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은 그런 임슬기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언니, 저도 같이 가요.”임슬기는 원래 바로 찾아가려고 했지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게다가 서우마을까지 운전해서 2시간 정도 걸릴 것이었다.고민하고 있던 때 김현정이 입을 열었다.“언니,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가요. 만약 도망치려고 했다면 이미 도망쳤을 거예요. 내일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임슬기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전 이만 집으로 돌아갈게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임슬기는 고민
“알았어.”배정우의 목소리는 너무도 딱딱해 연다인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응, 그럼 정우야 밥 잘 챙겨 먹고 쉬엄쉬엄해. 난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 전 자신이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응, 그래. 방금 내가 너무 차가웠지? 미안해. 얼른 쉬어.”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비록 어투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연다인의 그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눈치채고 있었다.예전의 배정우는 임슬기의 애교를 아주 좋아했다. 임슬기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귀여웠으니까. 마치
임슬기는 초음파 사진과 검진 결과지를 들고 비틀대며 나왔다. 머릿속엔 온통 의사가 한 말뿐이었다.‘신장이 하나라고... 정말로 하나라고...'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김현정은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로 달려가 부축했다.“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기 상태가 안 좋대요? 아니면 암이 더 악화되었대요?”임슬기는 여전히 넋을 잃은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에요.”“언니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혹시 다른 곳에 문제라도 생긴 거
말을 하던 아주머니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두 사람 앞에 바싹 다가가 말했다.“혹시 모르죠. 그 돈도 갑자기 생긴 거라 어디서 훔쳤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도망친 걸 거예요.”임슬기와 김현정은 시선을 주고받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를 보았다.“아주머니, 혹시 황동혁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아주머니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중얼거렸다.“어느 요양 병원이랬나... 급하게 보내기에 ‘산'이라는 글자만 하나 얼핏 들은 것 같네요. 다른 건 듣지 못했어요. 저도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황동혁이 누군가 통화하는
김현정의 차는 일정한 속도를 지키며 달렸고 두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어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그 순간 마이바흐 한 대가 그들의 차를 초월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길을 막아버렸고 놀란 김현정은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다.“언니, 괜찮아요?”“괜찮아요.”임슬기를 고개를 들자 잔뜩 화가 난 배정우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음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비록 패기 있게 그의 전화를 전부 거부했지만 막상 그가 눈앞에 나타나니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꼈다.배정우는 창문을 두드리며 차갑게 말했다.
“정우야, 대체 왜 내 말은 믿어주지 않는 거야? 왜? 운전석에 있던 건 분명 여자였잖아. 그런데 왜 네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거야?”배정우는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믿지 않았다. 여하간에 그녀가 밤을 보낸 곳이 진승윤의 아파트였으니 말이다. 그는 진승윤과 그 아파트에서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절대.“임슬기, 넌 절대 내 곁에서 떠날 수 없어.”말을 마친 배정우는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그녀의 입술에 거칠게 키스했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목에 닿으며 입을 벌려 세게 물어 흔적
방으로 올라온 배정우는 임슬기를 침대로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오늘 밤은 내가 옆에 있을 거야.”그 말에 임슬기는 눈을 뜨고 배정우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너무도 가소롭게 느껴져 바로 몸을 돌려 그에게 등을 보였다.‘옆에 있겠다고?'‘하하, 무슨 선심을 쓰듯 말하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그렇게 사랑하는 연다인 옆에 있어 줘도 되는 데 말이야.'“지금 뭐 하자는 거지? 네가 외로운 거 버터지 못한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내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하잖아.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아랫입술을
배정우는 원래 화를 낼 생각이었지만 바닥 가득 쏟아진 죽과 피가 나는 연다인의 손가락을 보니 다시 참을 수밖에 없었다.“일단 일어나. 사람 불러서 치워달라고 할 테니까.”“하지만 죽은...”“신경 쓰지 마. 가서 개인 간병인한테 상처 치료해달라 하고 방에 들어가서 쉬어. 남은 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정우야, 그럼 슬기는? 슬기 옆에 있어 주려고?”배정우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연다인은 계속 아랑곳하지 않고 질척거렸기 때문이다.“넌 그냥 방으로 돌아가면 된다고.”배정우의 어투가 다소 거칠어지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