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는 임슬기를 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몸이 절로 부들부들 떨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임슬기! 당장 내려와! 네 동생 생각은 안 해?”“하! 넌 항상 내 동생으로 날 협박하더라. 그거 말고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뭔데? 전에는 날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그 약속을 지킨 게 지금 이 상황이야?”임슬기는 말을 하다 보니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서러웠다.“네가 나한테 무릎을 꿇으며 청혼한 거잖아. 그래서 너와 결혼한 건데. 지금 봐봐. 네가 무슨 짓을
임슬기의 몸이 덜덜 떨렸고 산소가 부족해지며 더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사실 발버둥이라도 쳐보려고 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배정우의 두 눈동자를 보니 다시금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의 심장도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됐어. 뭐하러 발버둥 쳐.'‘나도 이젠 지쳤어. 그냥 이대로 배정우 손에서 죽을래.'‘애초에 날 살린 것도 배정우니까 죽이는 것도 배정우가 하게 할래. 그럼 더 이상 빚진 것도 없잖아.'그렇게 그녀는 두 눈을 감으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꼭 죽음을 받아들인 모습이었다.그 순간 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력이
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미안해요. 오늘 아침에 재판이 있어서 정우한테 연락했었어요. 정우가... 슬기 씨 괴롭힌 건 아니죠?”그때의 일이 떠오른 임슬기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바닥을 보았고 힘겨운 미소를 지어냈다.“네. 아니에요.”진승윤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다. 이내 상을 올려주며 죽 그릇을 내려놓았다.“닭죽이에요. 영양가가 아주 많다고 하더라고요.”“고마워요.”그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진승윤이라도 없었으면 그녀
진승윤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정우야.”배정우는 그들에게 다가간 뒤 상을 엎고는 임슬기를 확 끌어내렸다.“임슬기, 재주가 좋다?”임슬기는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몰랐고 그저 고통만 참으로 말했다.“배정우, 나와 변호사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그만해.”“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야밤에 널 병원으로 데리고 와주겠어?”임슬기는 화가 났다.“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 내 말은 안 믿는다고 쳐도 네 절친한 친구인 변호사님의 말은 믿어줘야 하
그날 밤 임슬기는 베란다에서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연다인이 아래층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말이다.“배정우가 널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겁먹고 있어? 네가 나서지 않으면 임슬기가 사람을 빼돌렸다는 거 어떻게 증명하라고?”“그래, 알았어. 내가 곧 갈 테니까 일 처리 똑바로 해.”연다인은 애초에 배정우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위장해 그녀가 사주한 것처럼 그날 밤의 진실을 덮으려고 한 것이다.‘하, 악랄해. 아주 완벽한 계략이네.'어쩐지 왜 매번 연다인에게 지고
그날 밤, 임슬기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도 상처가 가득했고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어 너무도 가련해 보였다. 그 순간 폐 쪽이 저릿하면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목구멍은 너무도 아프고 간지러웠고 어떻게든 콜록거리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리를 조금이라도 내면 그들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때리려고 할까 봐 말이다.이를 꽉 깨물며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올라오려는 기침을 꾹 참고는 피를 삼켜버렸다. 이런 행동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하지만 진통제가 없
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 가슴에서 전해지는 고통이 온몸으로 퍼지며 정신이 아득해졌고 손을 뻗어 배정우의 코트를 잡아보려고 했지만 전부 실패했다.“난 다른 사람을 유혹한 적 없어. 정우야, 난 처음부터 끝까지 너만 바라봤다고...”“임슬기, 네가 바람피운 남자는 내가 이미 잡았어. 잡아서 두 손을 뭉개버렸지. 그러더니 술술 얘기하더라고.”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손을 들어 가슴에 올린 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기를 반복하자 이내 쿨럭대며 피를 토하게 되
“연다인!”“슬기야, 화내지 마.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도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그날 난 정우한테 가던 길도 아니었어. 그냥 그런 판을 짠 거야. 네가 감방에 들어갈 수 있게 말이야. 설령 이곳에서 나온다고 해도 어차피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연다인은 몸을 굽히며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은 후 기괴하게 웃었다.“하하하, 어때? 막 고통스럽고 그래?”“연다인!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임슬기를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껏 반항했다. 곧이어 고개를 숙이더니 연다인의 팔을 깨물었다.“아악! 임슬기. 너 개띠야?”연다인은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
진승윤도 사실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임슬기를 안심시키듯 말했다.“일단 결과 기다려 보자.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까. 다만...”임슬기가 눈을 부릅떴다.“다만 뭐?”“너도 네 몸 상태 알잖아. 그렇게 무리하다가 현정 씨가 깨어나면 더 미안해할걸?”그 말에 임슬기는 고개를 떨구며 낮게 말했다.“나도 알아. 근데 현정이가 이렇게까지 당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어?”다만 연다인 뒤에는 배정우가 있어 혼자서 상대하기엔 벽이 너무 높았다.임슬기는 문득 진승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승윤아, 너 대성 그룹에서 몇 년이나 법무 맡
“배정우, 너 지금 연다인 감싸는 거야?”임슬기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이 사람이 연다인 편 드는 게 하루이틀인가. 뭘 또 묻고 있나 싶었다.연다인은 배정우 품에 안기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정우야, 나 정말 억울해. 어젯밤 내내 너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그 말에 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근데 내가 언제 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어젯밤이라고 바로 짚어? 내가 무슨 일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나 보네? 너도 연기하느라 참 힘들겠다.”연다인은 순
도착하자마자 임슬기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내 육문주에게 전화를 걸었다.“문주 씨, 혹시 실검 처리 어떻게 됐어요? 혹시 모르니까 김현정 깼을 때 못 보게 조치 좀 부탁해요.”기사를 막기 위한 정리를 끝낸 후, 임슬기는 연다인의 아파트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연다인이 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팔짱을 낀 임슬기가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굴엔 뻔히 보이는 경멸이 가득했다.“임슬기, 네가 여긴 왜 왔어?”“내가 왜 왔는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연다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글쎄, 모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