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권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배정우였다.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모님, 걱정 마세요. 우선 전화부터 받겠습니다.”“네. 볼일 보세요. 조심하세요.”임슬기는 김현정을 방으로 데려갔고 권민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배정우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재로 와.”서재에 들어선 권민은 배정우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내가 없던 사이에 또 사모님과 대표님이 다투셨던 건가?’“임슬기가 나를 만나기 전에 어떤 남자들을 만났는지 전부 조사
“아가씨?”임슬기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주섬주섬 꺼냈던 주얼리를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팔지 않겠습니다.”전당포 주인은 그녀가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해 팔지 않으려는 줄 알고 당황하며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시면 다시 협상할 수 있습니다. 60억까지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이 정도면 충분히 높은 가격이었기에 전당포 주인은 자신 있게 임슬기의 반응을 기다렸다.그러나 임슬기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은 채 주얼리 상자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얼마를 준다 해도 팔 수 없어
“안 돼요. 그 반지 내놔요.”“그럼 두 번째 선택을 하겠다는 거군요.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면 반지를 돌려줄 수도 있어요”임슬기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아 움켜쥐며 그들을 노려보았다.“다가오지 마요.”하지만 술에 취한 남자들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아가씨, 아무리 소리쳐도 여기선 아무도 널 도와줄 사람 없어요.”“반지 내놔요.”“그럼 반지를 선택한 거예요.”첫 번째 남자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순식간에 임슬기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찢으려 했다.“움직이지 마
임슬기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이었다.김현정은 죽을 준비를 하며 방에 들어가자 임슬기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공포에 질린 얼굴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돌려줘요.”김현정은 죽을 옆에 놓고 말했다.“슬기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제 계속 돌려달라고 반복해서 말했어요."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내가 또 뭘 말했어요?”“그냥 반지를 계속 돌려달라고 반복했어요. 그 외엔 아무 말도 안 했고 내가 물어봤을 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냥 계속 울어서 나 진짜로 놀랐어요.”“미안해
몇몇 꽃들이 이미 시들어가는 기미를 보였고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 슬프게 했다.‘한때는 얼마나 화려했던 정원이었는데 이제는...’“미안해. 너희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그 말이 끝나자 현관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고, 임슬기는 김현정이 돌아온 줄 알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지금 돌아온 거예요?”“임슬기, 너 정말 여기 있었구나.”임슬기는 손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불청객이 온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여기는 내 집이야. 내가 여기 없으면 어디 있어야 할까?”연다인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
“정우, 나 정말로 슬기를 밀지 않았어. 나를 믿어줘...”연다인은 배정우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가 임슬기를 보러 가는 길을 막았다.“다인아, 일어나.”“아니. 정우가 날 믿지 않으면 나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억울한 기분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 지금 슬기가 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다는데 내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고...”연다인은 점점 더 억울하게 말하며 마치 자신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정우, 내가 돌아왔을 때 슬기가 나를 고용해 사람을 납치했다고 했어. 난 너무 놀랐어. 내가 그런 일을
그는 작은 골목에서 임슬기가 반지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보호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배정우는 임슬기를 품에 안고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임슬기,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임슬기를 신속히 응급실로 옮겼고 응급실의 불이 꺼질 때까지 계속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그 아이가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만약 그 아이가 정말로 사라진다면 아쉬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의사 선생님, 어떠세요?”“부인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십니다. 계속 약을
“연다인, 너.”“네 동생은 지금 내 말을 따르고 있어. 내가 너의 동생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게 하거나 찍지 말아야 할 사진을 찍게 할까? 아니면 동생의 손가락 하나와 귀 하나를 없애는 게 더 나을까? 선택은 네게 맡길게.”연다인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슬기는 두려움에 떨며 입술을 꼭 깨물고 말했다.“내 동생에게 손대지 마.”“그럼 네가 내 말을 잘 들어야 해.”그때 김현정이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연다인이 임슬기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녀를 때리려 했지만 연다인은 민첩하게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