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아침 공기는 유난히 차분했다. 계절은 늦가을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었고,
도시의 공기에도 서늘한 바람이 묻어 있었다.
서윤은 출근길 내내 핸드폰을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
문자 하나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그녀는 새삼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
어젯밤 그의 말이 마음을 건드리고, 그 파문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준은 자신의 사무실 창가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표정하던 그 얼굴이,
이제는 잔잔한 감정선을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서윤 앞에서는. 그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저녁, 별관에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았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차 향기, 익숙한 호흡. 하지만 감정은 결코 익숙하지 않았다.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감정이란 건...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거라서,
그 흐름을 통제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며 이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더이상 무감하지 않았다.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파동이 있었다.
이준이 물었다.
"그럼, 그 불쑥 튀어나온 감정이... 나 때문이라면요?"
서윤은 대답 대신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미지근한 온기처럼,
그녀의 마음도 정확히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는지 말하기 애매했다.
"감정이라는 건, 조심히 다뤄야 해요. 치료처럼요.
너무 빠르게 덮으면 오히려 더 아플 수 있거든요."
그날, 서윤은 새로운 감각 처방 도구를 시도했다.
눈을 감고 촉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작은 테라피.
그녀가 작은 종소리를 울리자, 이준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서윤은 그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
하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신뢰가, 그리고 그 평온한 얼굴이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가끔은요... 대표님,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게 가장 큰 처방이 되기도 해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을 때, 이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밤이 깊었다. 서윤은 오늘 그가 잠시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이준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오래간만에 편안한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마음을 더 깊이 건드렸다.
서윤은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조금 더 그에게 기울어졌다고.
* * * * * * * * * * * * * * * *
주말의 병원은 평일보다 고요했다. 복도에는 발소리도 드물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조차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
서윤은 자그마한 노트북을 펼치고,
새로운 감각 치유 프로그램의 기획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최근 이준과의 세션을 통해 얻은 반응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 손끝의 반응, 대답 없는 고개 끄덕임.
이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이제 서윤의 작업 속에도, 생각의 결에도 고스란히 들어와 있었다.
이준은 오후가 되어서야 병원으로 들어섰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무를 살펴야 한다며 나온 그는 사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건물에 발걸음이 이끌리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윤이 있다는 공간. 그녀의 목소리와 손길이 닿은 공기.
그곳이 자신에게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 놀라웠다.
그는 서윤의 작업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방해가 될까 싶어서 망설였는데, 그냥... 들어왔어요."
서윤은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웃었다.
"대표님은 여기에 오실 자격이 있으세요. 언제든지요."
그날 세션은 따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대신 두 사람은 함께 차를 마시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단지 감정의 온도만으로 가득 찬 시간.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끔은 말보다 침묵이 훨씬 많은 걸 알려주잖아요.
대표님이 가끔 조용히 웃을 때, 저는 그게 뭔가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침묵이라는 게, 무의식의 말일 수도 있겠네요.
그 무의식이 당신 앞에선 자꾸 말이 많아져요."
서윤은 오늘 처음으로, 프로그램이 아닌 본인의 손으로 직접 만든 천연 향수를 꺼냈다.
라벤더와 시더우드, 그리고 아주 은은하게 감도는 감귤 향.
"이건 제 취향이 조금 들어간 향이에요. 테스트해보시겠어요?"
이준은 말없이 그녀가 내민 손목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손목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숨결 하나의 거리.
그가 아주 천천히 향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서윤 씨 같아요. 부드러운데, 한 번 맡고 나면 계속 기억에 남아요."
서윤은 말없이 손목을 거두며 작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속엔 그 말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날 밤, 이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서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향기, 고맙습니다. 괜히 그 향 속에서 당신 생각만 나네요.]
잠시 후 도착한 답장.
[대표님, 괜찮으시다면 그 향수 하나 더 만들어드릴게요.
이건 제 방식의 처방전이니까요.]
이준은 그 짧은 메시지를 읽고 한참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그의 무의식은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늦은 밤. 창밖에는 빗방울이 조용히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공기 속, 어두운 사무실은 이미 조명을 끈 채 반쯤 잠든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가 밤 열한 시를 알리고 있었고, 이준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윤의 메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은색 펜으로 눌러 쓴 글씨.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 쓴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글귀에는, 하루치 피로를 다독이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오늘은 커피 말고, 따뜻한 우유를 드세요. 몸이 먼저 회복돼야 마음도 따라와요.”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배려가, 이준의 마음에 조용한 파장을 남기고 있었다.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경계보다, 익숙함보다, 더 빠르게 스며드는 감정이 있었다.그리고 그런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있는 사람은 서윤 자신이었다.그날따라 서윤은, 평소보다 더 조용히 이준의 공간을 정리하고 나왔다.마치 어떤 분위기나 감정의 파동이 그 안에 잔잔하게 남아 있는 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현관을 나서던 순간, 이준이 뒤늦게 불러세운 건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서윤 씨.”서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문고리를 손에 쥔 채, 그의 목소리를 향해 눈길을 줬다.“…오늘은 그냥 보내고 싶지 않네요.”그 말 한마디가 무겁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복도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둘 사이의 거리에는 어떤 설명도, 조건도 없었다. 단지 마음이 머물고 싶은 곳에 천천히 닿아가고 있을 뿐.사무실 안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지만, 서로의 존재가 그 공간을 천천히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준은 조용히 서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끝을 감쌌다.서윤의 손은 놀랄 만큼 차가웠고, 이준의 손은 그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요즘, 이상해요. 감정이 자꾸 앞서요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 하지만 서윤의 몸과 마음엔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엌 한쪽에 놓인 머그잔, 접힌 담요, 창가에 기대어 있던 남자의 등. 그것들이 모두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조금씩 그와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서윤은 조용히 물을 끓이며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다. 이준이라는 사람은,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씩 들어오고 있었다. 경계를 넘지 않지만, 머뭇거림조차 배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방식으로.현관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창 너머로 스며들어 이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회색 니트와 트레이닝 팬츠 차림의 그는 전날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그 표정에도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묻어 있었다."잘 주무셨어요?"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의 침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조심스러운 인사였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따랐다. 컵 사이로 퍼지는 향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다."어제… 불편하진 않으셨어요?"그의 질문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단지 매너나 형식이 아닌, 진짜 걱정이. 서윤은 머리끝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대답했다."생각보다… 괜찮았어요."이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미세한 변화 하나가 무겁던 아침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반쯤 올렸다. 밝아진 실내가 둘 사이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식탁에 마주 앉아 조용히 아침을 나누는 시간. 특별한 대화 없이도 두 사람 사이엔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작은 눈빛,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커피 향이 닿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감정을 조금씩 증폭시켰다.식사를 마친 이준이 문득 말했다."오늘 병원 가지 않으셔도 돼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보였다. "당분간은 오후 일정으로만 잡아놨어요. 오전엔 시간 여유가 있어서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어색한 정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편안함이 천천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어깨 너머로 고요한 밤을 바라보았다.서윤은 여전히 그의 어깨에 가볍게 몸을 기댄 채, 잔잔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등 너머로 조심스럽게 전해졌고, 그 감각이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따뜻한 집처럼 익숙하고 부드러웠다.이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서윤 씨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 주는 게, 어쩐지 믿기지 않아요."서윤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말했다."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신… 그냥 느끼기만 해도 돼요."그 짧은 문장이, 이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늘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조용한 시간이 흘렀고, 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 움직임에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벌써 가세요?"그녀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오래 있으면, 다음이 더 어색해질까 봐요. 오늘은 여기까지."이준은 잠시 머뭇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다음도 있는 거죠?"서윤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 대신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짧은 손짓 하나에 이준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고마웠어요. 오늘. 그리고… 맛있었어요. 정말로."그녀의 말에 이준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서윤 씨가 있어줘서 가능했어요. 오늘이라는 시간이."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그 속에는 다음을 기다리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서윤이 돌아간 뒤, 이준은 조용히 거실 정리를 마치고, 부엌에 남은 찻잔을 씻었다. 물소리가 가라앉자, 집 안엔 그녀의 잔향만이 남았다. 라벤더 향초가 꺼진 자리에서도, 그녀가 앉았던 쿠션의 모양에서도.그는 그 향기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마치 그 따
이준은 서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조용히 사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밤을 향해 깊어지고 있었고, 불규칙하게 점등된 창들 사이로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는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와 마주했던 진료실의 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그 시각, 서윤 역시 자신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라벤더 향초는 반쯤 타들어가 있었고, 불빛은 어느새 작아져 그녀의 그림자도 흐릿해지고 있었다.이준의 마지막 말, '오늘 서윤 씨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밤새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어떤 위로보다도 진심처럼 느껴졌기에.다음 날 아침, 진료실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 짧은 눈맞춤에는 이전과는 다른 작은 울림이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좋은 아침이에요. 잘 쉬셨어요?""네, 덕분에요. 대표님도요?"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덕분에 그 말이 그토록 따뜻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오전 회의 후, 이준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서윤이 라벤더 화분 옆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여기… 생각보다 조용해서 좋아요. 자주 오세요?""네, 예전에는 종종 왔는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이준은 그녀 옆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제… 그 말.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는 말요. 이상하지 않으셨어요?"서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히려… 저도 같은 기분이었어요. 요즘은 마음이 먼저 움직이게 되는 날들이 많거든요."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에 살짝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 바람에 흔들리는 화분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그날 저녁, 퇴근 무렵의 복도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병
병원 건물은 평일의 마지막 빛을 받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준은 자신의 진료실에 들어서자 창문을 반쯤 열었다. 가을바람이 천천히 밀려들며 서랍 위에 둔 종이들을 살짝 흔들었다.그는 조용히 그 바람을 마주했다. 이전에는 이처럼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어색했다. 하지만 요즘은… 하루의 끝자락에서 꼭 한 번은 서윤을 떠올리게 되는 자신을, 조금은 받아들이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서윤은 병원 구내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나타났다. 하나는 늘 자신이 마시던 라떼, 다른 하나는 얼마 전 이준이 마셨던 블랙."오늘도 환자 많으세요?"서윤의 물음에 이준은 커피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말 전이라 그런지 예약이 많아요."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커피잔을 가리키며 물었다."근데… 제 커피까지요?"서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냥… 어제 감사했어요. 혼자서만 좋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닌 것 같아서요."그 말에 이준은 잠시 멈칫했다. ‘혼자가 아닌’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그날 오후, 병원 옥상은 조용했다. 이준은 짧은 틈을 내어 옥상으로 올라왔고, 그곳엔 이미 서윤이 라벤더 화분을 옮겨 놓고 있었다."조금 더 빛이 잘 드는 쪽으로요. 향이 더 진해질 것 같아서."그녀의 설명에 이준은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은 난간 가까이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불어 잎이 흔들렸고, 조용한 정적이 둘 사이를 채웠다.하지만 그 정적은 더 이상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있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감싸주는, 조용하고 다정한 시간이었다.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가끔 생각해요.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과, 그냥 함께 있는 거요."이준은 그 말을 곱씹듯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말없이도 편한 게… 참 귀한 거라는 걸 요즘 많이 느껴요."그들은 그렇게,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오후를 함께했다.해질 무렵,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병원 복도에는 환자들의 움직임과 간호사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얽혀 들려왔다. 이준은 짧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서윤이 있는 카운슬링실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그녀가 있는 공간을 향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들려오는 서윤의 웃음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누군가와 상담 중인 듯,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흘렀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평온해졌다.그는 괜히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조심스레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갔다. 다가가고 싶지만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것이 그가 이제 막 배우고 있는 감정의 온도였다.오후 내내, 이준은 어딘가 산만했다.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마음속 한편에서는 계속 그녀의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그저 평범한 한순간이었을 뿐인데, 그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진료가 끝난 늦은 오후, 그는 다시 그녀를 향해 걸었다. 이번엔 노크를 했다. 서윤이 문을 열었을 때, 이준은 조용히 작은 플라스틱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이거… 복도에서 보다가 예뻐서요. 카운슬링실 창가에 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서윤은 화분을 받아 들고 천천히 웃었다. 화분 안에는 작은 허브 잎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라벤더였다."감사해요. 이준 씨. 향이 좋네요.""서윤 씨가 알려준 향이에요. 그날 이후로… 자꾸 찾게 되더라고요."두 사람은 창가에 화분을 함께 놓았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 빛에 비친 라벤더 잎은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가끔 생각해요."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공간이 참 이상해요. 마음이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는데, 어쩐지 점점 더 따뜻해져요. 사람들의 고백이 이 공간을 다정하게 바꿔주는 것 같기도 하고."이준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그리고 이준 씨와 나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