자, 유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여진구와 방연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이후 남쪽 도심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질녘이었고, 유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주던 은정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이틀 동안 챙겨줘서 고마워요. 집에 들어가서 차 한잔 마시고 갈래요?”저녁노을이 은정의 얼굴을 물들이며 원래 차가운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다음 주에 보자.”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주엔 출근해야 해요. 오래 못 가서 업무가 많이 쌓였을 거예요. 토요일에도 출근할 수도 있어서 못 가게 되면 미리 연락할게요.”은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바빠도 건강 챙겨.”“알았어요!”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노을빛이 유진의 얼굴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었고, 그녀의 밝은 미소가 더욱 돋보였다.“그럼 들어갈게요. 운전 조심해요!”“잘 가.”은정은 역광 속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유진은 배낭을 메고 직접 휠체어를 밀며 도로 건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턱 앞에서 한 번 더 돌아보았다.은정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것을 보고, 유진은 환하게 웃어 보인 후 문 안으로 들어갔다.유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은정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희미한 연기가 황혼 속에서 퍼지며,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을 가렸다.유진이 집으로 돌아오자, 유진을 챙겨주는 노하숙 아주머니가
“열어 보면 알겠지!”유진은 상자를 집어 들고 임유민의 품에 안겨주었다. 유민은 혹시나 장난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 본 순간, 유민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것은 도자기로 만들어진 마트료시카 인형이었다.“이거 정말 못생겼네!”유민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난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걸 왜 줘? 아니, 어린애들도 이런 거 안 좋아할걸?”유진은 웃으며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이건 네가 원래 아이 같다는 걸 상기시키려는 거야. 너무 어른스러운 척하지 마!”유민은 찌푸린 얼굴로 유진의 손을 피하며 반박했다. “누가 어른스러운 척했어? 누나가 가볍게 구는 거지, 나까지 누나처럼 행동하라는 건 아니잖아!”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나처럼 사는 게 뭐가 어때서?”유민은 손에 든 마트료시카의 둥근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나가 항상 그렇게 행동하니까, 내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거야. 그래야 누나를 보호할 수 있잖아.”변성기를 지나고 있는 유민의 목소리는 아직 어딘가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이에 유진은 웃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유진은 자신의 키와 거의 비슷해진 유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난 나를 지킬 수 있어. 진짜로 어린애가 아니라고!”그러자 유민은 코웃음을 치며 마트료시카를 손에 들고 문 쪽으로 향했다.“나 갈게. 누나도 푹 쉬어.”“마음에 안들면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선물해!”유진은 문틀을 잡고 몸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임유민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선물하라고?’그랬다간 그 여자애가 유민의 취향을 의심하며 멀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좋아하는 여자애도 없었다.방으로 돌아온 유민은 마트료시카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유민은 싫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피규어 컬렉션 진열장 한쪽에 올려두었다.다른 피규어들
구은서는 한때 많은 사람에게 찬사를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였다. 그런 은서에게 손성후의 과한 친절과 아부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촌스럽고 가벼워 보였다.성후는 은서의 무뚝뚝한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그리고 은서는 무심하게 듣기만 하며 형식적으로 몇 마디 응대했다. 그러다 문득 성후의 삼각형 눈매를 보고 속이 울렁거렸다.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은서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서선영이 있는 곳으로 갔다.서선영은 하화현과 몇몇 부인들과 함께 마작을 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하화현이 비꼬듯 말했다.“은서는 이렇게 훌륭한데, 왜 구은정은 제대로 된 사람이 못 되는 걸까요? 확실히 부모의 영향이 중요한 것 같아요.”옆에 있던 다른 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제 남편 말로는, 구은정도 꽤 유능하다고 하던데요? 그룹을 맡은 지 얼마 안 됐지만, 운영을 체계적으로 잘해 나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하화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죠.”“대학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고, 젊었을 때 친구들과 방탕하게 놀다가 결국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집안으로 돌아간 거예요.”“그러니 경영을 잘할 리가 없죠. 사실상 서선영 여사님의 동생이 회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버티지도 못했을걸요?”이런 이야기는 모두 서선영이 조금씩 흘려 들려준 내용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은정은, 집안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물이었다.하화현은 말을 끝내고 서선영에게 확인하듯 물었다.“맞죠, 여사님?”서선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쩌겠어요? 전 은정을 친아들처럼 생각했어요.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계속 돌봐주려고 노력했죠.”“그런데 은정이 회사를 망쳐버리도록 내버려둘 순 없잖아요. 그래서 동생에게 도와주라고 한 거예요.”하화현은 비꼬듯 웃으며 말했다.“후계자가 그렇게 무능하면 후견인이 더 힘들겠어요.”“가족끼리 돕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새하얀 페르시안 고양이 한 마리가 3층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2층 난간을 밟고 한 번 더 도약한 뒤, 부드럽게 정원으로 내려섰다.오사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세상에! 정말 예쁜 고양이다. 네가 키우는 거야?”구은서는 애옹이를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웃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구은정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고양이까지 데리고 왔다.은정은 이 고양이를 보물처럼 여기며 전담 관리인을 붙여 돌보게 했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은서는 이 고양이가 마치 은정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눈에 거슬렸다.하지만 은서가 은정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집안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소희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싫었다.사라는 애옹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먹을 것을 이용해 유인했다. 이윽고 그녀는 가볍게 애옹이를 품에 안았다. 그런데 애옹이는 사람을 경계할 줄도 몰랐다. 항상 은정에게 보호받아 왔기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얼떨결에 품에 안긴 애옹이는 당황하며 불안한 듯 울어댔다.사라는 원래 고양이를 키우던 사람이었기에, 고양이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애옹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애옹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이 눈 색깔 좀 봐! 맑은 갈색이야. 게다가 완전 새하얀 털이라니, 정말 보기 드문 고양이야!”사라는 감탄하며 애옹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너한테 줄게.”그 말에 사라는 깜짝 놀라며 은서를 바라보았다.“이거 너무 갑작스러운데? 주인이 있는 고양이를 내가 어떻게 데려가?”은서는 냉랭한 시선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난 촬영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도 적고, 돌볼 여유도 없어. 사실 예전부터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었어. 네가 키우면 고양이한테도 행운이겠지.”사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야? 농담하는 거 아니지?”“진심이야.”은서는 애옹이를 다
오사라도 거들며 말했다.“이 고양이가 누구 것이든 난 상관없어요. 어쨌든 은서가 나한테 준 거니까, 불만이 있으면 은서한테 가서 따져요.”“아가씨!”도우미는 간절한 표정으로 구은서를 바라보았다.“이 고양이는 도련님이 제게 맡긴 거예요. 아가씨가 함부로 보내버리면 도련님께서 저를 탓하실 거예요!”애옹이는 더욱 애처롭게 울어댔다. 불안한 듯 좁은 철창 안을 이리저리 맴돌며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은서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뭐죠? 이 집에서 이제 내가 고작 고양이 한 마리도 마음대로 못 한다는 건가요?”은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를 노려보았다.“당신들 같은 도우미들은 상황을 봐가면서 행동할 줄 안다더니, 결국은 내 오빠한테 붙겠다는 거네요?”“좋아요, 그렇다 쳐도 나한테 대놓고 대들 생각은 하지 마요. 안 그러면 너 후회하게 될 거니까.”도우미는 눈앞의 은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저 조금 도도한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그녀는 점점 더 극단적이고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자신은 단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 했을 뿐이었다. 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그저 일일 뿐, 누구에게 붙고, 누구를 거스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은서의 위협적인 태도를 보고, 도우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어 번 헛기침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단순한 고양이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이건 구씨 남매의 힘겨루기다. 사라는 고양이 이동장을 번쩍 들고, 마치 승리자처럼 손을 흔들었다.“그럼 난 간다, 은서야!”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가. 누가 감히 막나 보자.”사라는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갔다.한편, 고양이를 돌보던 도우미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조용히 퇴장한 뒤, 바로 은정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이건 반드시 알려야 해!’도우미는 조용한 곳으로 가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전화번호를 누르기도 전에,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순식간에 누군가 그녀의 손을 쳐버렸다.탁!
은정은 차가운 분노를 내뿜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곧장 은서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다. 은서는 실크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열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지? 오빠?”마침 도우미가 은서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다가, 문 앞에 선 은정을 보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몰래 숨을 죽이며 이복남매의 대치를 지켜보았다.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집안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심상치 않은데? 싸움이라도 벌어지려나?’은정의 눈빛은 싸늘했고, 낮게 깔린 목소리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내 고양이는 어디 있어?”은서는 이미 은정이 왜 온 건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틀에 기대며 태연하게 웃었다.“내 친구가 그 고양이를 너무 좋아하길래, 그냥 선물로 줬어요.”은정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그건 내 고양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멋대로 남한테 줘?”은서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작 고양이 한 마리잖아요. 내가 결정하면 안 되나? 게다가 이건 오빠를 위해서이기도 해요.”“이제 막 회사를 맡았으면, 일에 집중해야죠. 고양이 키우는 게 뭐 그리 중요해요?”은정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구은서를 꿰뚫었다.“네가 누구한테 고양이를 줬든 상관없어. 당장 전화해서 무사히 돌려놓으라고 해.”그러나 은서는 시선을 살짝 돌리며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아마 못 돌려줄걸요? 내 친구가 오늘 저녁 8시 비행기로 BL시에 갔어요. 야외 촬영이 있어서 말이죠. 고양이도 같이 데려갔겠지.”은정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다시 한번 말할게. 지금 당장 고양이를 데려와.”“진짜로 못 데려와... 으악!”은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은정이 그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은서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버둥거렸다.“놔, 놔줘요!”은정의 팔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하며, 손가락이 서서히 조여졌다. 그의 목소리는 살기가 서
서선영이 다급하게 물었다.“주사 맞았어? 고양이 몸에도 광견병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구은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늦었어. 원래는 내일 아침에 맞으러 가려고 했어.”서선영은 안타까운 나머지 목소리가 쉬어버렸다.“여보, 사람을 문 고양이는 절대 키우면 안 돼요! 한 번 사람을 물면 또 물게 돼요. 물어대는 개랑 똑같아요. 재앙이라구요!”구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은서가 잘한 거다. 고양이는 그냥 남에게 주면 돼.”은정은 아무 말 없이 은서를 향해 걸어갔다. 은서는 차가운 살기를 내뿜는 남자를 보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와 한 발짝 물러섰다.“오빠, 어쩌려고요?”구은정은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양이, 반드시 되찾아와야 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내 물건은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어.”“오늘 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랑 너희 어머니 둘 다 이 집에서 나가!”은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고개를 돌려 구은태를 바라보았다.“아빠, 저랑 엄마는 이 집안사람이 아니에요?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오빠가 저희를 내쫓겠다고요?”서선영은 더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나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이 집을 위해 아무리 희생해도 결국은 남이에요. 내가 낳은 딸도 마찬가지죠. 성이 서씨라도 이 집에서 제 자리는 없는 거예요.”“은정아, 은서를 겁주지 마라.”구은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은정의 표정은 냉혹하기만 했다.“겁주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봐.”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은 은서의 잠옷 깃을 움켜쥐고 그대로 그녀를 질질 끌고 나갔다.은서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평소의 단정하고 오만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고, 은정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졌다.“은서야!” 서선영이 울며 따라붙으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은정아, 제발 놔줘! 부탁이야!”하지만 은정은 그 말을 생각도 없었다. 서선영은 다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