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옹이는 얌전한 고양이였고, 한 번도 물건을 망가뜨린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구은정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애옹이는 늘 내 방에 있거나 정원에서만 놀아. 어떻게 이층에 있는 네 엄마 방까지 갔다는 거지?”구은서는 냉소를 흘렸다.“고양이는 원래 활동적인 동물이잖아요. 사람처럼 규칙을 따를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것도 아니고요!”서선영이 급히 구은서를 막으며, 넓은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은서야, 아까 네 아버지가 너한테 뭐라고 하셨니? 제발 은정이랑 싸우지 마라.그냥 드레스 한 벌일 뿐이야. 몇천만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이미 한 번 입었다고 생각하면 돼.”“엄마!”은서는 울분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왜 굳이 고양이한테 이렇게까지 져줘야 해요? 우린 그 고양이한테 아무 빚도 없잖아요! 근데 왜 우리가 계속 참고, 양보해야 하는 거죠?”“지난번에는 저를 할퀴고, 이번에는 엄마 드레스를 망가뜨렸어요. 이건 분명히 일부러 한 짓이에요!”“은서야!”구은태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만해라. 가족끼리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렇게 싸울 필요는 없잖니.”그러나 은서는 단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아버지, 그 고양이가 온 이후로 이 집에는 평온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오늘 일도 마찬가지예요.”“이건 제가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고, 엄마가 문제를 만든 것도 아니에요. 그 고양이가 문제라고요!”“엄마랑 저는 그동안 조심하면서 살았어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해요? 그냥 차라리 우리 모녀를 내쫓으세요.”“이렇게까지 참고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나가서 사는 게 낫겠어요!”말하면서 은서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도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서선영은 애가 타는 표정으로 말했다.“은서야, 이제 그만해. 내가 문을 잘못 닫아둔 게 문제야.”“엄마!”은서는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우린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호텔 투숙객처럼, 고작
도우미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께서 그렇게 오래 기다리셨는데, 안타깝네요.”그러면서 도우미는 주머니에서 하얀 고양이 털 몇 가닥을 꺼내 보였다.“이것들도 보관해 둘까요?”서선영은 힐끗 그것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도련님께서 이제 떠나시니, 그 고양이도 함께 사라지겠지. 앞으로는 필요 없을 거야. 그냥 드레스와 함께 모두 버려.”구은정은 조용히 방으로 올라갔다. 발코니에 앉아 있던 애옹이는 평소와 달리 풀이 죽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애옹이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고양이는 아래층에서 벌어진 일들을 듣기라도 한 듯, 은정을 향해 조용한 눈빛을 보냈다.은정은 무릎을 굽혀 애옹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네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걸 알아.”그러나 은정은 증거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반박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둘의 행동 덕분에, 떠나야 할 이유를 얻었으니까. 은정은 가볍게 고양이를 들어 올려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짐 싸자. 우리, 이제 떠날 시간이야.”...이틀 후, 주말이 되자 임유진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그녀의 짐은 많지 않았다.이미 가족들이 생활용품을 전부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유진은 옷만 몇 벌 챙겨 오면 됐다. 어차피 한 달만 지낼 계획이었으니. 노정순은 밀키트를 가득 준비해 냉장고에 채워두었다. 그 덕분에, 요리를 못 하는 유진도 굶을 일은 없었다.이날, 소희와 임유민도 유진의 새집을 구경하러 왔다. 유민은 거실 소파에 앉아 집 안을 둘러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정말 확실한 거야? 혼자 지낼 수 있겠어?”유민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전자레인지 사용법은 아냐? 설거지기는 사용할 줄 알아? 옷은 어떻게 빨 거야?”유진은 그 옆에 앉아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청소 도우미를 고용했어. 매일 아침에 내가 출근한 후에 와서 집을 정리해 줄 거야. 네가 걱정하는 일
임유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쪽으로 향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짜 빠르네!”문을 열자, 여진구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방연하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연하가 먼저 활짝 웃으며 말했다.“유진, 새집 입주 축하해!”유진은 꽃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고마워!”연하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효성이 출장 가 있어서, 나중에 돌아오면 따로 축하해 준대.”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전화 왔었어.”진구는 들고 온 상자를 현관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뭘 사야 할지 몰라서, 집에 어울릴 만한 장식품 하나 골라 봤어. 어디에 둘지 한번 봐봐.”이에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나 그냥 한 달 동안만 여기 있을 건데. 다들 이러니까, 마치 내가 여기서 영원히 사는 것 같잖아!”셋은 웃으며 거실로 이동했다. 그때, 소희가 있는 것을 본 진구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안녕하세요!”연하도 따라서 인사했다. 연하는 온라인에서나 임유진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눈앞의 여성이 어떤 전설적인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지난번 유진의 생일날,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구택과 함께 있어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그러나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소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성격이 쾌활한 편인 연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조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그러나 소희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들 모두 유진이 친구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유진은 소희의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렇지? 소희는 엄청 친절해. 우리 삼촌처럼 엄격한 스타일이 아니니까, 둘도 편하게 있어!”소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부엌에 과일 좀 가져올게. 너희들은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어.”소희가 주방으로 향하자, 유민이 벌떡 일어나 따라갔다.“숙모, 나도 같이 갈래요!”연하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목소
방연하는 즉시 찬성하며 말했다.“샤브샤브 좋죠! 시작되는 번영이라는 의미가 있대요. 그러니 새집 입주 축하 자리로 딱 맞아!”여진구가 물었다.“어디로 갈까?”성연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아는 곳이 있어. 유명한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맛은 정말 정통 그 자체야.”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어디?”연희는 유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름을 말했다.“샤브샤브 가게.”그 순간 유진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뭔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살짝 아프고, 뭔가가 꽉 차오르는 듯한 이질감.유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거기, 가본 적 있는 것 같아요.”연희는 깊은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그럴 거야. 그 가게, 영화 촬영지 근처에서 꽤 유명하거든. 매일 손님들로 가득 차.”진구는 표정을 약간 굳히며 말했다.“너무 먼 거 아닌가요?”그러나 연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맛만 있으면 됐죠! 멀면 어때요? 연희 씨가 추천하는 곳이라면, 틀림없을 맛집이죠 나는 찬성이요!”진구는 그녀를 힐끗 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너 아부하는 실력이 점점 초고속으로 늘고 있는 것 같은데?”연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뭘 잘못 말했는지 몰라 당황했다.‘장난으로 한 말 아니었나?’연희는 결정을 내렸다.“그럼 이렇게 하죠. 거리가 머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요.”그러나, 유진은 한 가지가 걸렸다.“근데 우리 삼촌 아직 안 왔는데?”소희는 잠시 손목시계를 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굳이 기다릴 필요 없어. 내가 메시지 보내서 바로 가게에서 만나자고 할게.”다들 동의했고, 진구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차량 배치가 결정되었다. 유진과 연하는 진구의 차를 타고, 소희와 요요는 청아와 함께 연희의 차를 탔다.차 안에서, 청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유진이를 가게로 데려가는 거, 괜찮을까? 너무 충격받지 않을까?”연희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유진이는
전화를 끊은 뒤, 성연희가 돌아보며 말했다.“또 네가 내 방패막이가 되어줬네!”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괜찮아. 어쨌든, 다 해결됐어!”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언젠가 서인과 유진이가 정말 함께하게 된다면, 꼭 네게 술 한잔 올려야 할 거야!”이에 우청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차를 올릴 때 뭐라고 불러야 할까?”연희는 눈을 깜빡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숙모님이라고 불러야지! 이 정도로 힘을 실어줬으면, 이제 호칭을 바꿔야지 않겠어?”소희는 난감한 듯 웃었다.“서인은 결혼을 결심했다가도, 네 이 요구 때문에 바로 파혼할걸?”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요요도 덩달아 까르르 웃었다. 소희가 요요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요요야, 뭐가 그렇게 웃겨?”요요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말했다.“또 왕자님과 공주님이 결혼하는 거예요?”연희가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맞아! 이번에도 네가 화동이 되는 거야! 기분 좋아?”요요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연희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우리 결혼할 때, 요요에게 작은 티아라를 만들어 줬었잖아. 그거 잘 보관해 둬야 해! 그게 바로 역사적인 증거니까!”청아는 웃으며 말했다.“시원 오빠가 이미 신경 썼어. 그 티아라랑 요요가 결혼식에서 입었던 드레스도전용 보관함에 넣어 놨어.”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각자의 행복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요요의 성장을 기록하는 하나의 시간의 조각이기도 했다.연희는 감탄하며 말했다.“역시 시원 오빠는 세심해!”청아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날렸다. 그 모습이 더욱 우아하고 고요하게 빛났다.샤브샤브 가게에 도착했다. 임유진은 차에서 내리며 눈앞의 간판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샤브샤브 가게.’깨끗하고 밝은 유리문, 전통적인 느낌의 벽돌 장식, 그리고 옆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나
현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그러면 저희는 재료랑 육수를 준비할게요.”현빈은 사람들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당부한 후, 이문 등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방연하는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환경 괜찮네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려면 경쟁이 엄청 치열하다고 들었어요. 배경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던데요?”성연희는 눈꼬리를 살짝 올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웃었다.“맞아. 이 가게 처음 문 열었을 땐 말도 못 하게 시비 거는 사람들이 많았어. 싸움도 몇 번이나 났지.”“우리 사장님, 혼자서 그놈들 한 무리를 상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다들 기가 죽어버렸잖아!”이에 연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단하네요!”임유진은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여기, 나 예전에 온 적 있는 것 같아요.”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희미한 그림자. 그런데도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연희가 곧바로 물었다.“유진아, 너 여기 와본 적 있어?”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잘 기억이 안 나요.”연희는 아쉬운 듯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그럼 그냥 잊어버려. 오늘은 샤브샤브 먹으러 온 거잖아.”주방에서, 이문이 채소를 다듬으며 현빈에게 물었다.“유진이 우리를 진짜로 잊은 거예요?”현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런 것 같아.”이문은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유진이 저렇게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네.”“형님이 우리보다 더 힘들 거야. 조금 있다가 형님 오면, 이 얘기는 꺼내지 마.”현빈이 단호하게 말했고, 이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홀에서 요요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꾸 밖으로 나가 놀고 싶어 했다. 이에 유진이 무심코 말했다.“내가 후원에 데려가 줄게.”그러자 연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후원도 있어?”말을 꺼내고서야 유진은 스스로도 멈칫했다. 그래, 유진은 어떻게 여기 후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후원에 뭐 있어?
유진은 돌아서서 유민을 바라보며 웃었다.“여기에 이렇게 예쁜 마당이 있을 줄 몰랐네.”유민은 살짝 안도하며 다시 특유의 느긋한 태도로 돌아갔다.“샤브샤브 가게랑은 좀 안 어울리긴 하네.”유민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당을 보자마자 누가 만들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진이 여기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요요는 유진의 품에서 내려와 고양이 집 앞에 다가갔다. 조그만 머리를 집 안으로 들이밀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여기 고양이 있어? 어디 있지?”그래, 유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고양이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아마도 하얀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요요는 손발을 사용해 고양이 집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그대로 들어갈 것 같아 보이자, 유민이 서둘러 다가가 요요를 들어 올렸다.“고양이 없어, 요요! 이제 그만 찾아!”요요는 팔을 뻗어 담장 위의 장미꽃을 따려고 했다. 그러자 유민이 그녀를 어깨 위에 올려 가장 크고 활짝 핀 꽃을 따도록 도왔다.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벌써 아이 돌보는 연습하는 거야? 이거 삼촌이 보면 더 조급해지겠는데?”“삼촌이 조급해한다고 뭐가 달라져? 결국 이건 숙모한테 달린 거지.”유민은 늘 임구택을 존경했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그때, 허스키한 저음이 유진을 불렀다.“임유진!”그 목소리에 유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구은정이 그녀를 깊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움켜쥐어져 있었고, 관절이 희미하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안에는 어딘가 불안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이 순간, 그는 정말로 유진이 모든 걸 기억해 낸 줄 알았다. 마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더 두려워지는 것 같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유진도 은정을 바라보았고, 어렴풋한 형체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을 붙잡기도 전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잠깐의 정적이
임구택이 들어서자,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아우라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한다.오늘 구택이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분위기는 마치 임유진의 새집을 축하하는 자리라기보다, 차라리 비즈니스 모임 같았다. 구택도 이를 느꼈는지, 전화를 핑계 삼아 자리를 떠났다. 방연하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숨을 내쉬었고, 성연희가 소희에게 농담을 던졌다.“다들 널 부러워할 거야!”소희는 익힌 소고기 완자를 연희와 자신의 그릇에 나눠 담으며 물었다.“뭐가?”“다들 생각할걸? 임구택 와이프가 될 정도에, 매일 함께 지내는 사람이 평범한 여자는 아닐 거라고!”연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사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굉장히 편한 사람이야.”그렇지 않았다면 친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건 그냥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른 거겠지.”연희는 소고기 완자를 한입 베어 물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고 휴지로 뱉어냈다. 그리고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청아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왜 그래?”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요요 좀 봐줘. 가서 확인해 볼게.”화장실에 들어가자 연희는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하며 괴로워 보였다. 소희는 돌아서서 오현빈에게 물 한 잔을 부탁한 뒤, 다시 화장실로 돌아와 건넸다.“몸이 안 좋아?”연희는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소고기 완자가 좀 비린 것 같아.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네.”소희는 눈썹을 찌푸렸다.“나도 먹었는데, 하나도 비리진 않던데?”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연희,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얼마 전, 노정순이 그녀에게 말했었다. 헛구역질이 나거나 식욕이 갑자기 떨어지면 바로 알려달라고. 그때는 그냥 넘겼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초기 임신 증상이었다.연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 며칠 전에 테스트해 봤는데, 임신 아니었어.”소희는 의아한 표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