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탓일까. 임슬기의 폐가 갑자기 조이듯 당기더니 목구멍으로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놀란 그녀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간신히 기침을 참았다. 터져 나오려던 피는 꾹 삼켜냈다.그 모습을 본 임종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왜 그래요?”임종현은 어제 묘지에서도 그녀가 피를 토하는 걸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임슬기는 대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입을 가린 채 말했다.“괜찮아. 그냥 기침이 좀 나서.”“어제 피 토하는 거 다 봤어요.”그 말에 그녀의 어깨
“그래.”배정우는 자연스럽게 임슬기 맞은편에 앉으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도 한 그릇 끓여줘.”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 예상 밖의 부드러운 반응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다. 다만...그녀는 라면을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괜찮다면 이거 먹어. 나 아직 안 건드렸어.”“응, 괜찮아.”배정우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천천히 씹어 삼킨 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여전한 맛이네. 진짜 맛있어.”그 말
“그럼 아니야?”임슬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내가 혼수상태일 때 연다인을 몰래 도시 밖으로 빼돌려서 숨겼잖아. 내가 복수할까 봐, 그 여자 죽일까 봐 무서웠던 거 아냐?”배정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난 그런 짓 안 했어.”“안 했다고? 하, 누가 그 말을 믿겠어.”임슬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직접 말했잖아. 연다인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배정우가 한 짓이었다. 연다인을 저
두 사람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신을 먼저 차린 건 임슬기였다. 그녀는 김현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현정아, 너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이런 힘쓰는 짓 하면 어떡해?”“슬기 언니, 나 진짜 괜찮아요.”김현정의 말투는 금세 부드러워졌다.“근데 언니는 괜찮아요? 그 자식이 또 무슨 짓 한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세한 건 안에서 이야기하자. 우선 네 손 좀 보자.”“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좀 탈골됐던 거 의사 선생님이 맞춰줬어요. 봐봐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약 한 시간쯤 지나자 한 배달 기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별장 대문 앞에 멈춰 섰다.배정우는 차 안에서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오토바이에서 내린 기사가 배달 상자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꺼내 철문 앞으로 다가가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바라봤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배달 기사는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배정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임슬기가 제대로 한 상 차릴 생각인 것 같았다.그때 휴대폰 너머에서 권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내일 지방에 회의 있는 거 잊지 마세요.”“응.”
“왜 네가 여기 있어?”임슬기는 잠시 멍해졌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밀치며 소리쳤다.“이거 놔.”배정우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놓아주고 조리대 앞으로 걸어갔다.“뭐 도와줄 거 있어?”그 말이 끝나자 그는 상의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으로 장바구니를 열어 채소를 고르기 시작했다.“새우 내가 씻을게. 다른 것도 씻을 거 있어?”그 모습에 임슬기는 말문이 막혔다.이런 배정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딱 2년 전 두 사람이 함께했던 평온했던 어느 날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그들은 종종 함께 요리를 했고
임슬기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밥부터 하자. 좀 있으면 종현이 배고플 거야.”하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더 꼭 껴안더니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그럼 콩나물국 해줄 거야?”“너 전에 싫어했잖아.”“이젠 먹어.”임슬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콩나물국에 무슨 집착이 있는 건지, 평소에 먹지도 않던 음식을 굳이 해달라니.하지만 이런 걸로 또 얽히기 싫어서 마침 재료도 있는 김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해줄게.”배정우는 그녀를 놓아주고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도대체 왜 갑자기 입맛
이번 식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종현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오늘 임종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임슬기는 그가 문을 닫는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배정우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내가 설거지할게.”임슬기는 조금 놀랐지만 굳이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종현아, 누나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잠시만요.”몇 분 후, 임종현이 문을 열었다.“무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