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9 지하 주차장의 팬미팅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최고급 프라이빗 라운지 ‘HERA’의 지하 주차장. 그 곳은 보통의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주차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백화점 명품관을 방불케 하는 환하고 고급스러운 조명, 문콕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는 널찍한 주차 공간, 그리고 쉴 새 없이 쾌적한 공기를 뿜어내는 최고급 환풍 시스템 덕에 지하 특유의 답답함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금요일 밤, VVIP들의 은밀한 욕망이 불타오르는 시간답게, 이 곳 ‘HERA’의 주차장에는 숨만 쉬어도 수억이 넘어가는 하이엔드급 슈퍼카와 세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니, 씨발. 학생 주제에 존나 좋은 차 몰고 다니네."
시은은 주차된 건우의 육중한 벤츠 마이바흐 GLS600을 발끝으로 툭 차는 시늉을 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도 그럴 것이, 뼈 빠지게 회사를 굴리며 돈을 긁어모으는 다른 놈들과 완전히 동급인 차를, 보란 듯이 몰고 다니고 있으니 배가 아플 만도 했다.
지 손으로 돈 한 푼 안 버는 일개 핏덩이 학생 주제에 말이다.
"야, 이 새끼 통장에 꽂히는 주식 배당금만 해도 우리 연봉 가뿐히 넘어. 어련하시겠어."
하윤이 익숙하게 조수석의 글로브박스를 열어, 생리대가 든 파우치를 꺼내 들고는 이내 차 문을 닫았다. 묵직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이 번쩍하며, 삐빅- 하는 잠금음이 주차장을 울렸다.
"아, 맞다.“
다시 엘리베이터로 돌아가는 길.
하윤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밝아졌다.
“나 아까 오면서, 이태현한테 [플루아] 팬싸 티켓 좀 빼달라고 찔러놨어. 네 장.”
하윤의 말에 시은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밝아졌다.
"오~ 나이스! 야, 그거 이번에 완전 랜덤으로 돌려서 엄청 많이 사는 거 아니면 크게 의미가 없대. 채아도 장담 못 한다고 완전 쫄아 있던데?"
"오죽하겠냐? 딱 스무 명만 뽑는다잖아. 이거는 진짜 빽 아니면 절대 당첨 안 돼.“
“그러게. 아이씨, 이태현이 아는 오빠라서 존나 좋다. 큭큭.”
“그치? 큭큭큭. 뭐, 시우랑 태윤이는 없어도... 이럴 때 그 잘난 인맥 한 번 써먹는 거지, 뭐.”
주변에 난다 긴다 하는 대단한 인맥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었던 지인 찬스. 그녀들은 오로지 에테르를 위해 그동안 꽁꽁 숨겨주었던 그 찬스를 꺼내들었다.
늦은 시간, 꽤나 피곤할 법도 할텐데, 두 사람의 얼굴은 아이처럼 맑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에테르는 현생의 지친 피로를 잊게 만드는 완벽한 피로회복제인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아이돌 얘기를 하며 지상의 룸에서 기다리고 있을 발정 난 현생의 수컷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거의 다다라 두 사람이 막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 띵- 하는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막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어!!!"
".......헐!!!“
사람의 인기척에 살짝 고개를 든 순간.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친 두 그룹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 하윤과 시은은 말 그대로 눈알이 튀어나올 듯 놀라 숨을 들이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리려던 상대방들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어, 누나!"
자신의 시야에 확 꽂힌, 익숙하지만 오늘따라 묘하게 달라 보이는, 자신의 팬의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본 시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랬다. 지한의 아버지 회원제 카드로 일찍부터 프라이빗 룸에서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졌던 에테르 멤버 네 명이, 막 자리를 파하고 귀갓길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하필 이 미친 타이밍에, 하윤과 시은이 생리대를 가지러 이 곳, 지하 주차장에 내려왔던 것이고.
“태윤아~~~!”
자신의 최애인 태윤을, 어제 카페에서 보고, 하루 만에 또 다시 마주친 이 엄청난 행운에 시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태윤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뜩 기분 좋은 애교가 서려있었다.
더군다나 룸에서 마신 독한 양주 덕에 피가 뜨겁게 돌고 있었는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비현실적인 사내들의 등장에 이성은 마비되고, 그녀의 텐션은 대기권을 돌파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우와, 누나! 어떻게 여기서 봐?"
입을 틀어막으며 행복해 하는 시은을 본 태윤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HERA'는 철저한 VVIP 멤버십제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에테르 멤버들이야 워낙 잘난 집안 출신이니, 팬들이라면 이곳의 에테르 멤버들의 존재가 이상할 것이 없었겠지만, 늘 객석이나 출근길, 퇴근길에서 보던 이 두 여자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건지, 그들은 내심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 돈 많은 친구들이 있어서 그 모임에 꼽사리 좀 꼈어."
시은이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장난스럽고 해맑게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눈치 빠른 시은이, 태윤의 질문에 대한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고는 유려하게 답했다.
요즘 아이돌 판에서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반말을 섞어 쓰며 친근함을 어필하는 것이 대세. 더구나 이들처럼 얼굴을 확실히 튼 네임드 팬의 경우엔, 마치 동네 친한 동생을 대하듯 자연스러운 바이브가 여지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럴 때 사인 받아야 되는데!!!"
매니저의 험악한 제지도, 덩치 큰 경호원의 밀침도 없이 오롯이 아이돌과 팬만 존재하는 말도 도저히 안 되는 상황. 그야말로 계를 타도 단단히 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필 지금 두 사람의 손에 있는 거라곤 생리대가 든 파우치와 핸드폰이 전부였다.
"야, 차건우 차에 몰래 숨겨 놓은 포카나 앨범 같은 거 없어?"
시은이 하윤을 향해 귓속말로 다급하게 물었다.
"뒤질 일 있어?"
하윤이 입술만 달싹이며 살벌하게 대꾸했다. 만약 포카든 뭐든, 에테르와 관련된 작은 것 하나라도 차에서 나온다면 그날은 차건우의 역린을 건들이며 집요한 몸의 체벌을 고스란히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시우야, 사진… 찍어도 돼?“
하윤이 핸드폰을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찍어도 되는데, 올리는 건 안 돼, 누나."
시우가 제 팬을 각별히 대우하듯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선뜻 허락했다. 에테르 멤버들이 이 네임드 팬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건 단순히 눈에 띄는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사연애로 선을 넘기 쉬운 이 아이돌판에서 공과 사를 철저하게 지킬 줄 아는, 영리하고 개념 있는 팬들이라는 굳건한 신뢰가 바탕이 된 호감이었다. 망할 사생팬들과는 완벽하게 결이 다른 관심이었다.
"당연하지."
하윤은 그저 그들을 향해 무해하게 배시시 웃었다.
고 생각했겠지만... 순간 에테르 멤버들의 시선 속에 꽂힌 그녀의 눈웃음은, 묘하게 농염하고 위험할 정도로 꽤나 자극적이었다.
찰칵, 찰칵-.
지하 주차장에 두 여자의 기분 좋은 핸드폰 카메라의 셔터음이 연속으로 울려 퍼졌다. 단체로 옹기종기 모여 찍기도 하고, 각자의 최애 멤버 옆에도 바짝 붙어 셀카를 남기기도 했다.
사내들의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섞인 알코올의 향, 향긋하다 못해 기분 좋은 꼴림을 주는 두 여자의 체향이 사진을 찍는 내내 얽혀 너나 할 것 없이 두 그룹의 심장을 미친 듯이 자극시키고 있었다.
"숙소 가는 거야? 매니저 오빠 기다려?“
포토타임이 끝나자 소소한 스몰토크가 시작되었다.
"응. 아, 누나들, 다음 달 콘서트 오는 거지?“
시우가 하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팬을 향한 그 사랑스러운 웃음 뒤에는, 이미 이하윤을 잔뜩 벗겨 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하지. 이번에도 올콘 뛴다.“
하윤이 주먹을 쥐며 다시 한 번 해사하게 웃었다.
"어디에 앉아?“
태윤이 시은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3일 다 다르지. 요샌 플로어 잡기가 너무 힘들어서 3일 내내 1층이야. 아, 업자들 싹 다 죽여 버려야 돼!“
시은은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태윤의 질문에 답했다. 다소 난폭한 워딩이 섞여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강태윤에겐 짜릿한 감각을 선사했다.
"어딨는지 무대에서 찾아볼게."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을 걸~“
“아니야, 조금 앞쪽에 있으면 다 보여.”
“진짜? 3열? 4열 정돈데 보이려나?”
“에이, 그 정도는 다 보이지~.”
수만 명의 팬들 속에서 얼굴을 아는 네임드 팬의 특권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마치 이미 친한 사이라는 듯, 사적인 대화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
이내 저 멀리서 카니발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
두 여자가 아쉬움을 가득 담아 손을 흔들었다. 찰나처럼 짧았지만, 남들은 억만금을 줘도 절대 누릴 수 없는 그들만의 은밀하고 완벽한 개인 팬미팅 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윤과 시은은 행복에 겨운 얼굴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네 명의 에테르 멤버들 역시 마지막까지 다정한 팬 서비스로 화답해주었다.
철컹-.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그녀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층수가 올라가는 숫자가 표시되기 시작하자,
"하... 미쳤네, 씨발."
조금 전까지 하윤을 향해 다정하게 웃던 시우의 입에서 서늘하고 나지막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시우가 짓이기며 내 뱉은 이 욕설은 방금 전, 두 여자를 마주한 네 명의 에테르 멤버들 모두가 각자의 다른 방식으로 뱉어낼 수밖에 없는 감탄사였다.
사실, 오늘 마주친 두 여자의 비주얼은 멤버들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공연장이나 출근길, 퇴근길에서는 활동하기 쉬운, 캐주얼하면서도 꽤나 늘 편안한 옷차림이던 그녀들이었다. 심지어 아주 가끔 오는 팬싸에서도 오늘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정도로 아찔한 자태가 아니었다.
하윤은 안이 은근하게 비치는 얇은 하얀색 실크 블라우스에, 걸을 때마다 매끈한 골반 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릎 기장의 타이트한 블랙 H라인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시은 역시 오늘의 모임 분위기에 맞춰 굴곡진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세미 정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노출이 심한 옷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단박에 짐승으로 만들만큼 엄청나게 꼴리는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씨발, 미쳤지? 하, 씨발, 진짜 미쳤다니까?!!"
태윤 역시 그녀들이 남기고 간 달콤한 그녀들의 향을 다시 들이마시며 어이없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굳이 자신들의 열성적인 팬이 아니더라도 팬덤 내에서 이미 얼굴이 널리 알려진 그 유명한 루미들. 곁에서 지켜보던 도현과 지한의 머릿속에도 방금 전 그녀들의 농염한 잔상과 향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오랜 시간 보아 와서,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응원을 해주는 골수팬의 고마움에서 생긴 친밀감이라기엔, 그들은 이미 선을 한참 넘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위험할 정도로 요염하게 무르익어버린 저 여자들이, 지금 이 20대의 젊은 수컷들의 본능적인 욕정을 사정없이 자극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43 백스테이지의 환희“와, 시야 대박!”에테르의 리더, 강태윤이 시은에게 선물로 준 ‘에테르 VIP 콘서트 티켓’의 좌석은 1층 8구역의 12열이었다. 실질 1열. 심지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연석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태윤의 배려에 두 사람의 마음이 따뜻하다 못 해, 뜨거워졌다.체조경기장, KSPO DOME의 8구역은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무대 전체를 보기에 상당히 좋은 자리였다. 본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긴 하지만 멤버들이 움직이는 모든 동선을 따라가기 좋고, 전광판까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 돌출 무대가 있어, 그 무대 앞에 에테르 멤버들이 온다면 플로어 좌석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은 자리였다. 거기다 실질 1열의 좌석이니 멤버들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자리.“저기... 시우 부모님.”“와, 진짜 어머니 너무 미인이시다.”“그치? 누나도 엄청 예쁘더라. 근데 오늘은 안 왔나 봐."덕질 5년 차의 짬바는 내 최애의 가족도 괜히 친근해지는 법."어? 저기 저 사람, 태윤이 여동생 아냐?”“어? 어디?"시은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윤이 가리킨 곳에 태윤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어어, 맞아. 존나 예쁘지?”“응. 진짜 연예인들은 가족들이 다 장난 없네.”“그러니까. 부럽게.”VIP 초대권의 또 다른 혜택. 멤버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보통 콘서트의 두 번째 날인 토요일, 중콘에 가족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 하윤과 시은이 앉아 있는 8구역에서 에테르 멤버들의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들이었다.***"꺄아아아아악!!!"암전과 함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음악의 비트 소리와 함께 VCR의 화면이 재생되었다.또 다시, 에테르 단독 콘서트 [Luminate]의 두 번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시우야~~~!”"강태윤!!!"콘서트가 진행될수록 콘서트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
#42 거짓말의 서막“내일 몇 시에 마치는데?”바쁘게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하윤을 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은 건우가 툭- 물었다. 순간, 하윤의 손짓이 멈칫했다. 가만... 막콘이 몇 시에 끝나더라?막콘의 경우에는 앵콜에서 앵앵콜, 앵앵앵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좀 더 넉넉하게 알리바이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 어느때보다 하윤의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음... 8시... 쯤?”“하, 더럽게 늦네. 데리러 가?”“아냐... 후배가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어.”응, 시은이가 태워 주기로 했어.“어디로 가는데?”아차차!이건 생각을 못 했는데...“어... 그... 우리 회사... 연수원 있잖아.”“아~ 용인에 있는 거?”“아, 응!”다행이었다.아주 스무스하게 잘 넘어갔다.“그럼, 집까지 1시간 정도 걸리겠네? 우리 집으로 바로 올 거지?”“음... 피곤할 것 같은데?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하윤은 건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첫콘 때 구매한 콘서트 MD 굿즈는 시은이에게 다 맡겨 놓고 온 상태였다. 마지막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바리바리 안고 귀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자신의 오피스텔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다. 실제로 피곤하기도 할테고 말이다.“내일은 꼭 껴안고 자야지. 아이씨, 연수 개새끼. 월요일에 학교 가서 그 새끼 보이기만 해봐라. 확 대가리 날려 버릴 거야, 씨발.”하윤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는 차건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였지만, 두 사람의 2,500일인 일요일, 그녀와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건우의 역린을 살살 건들고 있었다.빠...빨리 가야할 것 같다.“바빠도 중간 중간 연락 자주 해.”“응."시우의 우치와와 네임보드, 스케치북, 또 다른 루미들에게 나눔할 커스텀 미니 굿즈들을 잔뜩 넣은 작은 캐리어를 손에 끌고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혹시나 건우
#41 사랑의 깊이하윤은 건우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사실, 앵콜곡까지 맛있게 말아줄 에테르의 마지막 모습까지 끝까지 보고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에테르 멤버들이 콘서트장의 1층과 2층 사이의 통로에서 토롯코를 타고 등장하기 직전 빠르게 짐을 꾸려 콘서트 장을 빠져나왔다. 콘서트가 진행된 지 약 3분의 2 지점이 지난 상태였다. 아쉬움이 가득 남아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는 이성을 부여잡았다.“포장 주문했는데요.”건우의 집 근처의 건우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덮밥 집에 들려, 미리 앱으로 주문한 포장 주문 음식을 받았다. 어쩌면 피곤함에 쩔어 저녁도 굶고 소파나 침대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 6월과 8월의 시험 마지막 날에도 그랬으니까.기왕이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콘서트를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음에도 벌써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띠띠띠띠띠띠띡- 띠리리-건우 집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건우가 깨어 있었다면 하윤이 문 따는 소리에 벌써 중문 앞까지 달려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과 함께 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어두움만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거실에는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 놓은 흔적과 탄산수 한 병을 따서 반쯤 마시다만 흔적이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하윤은 그의 흔적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옷들은 바르게 펴 스타일러에 넣어 기계를 작동 시켰고, 반쯤 남은 탄산수는 싱크대에 버리고 병은 재활용 통에 넣었다.굳게 닫힌 그의 마스터 룸을 힐끔 보고는 좀 더 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들어가 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건우가 너무 피곤한 탓에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게스트 룸에 가서 잠을 자면 될 것이고, 건우의 그 잘난 얼굴을 못 보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몸은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윤은 빠르게 욕실
#40 에테르 단독 콘서트 [ Luminate ]“콘서트 퇴근 길도 못 보고 간다고?”채아의 눈이 커졌다.에테르가 데뷔한 이래로 다섯 번째 단독 콘서트였다. 그때마다, 콘서트 기간 3일 내내, 공연을 마치고 퇴근하는 에테르 멤버들과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덕질의 룰이었다.이미 채아를 제외한 직장인 셋은, 반차를 내고 에테르의 단독 콘서트 [Luminate]가 열리는 [ KSPO DOME ]에 일찍 도착했다. 줄을 서서 콘서트 MD 제품을 구매하고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은 후, 진작에 공원 입구 쪽의 할리스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며 콘서트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응. 마치자마자 바로 튀어가야 돼.”하윤이 아쉬워하는 채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한 듯, 예쁜 미소를 흘렸다.가끔, 이 언니들은 참 이상했다. 에테르의 덕질에 정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가끔 현생의 일로 에테르의 우선 순위를 바꿔버리는 기행을 하곤 했다. 빠순이질에 진심인 이들에게 현생의 일 따위는 감히 에테르보다 앞설 수 없는데 말이다.“시은아, 너는 애들이랑 같이 보고 와.”하윤은 시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사실 오늘, 하윤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오늘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차건우의 10월 ‘변시 모고’의 마지막 날이지 않은가. 아무리 늦어도 오후 8시쯤에는 그가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금요일의 콘서트는 직장인의 퇴근 시간을 고려하여 주말 콘서트보다 늦게 시작하는 이유로 밤 10시가 넘어야 끝날 판이었다.더군다나 토, 일 이틀 간 선행 연구팀의 연수가 있다고 알고 있는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도 억지로 삼키며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하윤이 보여준 중콘 티켓 취소 내역을 보며, 콘서트 3일 중 하루라도 재밌게 보고 오라며 저 답지 않게, 에테르의 첫콘을 쿨하게 보내준 그였다.그러니... 이하윤의 마음이 편할 턱이 있겠냐고.“나, 중간에 나가야 될 수도 있어.”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39 콘서트의 빠순이를 위한 정신 나간 아이돌의 빌드업쿵- 쿵- 쿵- 쿵-서초동의 에테르 단독 연습실. 반복 적인 음악의 비트 소리가 끊어지지 않은 지 벌써 7시간째였다. 단독 콘서트를 2주 앞두고 연습실과 숙소만을 오가며 본업에 충실하고 있는 5년 차 아이돌, [에테르].“잠깐, 잠깐, 잠깐!”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거대한 대형 거울 속에서 도현이 춤을 추다 말고 다급하게 손을 휘젓고 있었다.도현의 손짓에 매니저가 오디오의 스탑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뚝- 음악이 끊기고 잠깐 동안 그곳은 멤버들의 거친 호흡 소리로만 가득 찼다.“하아... 하아...”음악이 끊어진 틈을 타 바닥에 하나 둘 주저앉는 에테르 멤버들. 10월 초. 밖의 날씨는 서서히 가을의 서늘한 날씨로 변하고 있었지만 연습실 안은 여전히 한여름 같았다.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어도 멤버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이거 진짜 아니야.”도현이 거친 호흡이 조금 정리 되자마자 자신이 음악을 멈춘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콘서트 셋리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을 때부터 계속 말이 나왔던 부분.“루미들이 좋아할 만한 셋리는 맞는데... 이거 잘못하다간 사고 나. 무대 위에서 누구 하나 죽을 일 있어? 두 곡 다 빼든지, 아니면 곡 하나를 바꾸던지 해야 된다고.”다소 격양된 목소리의 도현. 여전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나머지 멤버들은 에테르의 리더인 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동갑내기이자 팀의 맏형들인 태윤과 도현은, 계속 해서 다른 의견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5년간 활동을 하면서 앨범의 곡들 중에는 같은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노래들이 있었다. 지금 셋리에 있는 이 두 곡은 특히나 루미들이 함께 연결해서 보고, 듣는 것을 상당히 좋아 했다.문제는 두 곡 모두 매우 빠른 비트에 안무 동작이 많이 어렵고, 움직임이 많아 한 곡을 소화하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는 것에 있었다. 이런 곡을 연속으로 춤추고 노래를 하려고
#38 콘서트를 위한 빠순이의 빌드업[ 에테르 일본 투어 콘서트 ]에 눈이 멀어, 자신들에게 미쳐있는 남친들의 깊은 사랑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어줍잖은 계획으로 남친들의 고삐를 쥐려 했던 어리석은 빠순이들, 이하윤과 최시은은...주말 내내 남친들의 분노를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온 삭신이 쑤시는 쾌락을 주말 내내 즐겼던(?) 그녀들의 현생은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아, 미안해.”수요일의 늦은 저녁. 오랜만에 둘이서 저녁을 먹기로 한 하윤이와 시은이였지만, 하윤의 갑작스런 야근으로 저녁 식사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대신, 두 사람은 진한 수다나 떨기 위해, 시내의 24시간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만났다.“그래도 용케 빨리 빠져 나왔네?”먼저 도착한 시은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숨을 고르고 있는 하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지난 주 금요일, 이태현과 저녁을 먹기로 했을 때만 해도 반짝반짝 빛나며 예쁘고 섹시했던 친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가슴팍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대충 묶어 올리고, 급하게 뛰어 오느라 정리하지 못한 잔머리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원래도 진한 화장을 하지 않는 하윤이었지만 하루 종일 거울 한 번 못 들여다 본 듯 번들 거리는 유분기와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오늘 하루 그녀의 현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었다.“하... 엉망진창이네.”가쁜 숨을 고르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제서야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상태 체크를 하던 하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새로운 발견과 연구를 위한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대기업의 연구원 일이었지만 소망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연구실에 머무르기 보다는 온갖 수치를 문서화하고, 엑셀 창을 열어 서류 작성을 하는 일이 더 많은 주임 연구원의 삶. 오늘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온 터라 허리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저녁은? 누구랑 먹었어?”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건만, 오늘 안에 전송해줘야 할 급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