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다인이를 챙기라고?”“무슨 문제 있어? 다인이 환자니까 밥할 때 신경 좀 써. 그리고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들를 테니까 밥은 꼭 해두고.”그 말에 임슬기는 이상한 생물체를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배정우를 쳐다봤다. 배정우는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임슬기가 그 고마움을 모르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내 결혼 생활에 끼어들고 집안을 망하게 한 여자 시중이나 들라고? 나한테 모욕을 주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네.’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임슬기, 거절하려고? 네 동생 생
임슬기는 폐가 움츠러드는 듯한 고통에 기침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그래. 알았어.”그러고는 캐리어를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뜩이나 몸이 약한 데다가 병까지 걸렸고 또 복부의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라 28인치 캐리어를 혼자 들려니 두 걸음도 못 가서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멈추지 않았다.반쯤 갔을 때 배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짐 갖다 놓은 다음에 밥 준비해. 점심은 집에서 먹을 거야.”임슬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배정우가 임종현에게 해를 끼칠까 봐 발걸음을 멈추고
목이 가벼워지자 임슬기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기침하다 나온 피는 몰래 검은 옷에 닦은 다음 고개를 들고 배정우를 보며 웃었다.“정우야, 얼마나 더 말을 들어야 해? 난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너한테 2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어. 이젠 너한테 자유를 주고 두 사람이 당당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날 보내주지도 않잖아. 배정우, 내가 뭘 더 어떻게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배정우는 어두운 눈으로 임슬기를 쳐다봤다.“아직 부족해. 임슬기, 넌 아직 빚을 채 갚지 못했어.”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사람을 두려움
그 말에 연다인이 분노를 터트렸다. 조금 전 연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임슬기, 누가 내연녀라는 건데?”“당연히 너지. 여기 너 말고 더 있어? 나랑 정우는 정략결혼이 아니라 연애하고 결혼했어. 넌 뭔데?”예전에 임슬기는 명인시의 가시 돋친 장미라 불릴 정도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왜냐하면 독설을 잘했고 안하무인인 데다가 세상에 두려움이 없었다. 배정우 같은 사람 말고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남자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을 뻔했
임슬기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벌벌 떨렸다.2년 전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TV를 통해 알게 되었다. 유언도 듣지 못했고 아버지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다. 그녀가 갔을 땐 이미 재만 남아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너무 단순했고 연다인과 배정우를 철석같이 믿은 게 잘못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절대 임슬기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연다인, 혹시 우리 아빠를 죽인 사람이 너야?”연다인이 코웃음을 쳤다.“상상력이 참 풍부하구나, 너.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쇠약해져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계단 난간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문을 열자 배달원이 서 있었다. 임슬기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물건을 안쪽에 놓아줄 수 있나요?”배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안쪽에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임슬기의 머리와 손에 피가 나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다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이곳은 재벌
‘다인이한테 사과하라고? 꿈 깨.’아무리 비굴하고 나약하고 상스럽다 할지라도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임슬기의 집안을 망하게 한 것도 모자라 남편까지 빼앗아간 내연녀에게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임슬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폐의 고통과 목에서 전해지는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난... 다인이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짜증이 밀려온 배정우는 그녀의 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더욱 꽉 조였다.“임슬기,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임슬기는 핏발이 선 눈으로 배정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입에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기괴하게 웃었다.“이제 만족해?”배정우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두 눈이 어찌나 깊은지 임슬기와 배정우의 사랑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임슬기!”그는 화를 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임슬기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내 동생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배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피가 흐르는 허벅지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무릎 꿇으라고 했지? 꿇을게. 얼마나 꿇을까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