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쇠약해져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계단 난간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문을 열자 배달원이 서 있었다. 임슬기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물건을 안쪽에 놓아줄 수 있나요?”배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안쪽에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임슬기의 머리와 손에 피가 나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다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이곳은 재벌
‘다인이한테 사과하라고? 꿈 깨.’아무리 비굴하고 나약하고 상스럽다 할지라도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임슬기의 집안을 망하게 한 것도 모자라 남편까지 빼앗아간 내연녀에게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임슬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폐의 고통과 목에서 전해지는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난... 다인이한테 손도 대지 않았어.”짜증이 밀려온 배정우는 그녀의 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더욱 꽉 조였다.“임슬기,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마.”임슬기는 핏발이 선 눈으로 배정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입에서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기괴하게 웃었다.“이제 만족해?”배정우는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두 눈이 어찌나 깊은지 임슬기와 배정우의 사랑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임슬기!”그는 화를 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임슬기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내 동생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배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피가 흐르는 허벅지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무릎 꿇으라고 했지? 꿇을게. 얼마나 꿇을까
번개가 내리치니 배정우는 이상하게도 불안하고 초조해져 들고 있던 펜을 휙 던져버렸다.권민은 창밖을 힐끗 보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번뜩이는 번개를 보게 되었다. 곧이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고 그는 입술을 틀어 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직도...”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원래는 걱정되는 마음에 입을 연 것이었지만 그의 걱정이 되려 배정우의 심기만 거슬리게 한다면 아마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배정우는 원래부터
배정우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커튼을 쳐주려고 일어나려고 했다.“내가 커튼 치고 올게.”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연다인은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정우야, 커튼 안 쳐도 돼. 비가 그치고 나면 갠 하늘에 뜬 햇살이 바로 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잖아.”말을 하면서 연다인은 고개를 푹 숙였고 눈물이 뚝뚝 이불 위로 떨어졌다.“정우야, 난 우리가 다시 비 갠 뒤 피는 무지개처럼 함께 힘든 일을 헤쳐나가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우리 다시 그럴 수 있을까?”배정우는 그녀의 눈물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연다인이 유산으로 감정이 불안
귓가에 울리는 삐 소리에 배정우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누워있는 임슬기를 보면서 그녀도 심장이 멎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의료진은 계속 임슬기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면서 거칠어진 숨결을 내뱉으며 배정우를 힐끗 보았다.]“보호자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것 같네요.”마음의 준비를 하라니...배정우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설마 죽는다는 말씀인가요?”의료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보호자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죽어요. 더구나 몸에 칼에 맞
하지만 만약 임슬기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2년 동안 그는 온 힘을 다해 임슬기를 원망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는 누굴 원망해야 하는 거고 누구에게 화풀이해야 하는 걸까?그 순간 누군가 그를 의자에서 확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벽으로 쾅 밀쳤다.“배정우,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는데. 내가 슬기 씨한테 잘해주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게 지금 네가 잘해주고 있다는 거냐?”배정우는 고개를 들자 자신의 멱살을 잡은 진승윤이 보였다. 그는 슬픔이 가득 담긴 두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차갑게
중환자실.임슬기는 호흡기를 단 채 조용히 누워있었다. 두 손등은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렸기에 의사는 결국 두 팔에 주삿바늘을 꽂을 수밖에 없었다.두 다리와 무릎, 그리고 복부까지 전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다친다면 아마 미라가 되어버릴 것이다.그녀의 안색은 창백해 백지장 같았고 의료 기기가 일정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살아있다고 믿기 어려울 것이다.배정우는 그녀의 침대 옆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임슬기, 죽지 마. 난 죽으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까!”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
진승윤도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임슬기를 안심시키듯 말했다.“일단 결과 기다려 보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까. 다만...”임슬기가 눈을 부릅떴다.“다만 뭐?”“너도 네 몸 상태 알잖아. 그렇게 무리하다가 현정 씨가 깨어나면 더 미안해할걸?”그 말에 임슬기는 고개를 떨구며 낮게 말했다.“나도 알아. 근데 현정이가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어?”다만 연다인 뒤에는 배정우가 있어 혼자서 상대하기엔 벽이 너무 높았다.임슬기는 문득 진승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승윤아, 너 대성 그룹에서 몇 년이나 법무 맡
“배정우, 너 지금 연다인 감싸는 거야?”임슬기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이 사람이 연다인 편 드는 게 하루이틀인가. 뭘 또 묻고 있나 싶었다.연다인은 배정우 품에 안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정우야, 나 정말 억울해. 어젯밤 내내 너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그 말에 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근데 내가 언제 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어젯밤이라고 바로 짚어? 내가 무슨 일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나 보네? 너도 연기하느라 참 힘들겠다.”연다인은 순
도착하자마자 임슬기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내 육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문주 씨, 혹시 실검 처리 어떻게 됐어요? 혹시 모르니까 김현정 깼을 때 못 보게 조치 좀 부탁해요.”기사를 막기 위한 정리를 끝낸 후, 임슬기는 연다인의 아파트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연다인이 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팔짱을 낀 임슬기가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엔 뻔히 보이는 경멸이 가득했다.“임슬기, 네가 여긴 왜 왔어?”“내가 왜 왔는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연다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글쎄, 모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