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이를 빠득 갈자 거의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죽이고 아이까지 죽인 살인범을 죽여 복수하고 싶었다.결국 연다인에게 달려들며 멱살을 잡고는 난간으로 밀쳤다.“연다인,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내 가족을 전부 죽이는 거냐고!”연다인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픽 웃었다.“그래. 전부 다 죽일 거야! 임슬기, 넌 대체 뭔데 지금도 여전히 고고한 명인시의 장미이고 난 하층민인 거지? 왜! 너와 나는 같은 위치에 서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너만 칭찬하
임슬기는 비틀대며 뒷걸음질을 쳤다.“넌 2년 전부터 이미 변했어. 설령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어도, 네가 증오하는 대상과 믿어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도 알게 되어도 넌 절대 뒤돌아보지도 않을 거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넌 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연다인이, 내 가족을 전부 죽인 연다인이 넌 내 앞에서 천사라고 말하더라.”임슬기는 폐가 너무도 아팠다. 발작을 일으키며 피가 울컥 올라왔지만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억지로 삼켜버렸다.“배정우, 네가 그랬었지. 연다인이 너한테 신장을 하나 기증했었다고. 그
고개를 든 임슬기는 처량한 눈빛으로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배정우를 보며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이번엔 또 어떻게 날 괴롭히려고?”배정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또 자신의 동정을 사려고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번엔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임슬기의 손목을 확 잡아당긴 그는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불에 댔다.“임슬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 너야. 네가 가진 모든 걸 망가뜨려도 후회하지 마!”임슬기의 몸이 흠칫 떨리며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뭐 하려고? 종현이는 건들지 마!”“
임슬기는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남자를 보았다. 배정우는 예전에 그녀에게 평생 그녀만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역시나 동화는 동화일 뿐 현실은 아니었다. 결국은 그녀는 그에게 천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차가 멈추고 배정우는 문을 열더니 그녀를 끌어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익숙한 정원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임씨 가문 본가는 예전에 아주 화려했지만 지금은 폐가와 다를 바 없었다. 대문에는 여전히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바닥에 휙 던졌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기자 두
임슬기는 아주 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부모님과 오정태, 그리고 임종현도 나타났다. 그들은 그녀의 주위에 몰려들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배정우는 그녀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귀여워.”꿈속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입가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더니 그제야 자신의 두 볼이 흠뻑 젖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분명 행복한 순간들이잖아. 근데 왜 울고 있는 거지?'이때 흰색 치마를 입은 연다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김현정은 얼른 휴지를 뽑아 임슬기의 손바닥을 닦아주고는 약을 꺼내 임슬기에게 건넸다.“언니, 얼른 약 먹어요.”약을 먹고 난 후 임슬기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더는 본가에서 지냈던 시간을 떠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현정도 오래 머무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녀가 죽을 먹는 모습을 확인하곤 얼른 물건들을 챙겨 나가려 했다. 김현정이 떠난 지 2분도 되지 않아 배정우가 들어왔다. 그는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느껴지는 온기에 미간을 구긴 채 흉흉한 눈빛으로 임슬기를 노려보았다.“방금 누가 왔었지?”“아무도 안 왔었어.”“임슬기
마이바흐 뒷좌석에 앉은 배정우는 창밖으로 번뜩이는 번개에 순간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권 비서, 17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권민은 멈칫하더니 룸미러로 배정우를 힐끗 보았다.“대표님, 정말로 기억 안 나시는 겁니까?”“중요한 일인가?”“네. 17년 전에 사모님이 비가 내리던 날에 납치당했었습니다. 납치범들이 사모님을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 가둬버렸다고 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가슴이 아팠다. 부단히 임슬기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신경 쓰이고 걱정되었다. 이때 창밖으로 비가
진승윤은 울고 있는 김현정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았던지라 놀라고 말았고 서둘러 물었다.“거기 어디예요?”김현정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너무도 오진 곳이었던지라 특정 지어 말할 것이 없었다.“저... 저도 모르겠어요. 일단 위치 공유해드릴게요.”“그래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진승윤은 바로 실력 좋은 자물쇠 기사님을 불러 함께 김현정이 알려준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던지라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던 그들은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승윤은 속도를 늦추지 않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