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간미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먼저 끊을게요.”전화를 끊고, 간미연은 밖을 내다보았다.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형형색색의 등불이 비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적막해 보였다.그녀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간미연은 자신의 아버지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그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아 한동안 슬픔에 휩싸였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가족은 남 부러울 것 없이 화목했고 그녀도 자기 아버지가 엄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아버지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있을 때, 그 부드럽고 자상함은 그녀가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간미연은 차마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오랫동안 혼자 속으로 괴로워했다.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녀는 그 불륜녀를 쫓아내고 가족의 평화를 다시 찾으려고 시도했다. 간미연은 몰래 두 사람을 미행하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남겼다.모든 증거를 수집해 그녀의 아버지와 당당히 맞섰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침착하게 그녀의 엄마는 이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 또한 밖에 숨겨둔 애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간미연은 처음에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같이 차를 타고 그녀의 어머니를 미행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별장으로 들어갔다가 밤새 나오지 않는 것을 목격한 후, 간미연은 더 깊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알고 보니 화목하고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는 건 모두 허상이고 거짓말이었다.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두 사람은 감정이 없는 정략결혼을 했고, 결혼하기 전에 모두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결혼은 하되, 각자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서로 합의 봤다고 했다. 간미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아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혼도 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간미연
간미연은 고개를 돌려 장명원을 바라보았다.장명원은 며칠 전에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잘생긴 그의 얼굴이 더 돋보였다. 웃으면 드러나는 순진함 속의 왠지 모르는 사악한 기운, 마치 판타지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 소년 같았다.“한밤중에 데이트라고? 왜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장명원은 농담을 건넸다.간미연은 그런 그를 묵묵히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명원이 그녀를 노려보며 무슨 말을 하려는데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도착하는 바람에 간미연은 그를 뒤로한채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한밤중의 엘리베이터 안. 그들 단 두 사람밖에 없었는지라 분위기는 조용하고 적막했다.두 사람의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원래 가짜 연애를 하는 척하기로 했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관계가 조금씩 달라졌다.장명원은 술기운을 빌어 질투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몇 차례의 키스까지 나누었다. 하지만 날만 밝으면 둘 중 누구도 전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못 하는 사람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로를 대했다. 마치 지금처럼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속마음을 품고 있었다.엘리베이터를 나오자, 간미연은 집 문을 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곧 설이니까 집으로 가 봐. 내일 나도 갈 거야.”장명원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가기 싫어.”간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현관에서 두 사람은 신발을 바꿔 신고 거실로 들어섰다. 불이 켜지지 않은 방, 유리 창문 너머로 바깥의 화려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간미연은 말없이 집마다 환히 켜진 등불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가족들끼리 함께 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부유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설날을 보내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들과 재회하고, 함께 기쁨을 나눴다.장명원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간미연을 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간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장명원은 거실 불을 켜고 소파에
그때, 그는 갑자기 간미연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에 던졌다. 그는 아예 간미연 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장명원은 간미연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횅해져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간미연, 그녀의 까만 두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달리 아름다워 보였고 촉촉하고 빨간 입술에 쌀쌀한 표정까지… 장명원은 마음속으로 겨우 말할 수 없는 충동을 꾹 삼켰다.장명원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잊고 그녀의 입술만 쳐다보며 다가갔다.그러자 간미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냉소했다.“장명원, 또 많이 마셨어?”“아니.”장명원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는 간미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키스하고 싶어.”“만약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면 어떡할 거야?”그녀의 말에 장명원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뭐라고?”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그녀와 묵언이 함께 있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장명원은 한 번 피식 냉소하더니, 간미연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이제 집에 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바로 그때, 간미연이 갑자기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무슨 뜻이야? 설마 양다리라도 걸치려고?”장명원은 그녀를 돌아보며 콧웃음쳤다.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간미연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심장박동은 확연히 빨라졌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나지막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예상치 못한 간미연의 말에 장명원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어서 샤워하러 가. 난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간미연은 태연하게 말을 마친 후,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장명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황홀한 기분으로 한창 샤워를 하면서 조금 전 간미연이 했던 말과 그녀의 표정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곱씹었다. 샤워를 하니 취기가 솟아올랐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모종의 충동을 느끼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서둘러 몸을 닦고 부랴부랴 욕실을 나갔다. 거실의 불은 아직도 켜져 있었다.
장명원이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밝았고, 따스한 햇볕이 짙은 남색의 큰 침대에 비껴 침실 안에는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오늘은 섣달그믐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밖에서는 어느새 은은한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장명원은 졸린 얼굴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젯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나자,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간미연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옆자리는 텅 비어있었다.막 일어서서 그녀를 찾으려는데, 밖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는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며 아직도 자는 척했다.간미연은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위에서 아직도 자고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쿵쾅쿵쾅-장명원은 주체할 수 없는 심장 떨림에 더 이상 자는 척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간미연은 파자마를 입고 벽에 기대어 침대 위의 남자를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장명원은 그런 그녀의 시선에 부끄러워 그만 얼굴이 '쓱' 붉어졌다. 그는 이불을 다시 끌어당겨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좋•••••• 좋은 아침.”장명원은 계속 이불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겨우 말을 걸었다.간미연은 웃음이 났지만 겨우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고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아침 만들었어. 옷 입고 나와서 밥 먹자.”“알았어.”장명원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다급히 이불 속으로 몸을 감췄다. 간미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쿵-문이 닫히고 나서야 장명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는 자기 손바닥이 온통 땀투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어젯밤, 그는 간미연과의 싸움에서 압승을 거뒀다. 평소 게임을 할 땐, 간미연에게 지기 일쑤였는데 마침내 그에게도 판도를 뒤엎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하지만 밤까지만 해도 장명원이 이긴 줄 알았는데 왜 날이 밝자마자 정작 침대에서 주도권을 차지한 사람은 오히려 간미연 같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런 생각에 장명원은 화가 나 단숨에 이불을 걷어 올리고 막 일어나 욕
간미연은 고개를 들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난 정략결혼은 진짜 싫어. 연애하는 척 연기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우린 이만 끝내.”간미연은 정략결혼의 거짓된 친밀감을 싫어했다. 그녀는 장명원과 자신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두 사람도 자기 부모님 같은 사이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커졌다. 간미연은 다른 사람의 거짓말과 속임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장명원과 그런 쇼윈도 부부가 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장명원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혹시 마음속에 묵언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정말 묵언을 좋아한다면 어젯밤엔 왜… 하지만 장명원에게는 묵언을 좋아하냐고 물어볼 권리도 없었다. 그는 줄곧 가짜였으니까…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장명원과는 달리 간미연은 줄곧 냉정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빨리 먹어.”간미연은 컵에 담긴 물을 비우고 바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간미연은 방으로 돌아가 물건을 챙기고 집에 가려고 했다.이런 상황에 어떻게 계속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장명원은 혼자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는 문에 기대어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젯밤, 내가 너를 만족시키지 못한 거야?”“…”간미연은 캐비닛 앞에 반쯤 쭈그리고 앉아 USB를 손에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며 장명원을 바라보며 말했다.“꺼져.”“나… 난…”잘생긴 장명원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인정할게. 난 어젯밤이 내 인생에서 처음 겪어본 경험이었어. 무슨 문제가 있다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 고칠게.”그의 말에 간미연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순간, 장명원을 때려죽이고 싶어졌다.“간미연, 우리 결혼하자.”당황한 장명원은 그녀를 붙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간미연은
점심, 소희는 노명성이 성연희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가 막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매부리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보스, 작전을 내려주세요. 어떤 작전이든 뭐든 다 좋아요.]하얀 독수리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소희는 길을 걸어가며 그의 메시지를 답장했다.[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오늘 차였어요. 제가 차였다고요.][오.][감히 무슨 자격으로 저를 찬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저한테 뽀뽀도 하고 잠자리까지 가졌는데 왜 갑자기 절 찬 거죠?]“…”소희는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몰랐다.[저한테 자기를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어요. 좋아요, 뭐. 전 당장 여기를 떠날 거예요. 작전을 맡아 서울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래요.][난 설을 보내고 있어서 바빠. 시간 없다고.][보스. 전 한 번도 보스한테 뭐를 부탁한 적이 없잖아요. 저 좀 도와주세요. 작전 수행비는 한 푼도 받지 않을게요. 전부 보스랑 푸른 독수리한테 줄게요.]하얀 독수리가 말했다.[그럼 푸른 독수리한테 물어봐. 설에 작전을 맡을 생각이 있냐고.][푸른 독수리 씨, 저희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보스가 작전을 주면 제 작전 수행비까지 전부 당신한테 줄게요.]한참을 기다려도 푸른 독수리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푸른 독수리 씨, 전 당신이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저를 도와서 그 여자 컴퓨터를 좀 해킹해 주세요. 화풀이라도 하게요.]푸른 독수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근데 왜 갑자기 너랑 헤어지겠다고 하는 거야?][모르겠어요. 하룻밤 같이 보냈더니 헤어지재요.][그럼 넌 헤어지기 싫은 거야?][누가 헤어지기 싫대요? 전 이미 참을 만큼 참았어요. 저한테 키스할 땐 언제고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러 가다니… 전 그녀보다 더 일찍 헤어지고 싶었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기뻐서요.]...…한편, 장명원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장씨네 가문으로 돌아왔다.집에 손님이 왔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어요.”장명원이 말했다. 그는 약간 의기소침한 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오후, 소희는 오 씨와 함께 정문에 대련을 붙이러 갔다.오랜만에 본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고용인들에게 전부 휴가를 줬다. 그래서 집에는 요리사 한 명과 기사 한 명, 그리고 오 씨만 남았다.오 씨는 평생 결혼하지 않으셨고 이젠 강씨 가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설에도 이 집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오 씨는 이제 나이도 나이인지라, 소희는 그를 배려하여 혼자서 왔다 갔다 하며 의자를 딛고 높은 곳에 대련을 붙였다.잠시 후, 소희가 방에 들어가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임구택에게서 전화가 수없이 와 있었다. 그녀가 막 임구택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그에게서 전화가 또 걸려 왔다. “전화를 왜 안 받아요?”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휴대폰 너머로 임구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자 소희는 살짝 웃었다.“대련을 붙이러 갔는데 휴대폰을 그만 안 가져가서요.”임구택은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 어딜 갈 때 꼭 휴대폰을 들고 가세요. 걱정했잖아요.”“네, 알았어요.”소희는 손가락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며 말했다.그때, 민이가 소희 앞으로 달려와 그녀 곁에 자리를 잡은 채 휴대폰을 향해 목청을 돋구었다.“소희야, 소희야.”“무슨 소리야?”임구택이 물었다. 소희는 휴대폰을 움켜쥔 채 민이를 향해 소리쳤다.“조용히 해.”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소희?”“네, 이웃집 아이인데 절 부르고 있어요.”소희가 말했다.“목소리만 들어도 무례한 아이일 것 같네요.”임구택은 농담으로 한 말이다.“••••••”소희는 민이를 손으로 밀쳐내며 말했다.“됐어요. 전 이제 할아버지께서 음식을 준비하는 걸 도와주러 가봐야 해요. 구택 씨도 자꾸 메시지 보내지 마세요.”“소희 씨가 자꾸 생각나는데 그럼 어떡해요?”임구택이 말했다.그러자 소희는 부끄러웠는지 수줍게 피식 웃었다.
설날 전 마지막 저녁밥이 풍성하게 식탁 위에 차려져 있다. 깨끗하고 넓은 창문은 고풍스러운 방을 한결 더 돋보이게 했다. 방에는 은은한 홍매화 향기와 백단향이 서로 어우러져 그 향기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었다.곧, 이 은은한 향기는 음식의 향기로 가려졌다.오 씨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점심부터 지금까지 장장 여섯 시간 동안 끓였으니 어르신께서도 어서 드셔보십시오.”강씨 노인은 천천히 음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아가씨께서 안에 있는 햄과 죽순을 좋아해서 제가 먼저 한 그릇 떠드리고 오겠습니다.”강씨 노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회색 솜저고리를 입고 있었다.“걔는 내버려 둬,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강씨 노인의 말에 오 씨는 피식 웃었다.“아가씨께서 이 집에서 함께 설을 몇 년 보내지도 못하셨는데 저라도 아이 취급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아이요? 무슨 아이요?”소희는 강씨 노인에게 따뜻하게 데운 술을 들고 와서 물었다.“너 말이야, 너. 어째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린애 같은지 참…”강씨 노인은 허허 웃었다.“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소희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네. 맞아요. 저랑 어르신은 아가씨가 항상 이렇게 아이 같기를 바란답니다.”오 씨는 햄과 죽순이 가득 담긴 그릇을 그녀에게 주었다.“맛있어요.”음식이 거의 다 나오자 소희가 오 씨를 불렀다.“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여기 앉으세요.”“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와 어르신께서 천천히 담소를 나누시면서 드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부르시고요.”오 씨는 상냥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이제 이 집에 외부인은 없어요. 그러니까 같이 설을 보내요.”“우리 가문에서 평생을 지냈으면서 아직도 우리를 남으로 생각하는 거야? 소희 말 들어, 빨리 앉아서 같이 먹게나.”강씨 노인의 말에 오 씨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어르신…”“내 말 들어, 빨리 앉아.”강씨 노인은 오 씨에게 술잔을 가져다주었다.“네.”오 씨는 조심스럽게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