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눈물을 닦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불을 바꾸려던 찰나, 깨끗한 이불이 깔린 걸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곳이 먼지 하나 없이 청소되어 있었다.‘누가 청소한 거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먼지가 가득했는데?’책장 옆으로 가던 중 그녀는 갑자기 일기장이 사라진 걸 알아챘다.배정우가 가져간 것 같아 속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봤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일기장에 있던 사진은 이미 임슬기가 가져갔으니, 배정우는 그녀가 쓴 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챌 리도 없었다. 설령 알아챈다 해도, 모두 오래
아침 식사 시간, 임슬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정우를 몇 번 흘깃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못 들은 건가?’임슬기는 배정우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식사 후, 배정우는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새 옷이야. 갈아입어.”임슬기는 거절하려 했지만, 임종현을 학교에 데려다주려면 옷을 바꿔입어야겠다는 생각에 받아들였다.“고마워요.”방으로 들어가 봉투를 열어보자, 검은색 롱드레스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이해할 수 없는 배정우의 행동에 임슬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정우야,
병원.임슬기는 우현식이 있는 병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안녕, 현식아.”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우현식은 그녀를 보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왜 왔어요?”“네 부상 상태를 보러 왔어.”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옆에 놓고 그의 다리 쪽으로 다가가 석고를 살짝 찔러보았다.“아파?”우현식의 어머니는 없었고 우현식은 임슬기가 무서운 듯 다리를 움직이며 대답했다.“아파요.”“종현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우현식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임슬기는 임종현이 우현식을 다치게 할 정도의 힘이 있
육문주는 임슬기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말했다.“슬기 씨, 성격이 너무 착한 것 같아요.”“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 따질 필요 없어요.”약을 다 바르고 나서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만약 임씨 가문이 힘이 없다고 생각되면 내 이름을 걸어봐요. 누가 감히 무시하겠어요?”임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주 씨, 고마워요.”그녀는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상처를 가렸다.“나는 우현식이 정말 다쳤는지 알고 싶어요. 만약 실제로 다쳤다면 종현이도 잘못이 있는 거지만...”“만약 다친 게 거짓이라면
“슬기야, 다인이도 잘못했지만 그래도 네 친구잖아. 너희는 한때 자매처럼 지냈는데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죽이려고까지 해야 해?”“슬기야,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다인이는 지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10kg 넘게 빠졌어. 네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해.”“그 아이가 자살 못하도록 나와 다인이 아빠가 24시간 지켜보고 있어. 슬기야...”이 울음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모여들며 임슬기를 둘러쌌다.“다인이 어머니, 일어나 주세요! 다인이가 내 부모님을 죽이고 내 남편을 빼앗고 내 아이까지 해쳤을 때 그와 나는
임슬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김현정이 화가 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슬기 언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임종현 그 녀석이 또 문제를 일으켰어요? 아니면 정우 그 개자식인가요?”“그들과는 상관없어.”“그럼 누군데요? 말해봐요. 내가 가서 혼내줄게요.”김현정이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을 보며 임슬기는 살짝 웃었다.“현정아, 그런 성격으로 언제 결혼하겠니?”“난 결혼 안 할 거예요! 평생 언니 곁에 있을 거라고요!”말을 마치자 김현정은 다시 화를 내며 물었다.“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대체 누군데요?”“다인이네 가족이지?”
임슬기는 침실로 들어가서야 전화를 받았다.“슬기야, 실검 보았어? 기분이 어때? 말해두는데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을 거야.”“종현이는 말이지, 훗... 슬기야, 네가 그렇게 아끼는 아이라면 반드시 망가뜨려 주겠어!”연다인이 사악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게다가 너의 눈앞에서 그가 망가지는 걸 지켜보게 할 거야!”“감히!”임슬기는 이를 악물었다.“연다인, 네 계획은 이뤄지지 않을 거야. 종현이가 널 그렇게 믿었는데 그런 식으로 대해? 양심도 없어?”“그 아이는 내게 있어 그저 도구일 뿐이야. 너를 괴
“배정우 씨, 임슬기 씨가 배정우 씨 지인과의 불륜 의혹에 휘말린 데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두 분은 지금 어떤 관계로 봐야 합니까?”“...”기자들이 다시 두 사람을 에워싸고 듣기만 해도 피곤한 질문들을 쏟아냈다.배정우는 덜덜 떨고 있는 임슬기를 품에 끌어안고 주위를 차갑게 훑었다.“누가 당신들한테 그런 질문을 하라고 시킨 겁니까?”그 말에 기자들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그저 돈 받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고 누구 하나 진심으로 배정우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임슬기를 조수석에 태운 뒤, 배정우는 조용히 운전석에 올
“두 분이신가요?”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임슬기 옆에 앉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우리랑 같이 한잔할래요?”그 말이 끝나자 다른 남자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임슬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김현정이 먼저 나섰다.“좋죠. 근데 저 술 좀 센데 괜찮으시겠어요?”“괜찮습니다. 두 분 술은 제가 쏘겠습니다. 마시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세요.”김현정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좋아요, 위스키로 열 잔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열 잔의 위스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게임 하나 하죠. 진
임슬기는 근처 공원에서 김현정을 찾았다.차가운 밤바람 속 한 가냘픈 그림자가 그네에 앉아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예전에 날씨가 좋을 때면 자주 함께 산책하던 곳이었다.가끔은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별을 보며 수다도 떨곤 했었다. 어느새 이곳은 두 사람만의 비밀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임슬기는 두 개의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김현정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오랜만에 오래 걸어서인지 금세 기운이 빠진 임슬기는 인근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뒤 김현정을 불렀다.“현정아.”김현정은 임슬기를 보자마자 일어나 그녀의
육문주는 문을 열어젖히며 다시 한번 말했다.“현정 씨, 그 아이 우리 아이에요.”김현정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말도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그날 밤 육문주는 분명 다른 여자와 있었는데, 어떻게 이 아이가 그의 아이일 수 있단 말인가?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임슬기 역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육문주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임슬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근데
‘다시 대학교를 다닌다고?’강재호는 그 말에 온몸이 떨렸다. 눈가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그의 삶은 이미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미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부 같은 건 진작에 잊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임슬기에게는 늘 고마웠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도 그녀였는데, 이제는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하다니, 이건 그에게 너무 큰 행운이었다.하지만...그는 목이 메어 침을 삼키고는 어렵게 말했다.“아니에요, 누나. 나한테 돈 낭비할 필요 없어요. 내 인생은 어차피...”“재호야, 네
금원 아파트.임슬기는 침대 위에서 잠든 김현정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옆에 서 있던 강재호에게 말했다.“오늘 고마웠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강재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아니에요, 임슬기 씨. 나한테 너무 그렇게까지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그는 잠시 임슬기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오늘 그냥 내가 여기 있을까요? 임슬기 씨도 다리 불편하고, 현정 씨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혼자 두긴 불안한데요.”임슬기는 순간 민망해졌다.“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재호 씨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김현정은 밥 한술 먹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런 김현정이 걱정되었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정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녀와 함께할 작정이었다.임슬기는 가끔 생각했다.김현정은 그동안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는 밝고 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토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건지. 밝은 얼굴로 주
다음 날 오전.김현정이 임슬기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슬기 언니,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임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등갈비찜이랑 생선찜, 그리고 현정이 네가 제일 잘하는 캐러멜 푸딩 어때?”말을 마치자마자 김현정의 얼굴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김현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고 손을 저은 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임슬기는 김현정이 뭘 잘못 먹은 줄 알고 당황해했다.“현정아, 배가 아파? 얼른 의사 부를게.”그녀가 나가
“나 연다인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배정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사랑에 지쳐 무너진 사람처럼.그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임슬기는 배정우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술 마시고는 화해하자고 찾아오고, 정신 차리면 연다인 침대에 누워서 날 죽이고 싶다 그러고... 배정우,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날 놔줘.”“왜 날 안 믿는 건데?”배정우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고 어두운 눈빛은 끝을 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