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10 남이 하면 집착, 내가 하면 숭고한 사랑
다시 지상의 룸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빨리 빨리 빨리 빨리 빨리!!!"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두 사람은 미친 듯이 각자의 핸드폰 갤러리를 열어, 방금 찍은 사진들을 '가려진 항목'으로 재빠르게 옮겨서 잠가버렸다. 이렇게 하면 앨범 안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눈치 빠른 수컷들의 1차적인 검열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오늘 밤 집에 돌아가서 와이파이 환경이 설정되면 클라우드 계정에 자동으로 백업이 되고, 거듭 확인을 거친 뒤 -- 혹시 모를 대참사를 막기 위한 재확인은 반드시 필수! --, 몰래 숨겨둔, 가려진 항목에서 지우고, 휴지통에서 영구적으로 흔적도 없이 비워버리면, 비로소 ‘완벽한 범죄’로 끝나는 것이었다.
"대박!!!“
“아우, 씨...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네.”
빛의 속도로 모든 보안 조치를 끝마친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방방 뛰었다.
"룸 끼고 논다는 썰은 들었는데, 우와, 여긴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러니까. 어떻게 그동안 한 번을 안 마주치다가 하필 오늘 딱 마주쳤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도파민에 잔뜩 찌든 하윤과 시은.
"하, 야, 시우가 내 어깨에 손 올렸어."
"난 태윤이랑 뽀뽀할 뻔. 얼굴 완전히 가까이 붙어서 찍었잖아."
잔뜩 흥분된 상태로, 두 사람은 잠가둔 비밀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찰나의 황홀경에 흠뻑 빠져들었다.
당장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자신들을 소유하지 못해 안달 난 그 지독한 수컷들의 소굴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그 문을 열기 전까지는, 지금 이 터질 것 같은 배덕감을 완벽하게 즐기고 다 털어내야만 했다.
현생의 수컷들에게 몸과 마음을 전부 내어주는 깊은 사랑과 쾌락과는 전혀 결이 다른, 맹목적으로 돈을 쓰고 응원하며 시각적으로만 소비하는 아가페적 사랑이었지만, 확실히 살아 숨 쉬는 입체적인 사내들과 실제로 살을 부대끼고 마주하니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다.
화면을 뚫고 나온 그 예쁘고 관능적인 얼굴들에 기분이 극도로 달아오르는 걸 보면, 암컷은 어쩔 수 없는 암컷인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하윤과 시은은 룸 문손잡이를 잡기 전,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지하 주차장에서의 그 미칠 듯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한 무던한 노력이었다.
“야, 진정해. 릴렉스.”
“티내면 우리 진짜 뒤진다.”
표정 관리를 단단히 하고 그들의 수컷들이 우글거리는 룸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육중한 프라이빗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공중을 무겁게 떠도는 최고급 싱글몰트 위스키의 독한 향기와 짙은 수컷들의 페로몬이 확 끼쳐왔다. 여전히 상기되어 있는 두 여자의 달아오른 뺨과 물기 어린 눈빛은, 다행히도 이미 룸 안을 가득 채운 알코올의 열기와 조명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룸에 들어서자마자 하윤은, 서둘러 룸 안에 딸린 화장실로 쏙 들어갔고, 시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제 남자 친구인 현민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무심한 척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현민이 새 컵에 얼음을 담고 최고급 양주를 따라주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아, 서주환. 너 오늘은 왜 여자 친구 안 데리고 왔어?“
가슴속에 아직 남아있는 태윤의 흔적과 흥분을 감추기 위해, 시은은 애써 머리를 굴려 상석의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는 주환에게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지난번 모임까지만 해도 옆에 끼고 앉아서 물고 빨던 늘씬한 모델 여자 친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걔? 헤어졌지."
주환이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아니, 왜?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꽤 괜찮아 보이던데?"
시은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 잘난 수컷들의 기형적인 연애사는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체 눈이 얼마나 높으면, 그렇게 예쁘고 잘난 여자들을 옷 갈아입듯 수시로 갈아치우는 건지 말이다.
"하... 집착이 너~무 심해, 집착이. 피곤해서 못 만나겠더라."
주환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씨발, 인정. 나도 집착하는 여잔 딱 질색이더라."
시은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그녀의 허벅지를 주무르던 현민이, 주환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입을 털었다.
"맞아. 사람 피 말리게 집착하는 년들은 지가 똑같이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곧이어, 맞은편 소파에 앉아 화장실 문을 계속 주시하며 술잔을 비우던 건우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
찰나의 순간, 룸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은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쫙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뻔뻔하게 입을 나불거리는 현민을 한 번, 건우를 한 번. 번갈아 가며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내 시은의 고개가 마치 녹슨 기계처럼 두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천천히 돌아가더니, 제 옆의 현민에게 딱 고정되었다.
시은의 살벌한 눈빛에 현민은 순수하게, '왜?'라는 무고한 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니가 허구한 날 내 핸드폰 뒤지고, 위치 추적하고, 연락 안 된다고 발작하는 거... 그건 도대체 뭔데?"
시은이 참다못해 눈을 부릅뜨며 대놓고 쏘아붙였다.
"내 건 숭고한 사랑이지."
그러자 현민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뻔뻔하고 유려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시은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진짜, 진심, 머리에 총 맞은, 미친 새낀가 싶었다.
뭐, 남이 하면 집착이고 자신이 하면 숭고한 사랑이라고? 하, 내로남불 오지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하윤이 자리로 돌아왔다.
건우는 며칠 굶주린 짐승처럼, 기다렸다는 듯 제 왼쪽 팔을 길게 뻗어 하윤을 제 품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제 옆에 딱 붙여 하윤을 앉히고는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의 턱을 걸쳤다. 건우의 체취가 강렬하게 하윤을 휘감는 순간이었다.
'어휴... 이시우 흔적이 싹 다 날아갔네. 큭큭큭.'
맞은편에서 그 적나라한 소유의 현장을 직관하던 시은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남 비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이내 현민 역시 시은의 옆으로 훅 다가와 붙더니 뺨을 부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볼따구에 맴돌던 태윤의 흔적... 그렇게 그 잔재 역시 무참히 바스라지고 있었다.
건우는 하윤의 빈 잔에 능숙하게 양주를 채워주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낮게 속삭였다.
"조금만 마셔. 너 생리할 때 술 마시면 평소보다 빨리 취하잖아."
그 짐승 같은 차건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 자신이 품고 있는 이하윤 단 한 명에게만 허락된 차건우의 자상함이었다.
이 룸에 있는 저 불알친구 수컷들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낯선 모습. 바깥세상의 그 어떤 예쁜 암컷들도 차건우의 저 젠틀하고 다정한 바이브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구경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이하윤만을 위해 세팅된 '한정판 특권'이었으니까.
"약 먹었어?"
"아니. 술 마실 거라 약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먹으려고. 어차피 내일 저녁부터 아플 것 같은데?"
"약은? 집에 있어?"
"음... 아직 남아 있을 걸?"
"혹시 모르니까 하나 챙겨가. 콘솔 박스에 게보린 있어."
"응, 알았어."
나른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이는 차건우는, 누가 보아도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남자 친구였다. 하윤 역시 그의 지독한 소유욕과 집착에 가끔 답답해하면서도,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이 치명적인 자상함에 번번이 녹아내려, 결국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물론, 하윤이 가장 열광하는 건우의 매력 포인트는, 그 잘생긴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급스러운 날티'이긴 했지만 말이다.
건우와 하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완벽한 연인의 태를 뽐내자, 상석에 앉아 있던 이태현의 심기가 노골적으로 불편해졌다. 태현은 신경질적으로 양주잔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이현그룹의 후계자인 재벌 3세. 배우 뺨치는 미친 외모에 완벽한 기럭지까지. 대체 어디 하나 빠질 것 없이 다 가진 이 완벽한 알파메일이 친한 동생의 옆에 딱 붙어 앉은 여자를 보며 속을 끓이는 그 처절하고 기괴한 모습이라니.
맞은편에서 그 기괴하고 안타까운 짝사랑의 현장을 캐치한 시은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 오빠, 그렇게 궁상 떨지 말고, 연애를 해, 연애를."
시은의 일침에 태현이 잔을 내려놓으며 나른한 눈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고 있는데?"
"어?"
전혀 예상치 못한 쿨한 대답에 시은이 되려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태현 이 새끼, 연애를 쉰 적이 단 하루도 없어. 여자들이 저 상판데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줄 아냐? 번호표 뽑고 아주 줄 서서 대기 중인데, 뭐. 침대가 식을 날이 없지, 아주."
옆에 앉은 경훈이 태현의 사생활을 대변하듯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마음은 이하윤에게 묶여 있으면서, 육체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의미 없는 암컷들과 끊임없이 살을 섞는 태현의 자학적인 연애 방식.
"근데, 형.“
경훈이 비죽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동안, 현민은 경훈을 향해 시선을 훅 던지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형은, 그 잘생긴 수의사 얼굴 한번 보겠다고 동물병원에 여자들이 아주 줄을 서 있던데 형은 뭐해? 몇 달 전에 만났던 여자랑 헤어지고 왜 이렇게 잠잠해? 혹시, 밑에 기능에 문제 생겼어?”
몇 달 전 꽤 오래 만났던 여자와 끝을 낸 뒤로, 저 잘난 집안과 스펙, 얼굴을 가지고도 통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 경훈을 보며 의아해 했던 현민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아이, 씨발, 말도 마. 저번에 미친 그 스토커년한테 한 번 호되게 걸리고 나니까 진저리가 나서 여자를 못 만나겠어. 소름끼쳐, 씨발!"
경훈이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 양팔을 문지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마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경훈의 말을 기폭제로, 아까 잠시 멈췄던 수컷들의 ‘집착녀에 대한 혐오’에 관한 토론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 씨발. 집착하는 년들은 뇌를 열어서 파 봐야 돼. 대체 대가리 구조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그러는지 싹 다 해부해서 조사해야 된다니까."
"내 말이. 따로 섬 하나에 모아서 싹 다 쓰레기 처리장으로 밀어버려야 돼."
건우의 서늘한 워딩에, 현민이 곧바로 맞장구를 치며 열변을 토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하윤의 눈동자가 건우의 뒤통수에 한 번, 현민의 면상에 한 번 꽂혔다. 아까 시은이 지었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시은은 이미, 자신이 그대로 겪었던 어이없는 레퍼토리라, 그저 하윤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며 낄낄거릴 뿐이었다.
"차건우... 너는... 뭐 집착 같은 거, 그런 거 하나도 안 하나 봐?"
하윤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야, 내가 무슨 집착을 해. 어제도 봐라. 내가 너 쿨하게 놔뒀잖아. 그래, 우리 예쁜 하윤이 원하는 대로 그 딴따라 새끼들 생각하면서 존나게 놀다 들어가라~ 하고, 전화 딱 끊고, 얌전히 집에 가서 잤잖아. 와, 나처럼 방목형으로 프리하게 이해심 넓은 남친이 세상에 어딨냐?"
어제 하루, 방해 금지 모드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눈깔이 뒤집혀 위치 추적을 앱을 까네 마네 발작을 일으켰던 것은 기억도 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한 번 얌전히 넘어가 줬다고 무슨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 것 마냥 당당하게 지껄이는 차건우였다.
"근데, 씨발, 너 경고하는데... 어제처럼 또 그 좆같은 방해 금지 모든가 뭔가 켜놓고 내 연락 씹고 하루 종일 잠수 타면, 그땐 나 진짜 사람 풀어서 추적한다, 이제."
건우는 앞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방목형’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 새끼는 살면서 한 번도 검색해 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벽을 대고 말하는 기분에 하윤은 아예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고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어디 고개를 돌려. 나만 봐."
건우가 다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제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턱을 움켜쥐고는, 자신을 향하도록 억지로 방향을 틀었다. 시야에 오직 저 하나만 담기게 만드는 무식하고도 원초적인 소유욕.
그 숨 막히는 폭군 같은 텐션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은이, 알코올의 기운에 취해 뇌를 거치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지막이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하, 우리 하윤이... 역시 이태현한테 갔어야 했나?"
순간, 룸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건우와 태현, 두 포식자의 시선이 동시에 시은의 얼굴로 꽂혔다.
"씨발, 최시은 저 미친년이 지금 돌았나?!!!“
벼락같은 불쾌함으로 당장에라도 시은을 죽일 듯이 살벌한 건우의 외침과,
"우리 시은이가 확실히 사람 볼 줄 아네."
나른하고 만족스러운 태현의 목소리.
극명하게 갈린 두 남자의 온도 차가 룸 안을 갈랐다.
"지랄들 하네. 둘 다 병신같이 다 별로야. 시은아, 내가 최고지? 그치?"
그 살벌한 기싸움 사이로, 분위기 파악 못 한 미친 백현민 새끼가 뻔뻔하게 입을 털었다.
"하아... 어... 진짜... 너무... 좋다..."
시은은 눈을 질끈 감으며, 영혼이라곤 없는 기계적인 대답을 뱉어냈다.
시시콜콜, 어쩌면 사회적 영양가라곤 단 1그램도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하고 원초적인 대화로 가득 찬 VVIP 룸.
대한민국의 경제와 법, 의료계를 쥐락펴락할 만큼 치열하고 숨 막히는 현생을 살아가는 그들이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둘러썼던 완벽한 위선의 가죽을 다 벗어던졌다.
돈, 욕정, 질투,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본능을 바닥까지 긁어내어 질척하게 얽혀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이 은밀하고도 타락한 공간은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들만의 견고하고 은밀한 세상이었다.
#43 백스테이지의 환희“와, 시야 대박!”에테르의 리더, 강태윤이 시은에게 선물로 준 ‘에테르 VIP 콘서트 티켓’의 좌석은 1층 8구역의 12열이었다. 실질 1열. 심지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연석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태윤의 배려에 두 사람의 마음이 따뜻하다 못 해, 뜨거워졌다.체조경기장, KSPO DOME의 8구역은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무대 전체를 보기에 상당히 좋은 자리였다. 본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긴 하지만 멤버들이 움직이는 모든 동선을 따라가기 좋고, 전광판까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 돌출 무대가 있어, 그 무대 앞에 에테르 멤버들이 온다면 플로어 좌석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은 자리였다. 거기다 실질 1열의 좌석이니 멤버들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자리.“저기... 시우 부모님.”“와, 진짜 어머니 너무 미인이시다.”“그치? 누나도 엄청 예쁘더라. 근데 오늘은 안 왔나 봐."덕질 5년 차의 짬바는 내 최애의 가족도 괜히 친근해지는 법."어? 저기 저 사람, 태윤이 여동생 아냐?”“어? 어디?"시은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윤이 가리킨 곳에 태윤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어어, 맞아. 존나 예쁘지?”“응. 진짜 연예인들은 가족들이 다 장난 없네.”“그러니까. 부럽게.”VIP 초대권의 또 다른 혜택. 멤버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보통 콘서트의 두 번째 날인 토요일, 중콘에 가족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 하윤과 시은이 앉아 있는 8구역에서 에테르 멤버들의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들이었다.***"꺄아아아아악!!!"암전과 함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음악의 비트 소리와 함께 VCR의 화면이 재생되었다.또 다시, 에테르 단독 콘서트 [Luminate]의 두 번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시우야~~~!”"강태윤!!!"콘서트가 진행될수록 콘서트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
#42 거짓말의 서막“내일 몇 시에 마치는데?”바쁘게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하윤을 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은 건우가 툭- 물었다. 순간, 하윤의 손짓이 멈칫했다. 가만... 막콘이 몇 시에 끝나더라?막콘의 경우에는 앵콜에서 앵앵콜, 앵앵앵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좀 더 넉넉하게 알리바이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 어느때보다 하윤의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음... 8시... 쯤?”“하, 더럽게 늦네. 데리러 가?”“아냐... 후배가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어.”응, 시은이가 태워 주기로 했어.“어디로 가는데?”아차차!이건 생각을 못 했는데...“어... 그... 우리 회사... 연수원 있잖아.”“아~ 용인에 있는 거?”“아, 응!”다행이었다.아주 스무스하게 잘 넘어갔다.“그럼, 집까지 1시간 정도 걸리겠네? 우리 집으로 바로 올 거지?”“음... 피곤할 것 같은데?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하윤은 건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첫콘 때 구매한 콘서트 MD 굿즈는 시은이에게 다 맡겨 놓고 온 상태였다. 마지막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바리바리 안고 귀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자신의 오피스텔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다. 실제로 피곤하기도 할테고 말이다.“내일은 꼭 껴안고 자야지. 아이씨, 연수 개새끼. 월요일에 학교 가서 그 새끼 보이기만 해봐라. 확 대가리 날려 버릴 거야, 씨발.”하윤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는 차건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였지만, 두 사람의 2,500일인 일요일, 그녀와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건우의 역린을 살살 건들고 있었다.빠...빨리 가야할 것 같다.“바빠도 중간 중간 연락 자주 해.”“응."시우의 우치와와 네임보드, 스케치북, 또 다른 루미들에게 나눔할 커스텀 미니 굿즈들을 잔뜩 넣은 작은 캐리어를 손에 끌고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혹시나 건우
#41 사랑의 깊이하윤은 건우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사실, 앵콜곡까지 맛있게 말아줄 에테르의 마지막 모습까지 끝까지 보고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에테르 멤버들이 콘서트장의 1층과 2층 사이의 통로에서 토롯코를 타고 등장하기 직전 빠르게 짐을 꾸려 콘서트 장을 빠져나왔다. 콘서트가 진행된 지 약 3분의 2 지점이 지난 상태였다. 아쉬움이 가득 남아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는 이성을 부여잡았다.“포장 주문했는데요.”건우의 집 근처의 건우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덮밥 집에 들려, 미리 앱으로 주문한 포장 주문 음식을 받았다. 어쩌면 피곤함에 쩔어 저녁도 굶고 소파나 침대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 6월과 8월의 시험 마지막 날에도 그랬으니까.기왕이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콘서트를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음에도 벌써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띠띠띠띠띠띠띡- 띠리리-건우 집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건우가 깨어 있었다면 하윤이 문 따는 소리에 벌써 중문 앞까지 달려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과 함께 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어두움만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거실에는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 놓은 흔적과 탄산수 한 병을 따서 반쯤 마시다만 흔적이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하윤은 그의 흔적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옷들은 바르게 펴 스타일러에 넣어 기계를 작동 시켰고, 반쯤 남은 탄산수는 싱크대에 버리고 병은 재활용 통에 넣었다.굳게 닫힌 그의 마스터 룸을 힐끔 보고는 좀 더 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들어가 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건우가 너무 피곤한 탓에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게스트 룸에 가서 잠을 자면 될 것이고, 건우의 그 잘난 얼굴을 못 보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몸은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윤은 빠르게 욕실
#40 에테르 단독 콘서트 [ Luminate ]“콘서트 퇴근 길도 못 보고 간다고?”채아의 눈이 커졌다.에테르가 데뷔한 이래로 다섯 번째 단독 콘서트였다. 그때마다, 콘서트 기간 3일 내내, 공연을 마치고 퇴근하는 에테르 멤버들과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덕질의 룰이었다.이미 채아를 제외한 직장인 셋은, 반차를 내고 에테르의 단독 콘서트 [Luminate]가 열리는 [ KSPO DOME ]에 일찍 도착했다. 줄을 서서 콘서트 MD 제품을 구매하고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은 후, 진작에 공원 입구 쪽의 할리스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며 콘서트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응. 마치자마자 바로 튀어가야 돼.”하윤이 아쉬워하는 채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한 듯, 예쁜 미소를 흘렸다.가끔, 이 언니들은 참 이상했다. 에테르의 덕질에 정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가끔 현생의 일로 에테르의 우선 순위를 바꿔버리는 기행을 하곤 했다. 빠순이질에 진심인 이들에게 현생의 일 따위는 감히 에테르보다 앞설 수 없는데 말이다.“시은아, 너는 애들이랑 같이 보고 와.”하윤은 시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사실 오늘, 하윤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오늘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차건우의 10월 ‘변시 모고’의 마지막 날이지 않은가. 아무리 늦어도 오후 8시쯤에는 그가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금요일의 콘서트는 직장인의 퇴근 시간을 고려하여 주말 콘서트보다 늦게 시작하는 이유로 밤 10시가 넘어야 끝날 판이었다.더군다나 토, 일 이틀 간 선행 연구팀의 연수가 있다고 알고 있는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도 억지로 삼키며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하윤이 보여준 중콘 티켓 취소 내역을 보며, 콘서트 3일 중 하루라도 재밌게 보고 오라며 저 답지 않게, 에테르의 첫콘을 쿨하게 보내준 그였다.그러니... 이하윤의 마음이 편할 턱이 있겠냐고.“나, 중간에 나가야 될 수도 있어.”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39 콘서트의 빠순이를 위한 정신 나간 아이돌의 빌드업쿵- 쿵- 쿵- 쿵-서초동의 에테르 단독 연습실. 반복 적인 음악의 비트 소리가 끊어지지 않은 지 벌써 7시간째였다. 단독 콘서트를 2주 앞두고 연습실과 숙소만을 오가며 본업에 충실하고 있는 5년 차 아이돌, [에테르].“잠깐, 잠깐, 잠깐!”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거대한 대형 거울 속에서 도현이 춤을 추다 말고 다급하게 손을 휘젓고 있었다.도현의 손짓에 매니저가 오디오의 스탑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뚝- 음악이 끊기고 잠깐 동안 그곳은 멤버들의 거친 호흡 소리로만 가득 찼다.“하아... 하아...”음악이 끊어진 틈을 타 바닥에 하나 둘 주저앉는 에테르 멤버들. 10월 초. 밖의 날씨는 서서히 가을의 서늘한 날씨로 변하고 있었지만 연습실 안은 여전히 한여름 같았다.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어도 멤버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이거 진짜 아니야.”도현이 거친 호흡이 조금 정리 되자마자 자신이 음악을 멈춘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콘서트 셋리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을 때부터 계속 말이 나왔던 부분.“루미들이 좋아할 만한 셋리는 맞는데... 이거 잘못하다간 사고 나. 무대 위에서 누구 하나 죽을 일 있어? 두 곡 다 빼든지, 아니면 곡 하나를 바꾸던지 해야 된다고.”다소 격양된 목소리의 도현. 여전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던 나머지 멤버들은 에테르의 리더인 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동갑내기이자 팀의 맏형들인 태윤과 도현은, 계속 해서 다른 의견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5년간 활동을 하면서 앨범의 곡들 중에는 같은 세계관으로 연결되는 노래들이 있었다. 지금 셋리에 있는 이 두 곡은 특히나 루미들이 함께 연결해서 보고, 듣는 것을 상당히 좋아 했다.문제는 두 곡 모두 매우 빠른 비트에 안무 동작이 많이 어렵고, 움직임이 많아 한 곡을 소화하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는 것에 있었다. 이런 곡을 연속으로 춤추고 노래를 하려고
#38 콘서트를 위한 빠순이의 빌드업[ 에테르 일본 투어 콘서트 ]에 눈이 멀어, 자신들에게 미쳐있는 남친들의 깊은 사랑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 어줍잖은 계획으로 남친들의 고삐를 쥐려 했던 어리석은 빠순이들, 이하윤과 최시은은...주말 내내 남친들의 분노를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온 삭신이 쑤시는 쾌락을 주말 내내 즐겼던(?) 그녀들의 현생은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아, 미안해.”수요일의 늦은 저녁. 오랜만에 둘이서 저녁을 먹기로 한 하윤이와 시은이였지만, 하윤의 갑작스런 야근으로 저녁 식사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대신, 두 사람은 진한 수다나 떨기 위해, 시내의 24시간 프렌차이즈 커피숍에서 만났다.“그래도 용케 빨리 빠져 나왔네?”먼저 도착한 시은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숨을 고르고 있는 하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지난 주 금요일, 이태현과 저녁을 먹기로 했을 때만 해도 반짝반짝 빛나며 예쁘고 섹시했던 친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가슴팍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대충 묶어 올리고, 급하게 뛰어 오느라 정리하지 못한 잔머리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원래도 진한 화장을 하지 않는 하윤이었지만 하루 종일 거울 한 번 못 들여다 본 듯 번들 거리는 유분기와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오늘 하루 그녀의 현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었다.“하... 엉망진창이네.”가쁜 숨을 고르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제서야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상태 체크를 하던 하윤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새로운 발견과 연구를 위한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대기업의 연구원 일이었지만 소망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연구실에 머무르기 보다는 온갖 수치를 문서화하고, 엑셀 창을 열어 서류 작성을 하는 일이 더 많은 주임 연구원의 삶. 오늘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온 터라 허리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저녁은? 누구랑 먹었어?”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건만, 오늘 안에 전송해줘야 할 급한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