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또다시 배정우와 마주칠까 봐 조심스러웠다.“전화로 말해.”“슬기야, 나한테 화났어?”전화기 너머에서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송재현이 말을 이어갔다.“네가 안 오면 내가 손목을 그어서라도 증명할게.”“제발 그러지 마!”“슬기야, 나 킹스에서 기다릴게.”송재현은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임슬기가 재빨리 다시 걸었지만, 신호음만 울릴 뿐이었다.임슬기는 불안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비록 송재현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란 사
집착이 너무 강했기에 그를 놓을 수 없었고 원망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다.그렇다고 해도 임슬기는 다른 사람한테 기회를 주고 싶지는 않았고 여전히 그녀는 배정우가 자신을 오해하는 것이 싫었다.임슬기는 몸을 일으키며 차가운 눈빛으로 송재현을 응시하고 말했다.“송재현, 우리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커왔잖아. 난 항상 너를 내 오빠처럼 생각했어.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삼가. 배정우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오해?”송재현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오해해서 내 팔까지 부러뜨리고 날 협박까지 했어. 하지만 널 위해 조금이라
깜짝 놀란 임슬기는 온몸에 힘이 빠져 배정우 품에 기대어 있었다. 진승윤이 송재현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배정우를 올려다보았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송재현은 어리둥절해하며 본능적으로 몸을 버둥거렸다.“놔! 너희들 누구야?”진승윤이 입을 열기 전에 배정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송재현 씨, 나 기억 안 나요? 저희 만난 적 있잖아요.”배정우는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임슬기를 찾아온 송재현의 대담함에 어이가 없었다.송재현은 몸이 굳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배정우를
임슬기는 배정우가 그녀를 오해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오해가 계속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송재현에게 왜 이러는 건지 진실을 묻고 싶었다.임슬기는 끌려가는 송재현을 향해 외쳤다.“송재현!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 손모가지가 날아갈 거야!”송재현은 멈칫하더니 하고 싶은 말을 다시 삼키고 입을 열었다.“임슬기, 날 모함할 생각 하지 마!”송재현의 말에 임슬기는 가슴이 얼어붙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듯했다.송재현이 끌려 나간 뒤 배정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호텔을 나섰다.“배정우, 송재현은 거짓말하고 있어!”“임슬기
차에 오르자, 김현정이 임슬기에게 샌드위치를 건네며 말했다.“슬기 언니, 좀 먹어요. 약은 먹었어요?”“네, 먹었어요. 고마워요.”김현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몇 번을 말해요. 나한테 감사하다는 말 같은 거 하지 말라니까요.”임슬기는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진 변호사가 다른 말은 안 했어요?”“별말 안 했어요. 그냥 오정태 사건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진 변호사님이 있는 한 언니는 감옥에 갈 일 없다고 그랬어요.”“진 변호사님 말은 믿을 만하죠.”진승윤은 명인 시 최고의 변호사였고 그의
그 시각 대성 그룹.배정우는 휴대전화를 책상에 내던지고 무섭도록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확실해? 임슬기가 경찰서에 갔다고?”권민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방금 경찰서에서 나왔대요.”배정우는 냉소를 지었다.‘아침 일찍부터 송재현을 만나러 가? 특별히도 사랑하네. 17년의 사랑이 고작 이정도 밖에 안되는 거였나? 네가 날 쓰레기 취급을 해도 난 여전히 널 아꼈는데?’분노에 찬 배정우는 책상 위의 물건을 모두 쓸어버리며 말했다.“경찰서에 가서 증언하고 송재현을 풀어줘.”“그런데 대표님...”권민은 입술을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에 임슬기의 마음은 또다시 찢어지는 것 같았다.산산조각이 난 심장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것 같았지만, 임슬기는 여전히 괜찮은 척, 강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배정우, 송재현에 관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배정우가 비웃으며 말을 끊었다.“아직도 그 쓰레기를 마음에 두고 있었어? 임슬기, 너 의외로 순정파였구나?”배정우의 말에 임슬기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얼어붙었다.‘무슨 말 하는 거지?’“배정우,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나랑 송재현은...”“나가!”“배정우.”배정우의 칠흑
배정우의 사무실에서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임슬기는 비상계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그녀는 무기력하게 벽에 기대어 울다가 점점 벽을 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임슬기는 자신의 마음은 이제 강해졌고 이제는 아프지 않을 거라고 믿었었다.하지만 연다인과 배정우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칼에 베인 듯 아파져 왔다.임슬기는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기침이 심하게 나 힘들었지만,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배정우는 단 한 번도 임슬기의 설명을 듣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그녀를 믿어준 적이 없었다.그런 배정우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