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그 칼은 사실 임슬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찌르려 했던 것이다.빚에 쫓겨 더는 물러설 곳도 없던 그는 누군가 동생을 살려줄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판을 벌여서라도 절대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건 임슬기가 그걸 간파했고 심지어 자신의 몸으로 그를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었다.남자는 병상에 누워 있는 김현정을 바라보며 한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만약 누군가 임슬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육문주는 막 귀국한 터라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진 못했다. 하지만 임슬기의 말투와 눈빛에서 어쩐지 깊은 쓸쓸함이 느껴졌다.“형수님, 사실 정우 형... 아직도 형수님을 신경 쓰고 있어요.”그 말에 임슬기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요, 그 사람의 신경 쓰는 방식은 아마 웬만한 사람은 버티지 못할걸요.”감금, 모욕, 배신이 신경 쓰는 거라면 말이다.“형수님...”육문주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임슬기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아까 그 남자 경찰 쪽에 연락해서 그냥 풀어달라고 해 주세요. 현정이도 심하게 다친 건 아
‘얼마나 기억하고 있냐고?’배정우는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었다. 떠오르는 건 임슬기의 배신, 차가움 같은 상처뿐이었고 좋은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했다.그런데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여전히 임슬기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게 증오든, 사랑이든.예전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아직도 임슬기를 사랑하고 있다는걸. 다만 미움까지 놓기엔 아직 어렵다는 것도.갑자기 배정우가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으윽!”권민은 그 소리에 놀라 서류를 던지고 황급히 달려갔다.
밤새 울었던 탓에, 아침에 눈을 뜨자 임슬기의 눈은 또 퉁퉁 부어 있었다.부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까지 하고 나서야 간신히 외출할 얼굴이 되었다.몸단장을 마치고 김현정을 보러 가려던 참에 문을 나서자 문 앞에 놓인 영양제들과 보온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임슬기는 영양제를 방 안에 들여놓고 보온 가방을 열어보았다.안에는 보온 도시락 두 개가 들어 있었고 흔들어보니 안에 국물이 담긴 듯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어디에도 쪽지는 없었고 누가 두고 간 건지도 알 수 없었다.찜찜한 기분에 임슬기는 잠시 눈
김현정을 제대로 쉬게 하려고 임슬기는 식사를 마친 후 일부러 그녀에게 더 자라고 말했다. 처음엔 김현정이 완강히 거절했지만 결국 임슬기를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다시 눕게 되었다.병실로 돌아가던 길, 임슬기는 계단 입구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차희라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내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 알잖아. 꼭 살아서... 그 애를 만나야 해.”“사모님, 벌써 스무 해가 넘었잖아요.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게... 김서아 씨도 계시고, 충분하지 않나요?”하지만 차희라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야, 달라. 그 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서우가 대뜸 다가와 임슬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임슬기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화면이 켜지면서 진승윤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떴고 이어 전화기 너머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슬기야? 무슨 일이야?”그 목소리에 기름을 부은 듯 김서우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더니 임슬기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이 더러운 년,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승윤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그럼 이건 뭐야! 다인이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넌 그
그 숨결이 너무 익숙했다. 배정우였다. 임슬기는 눈을 뜨려 했지만 시야는 뿌옇고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배정우는 쓰러진 임슬기를 품에 안은 채 눈빛에 살기를 띠며 말했다.“죽고 싶어?”김서우는 그 기세에 질려 다리가 풀리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배정우 씨, 그게 아니에요. 아까 보신 그건... 이 여자가 먼저...”하지만 배정우는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꺼져.”그 말에 김서우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휘청이며 병실을 빠져나갔다.배정우는 조심스레
차희라는 이 모든 걸 전혀 몰랐던 듯 임슬기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그게 우리 서우가 한 거라고요?”임슬기는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끄덕였다.“네.”“말도 안 돼... 그럴 리가...”차희라는 충격을 받은 듯 입술까지 떨고 있었다.“김서우 씨가 말로만 저를 험담했으면 그냥 넘겼을 거예요. 그런데 저를 진심으로 미워하더라고요.”임슬기는 알고 있었다. 김서우의 적의에는 진승윤이 한몫하고 있다는걸.하지만 어제 그녀가 목을 조르던 순간 언급했던 건 그 남자 하나만이 아니었
“두 분이신가요?”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임슬기 옆에 앉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우리랑 같이 한잔할래요?”그 말이 끝나자 다른 남자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임슬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김현정이 먼저 나섰다.“좋죠. 근데 저 술 좀 센데 괜찮으시겠어요?”“괜찮습니다. 두 분 술은 제가 쏘겠습니다. 마시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세요.”김현정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좋아요, 위스키로 열 잔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열 잔의 위스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게임 하나 하죠. 진
임슬기는 근처 공원에서 김현정을 찾았다.차가운 밤바람 속 한 가냘픈 그림자가 그네에 앉아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예전에 날씨가 좋을 때면 자주 함께 산책하던 곳이었다.가끔은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별을 보며 수다도 떨곤 했었다. 어느새 이곳은 두 사람만의 비밀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임슬기는 두 개의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김현정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오랜만에 오래 걸어서인지 금세 기운이 빠진 임슬기는 인근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뒤 김현정을 불렀다.“현정아.”김현정은 임슬기를 보자마자 일어나 그녀의
육문주는 문을 열어젖히며 다시 한번 말했다.“현정 씨, 그 아이 우리 아이에요.”김현정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말도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그날 밤 육문주는 분명 다른 여자와 있었는데, 어떻게 이 아이가 그의 아이일 수 있단 말인가?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임슬기 역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육문주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임슬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근데
‘다시 대학교를 다닌다고?’강재호는 그 말에 온몸이 떨렸다. 눈가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그의 삶은 이미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미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부 같은 건 진작에 잊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임슬기에게는 늘 고마웠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도 그녀였는데, 이제는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하다니, 이건 그에게 너무 큰 행운이었다.하지만...그는 목이 메어 침을 삼키고는 어렵게 말했다.“아니에요, 누나. 나한테 돈 낭비할 필요 없어요. 내 인생은 어차피...”“재호야, 네
금원 아파트.임슬기는 침대 위에서 잠든 김현정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옆에 서 있던 강재호에게 말했다.“오늘 고마웠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강재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아니에요, 임슬기 씨. 나한테 너무 그렇게까지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그는 잠시 임슬기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오늘 그냥 내가 여기 있을까요? 임슬기 씨도 다리 불편하고, 현정 씨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혼자 두긴 불안한데요.”임슬기는 순간 민망해졌다.“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재호 씨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김현정은 밥 한술 먹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런 김현정이 걱정되었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정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녀와 함께할 작정이었다.임슬기는 가끔 생각했다.김현정은 그동안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는 밝고 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토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건지. 밝은 얼굴로 주
다음 날 오전.김현정이 임슬기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슬기 언니,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임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등갈비찜이랑 생선찜, 그리고 현정이 네가 제일 잘하는 캐러멜 푸딩 어때?”말을 마치자마자 김현정의 얼굴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김현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고 손을 저은 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임슬기는 김현정이 뭘 잘못 먹은 줄 알고 당황해했다.“현정아, 배가 아파? 얼른 의사 부를게.”그녀가 나가
“나 연다인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배정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사랑에 지쳐 무너진 사람처럼.그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임슬기는 배정우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술 마시고는 화해하자고 찾아오고, 정신 차리면 연다인 침대에 누워서 날 죽이고 싶다 그러고... 배정우,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날 놔줘.”“왜 날 안 믿는 건데?”배정우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고 어두운 눈빛은 끝을 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