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호스트바에서 내 강의를 듣던 복학생을 만났다. 그날 밤 그 남자를 샀다. 평생 쓸 조건으로.
View More추계 학술대회는 다섯 시에 끝났다.
올해는 태령대에서 치렀다. 윤정희가 학회장을 맡은 해였다. 자기 학교 대강당에서 폐회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고, 그녀는 그걸 즐기면서 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서 보면 다 보였다. 누가 졸고 누가 휴대폰을 보고 누가 가방을 먼저 챙기는지. 학회의 폐회사라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을 가릴 수 있는 자리니까.
박세경은 셋째 줄 통로 쪽이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회의든 세미나든 회식이든. 지금도 가방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폐회사가 끝나는 문장을 기다리는 손이었다.
조교수 주제에.
“이번에 발표된 우수한 논문들을 보니…”
잠깐 원고로 향했던 눈을 들었다. 박세경을 봤는데, 그녀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윤정희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이크에 대고 다음 문장을 읽으면서도 눈은 그대로 두었다. 박세경이 먼저 피했다. 가방 손잡이를 쥔 손이 풀리는 게 보였다.
오늘은 못 나간다는 걸 자신도 알 테지.
학술재단의 김 단장이 와 있었다. 올가을 연구단 과제의 심사를 쥔 사람. 여자였다.
김 단장이 오는 날이라 특별히 신 사장이 자리를 만들었다. 신 사장은 장비 납품을 하는 여자였고, 학과에 들어오는 장비의 절반이 그 회사 제품이었다. 김 단장과는 윤정희보다 먼저 알던 사이였다.
신 사장은 몇 년 전부터 여교수들끼리의 모임을 하나 꾸려 놓고 있었다. 이름은 없었다. 분기에 한 번, 이렇게 학회가 있는 날이면 신 사장이 자리를 만들었다. 뒷풀이에 남자 교수는 없었다.
박세경도 그 모임에 들어 있었다. 이름만. 네 번 중 네 번을 빠졌다. 사유는 매번 달랐고 뜻은 하나였다. 안 간다.
그런데 오늘은 사유가 없었다. 학회는 그녀의 학교에서 막 끝났고, 끝낸 사람은 그녀의 학과장이었다.
“모두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이상으로 폐회를 선언합니다.”
— 짝짝짝
윤정희는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박세경에게 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윤정희가 도착했다.
“박 교수. 단장님 모시고 가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신 사장이 오늘 작정했어. 오늘은 2차까지 가야 돼. 이번에는 연구단 과제야. 알지?”
박세경은 짧게 숨을 내쉬고 가방을 다시 내렸다. 회색 재킷, 낮은 굽, 아침에 한 화장 그대로. 끝까지 빠져나갈 생각이었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차림.
윤정희는 그 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저 차림으로 지하까지 가는 걸 볼 거니까.
—
호텔 지하 계단 끝에 간판 없는 검은 문이 있었다.
소파는 ㄷ자였다. 김 단장이 가운데, 윤정희가 그 오른쪽. 박세경은 맨 끝에 앉았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윤정희는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도 빠져나갈 생각뿐이냐.’ 냐는 듯.
술이 두 순배 돌았다. 건배할 때만 잔을 입에 댔다가 내려놓으려던 세경을 윤정희가 노려보았다. 세경은 움찔하며 남은 술을 단숨에 넘겼다.
— 똑똑
“선수들 인사드리겠습니다.”
일곱 명이 한 줄로 서서 허리를 숙였다. 이름과 나이가 짧게 오갔고, 웃음이 뒤따랐다. 맨 끝에 선 하나만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시우입니다.”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
김 단장이 먼저 골랐고 윤정희가 두 번째였다. 다른 교수들이 서로 등 떠밀면서 골랐고, 하나가 다음 팀도 보자고 했다. 하나만 뺀 모두가 기대감으로 깔깔거렸다.
실장이 남은 넷을 데리고 나갔다가 다른 다섯을 데리고 들어왔다.
박세경의 차례였다.
윤정희는 기다렸다. 괜찮습니다, 라고 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아무나 앉혀 놓고 한 시간 내내 투명 인간 취급을 하거나. 어느 쪽이든 김 단장 눈에 걸리게 될 거였다. 그걸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였다.
박세경은 새로 들어온 다섯을 보지 않았다.
“아까 그 애.”
실장이 멈췄다. “어떤애요?”
“맨 끝에 서 있던 애. 걔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룸이 잠깐 조용했다.
실장이 나가다가 윤정희 쪽을 봤다. 윤정희는 턱을 아주 조금 내렸다. 아까 복도에서 한 얘기 그대로. ‘누구든 박 교수 옆에 앉는 애한테.’
윤정희도 아는 애였다. 키가 컸다. 넘긴 머리, 어깨에 안 맞는 싸구려 셔츠. 웃지도 않고 말도 없고, 손님 옆에 앉아서 술만 따르는 애. 체인지가 제일 많이 나오는 애.
하필 그 애를 골랐다. 두 팀 열두 명 중에 제일 재미없는 애를.
상관없었다. 잔은 어느 손에서 건너가든 잔이었다.
시우가 박세경 옆에 앉았다. 딱 한 뼘 떨어져서. 잔만 채우고는 손을 거둬서 자기 다리에 올렸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앞만 보고 있었다.
윤정희는 그 둘에서 눈을 뗐다. 김 단장이 노래를 시켰다.
—
한 시간쯤 뒤였다.
룸은 시끄러웠다. 마이크는 김 단장과 그 옆에 앉은 남자 손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윤정희는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곁눈으로 잔을 세고 있었다.
다섯 번. 시우의 손에서 박세경의 손으로. 내려놓을 때마다 잔이 조금씩 비어 있었다.
박세경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2년을 같은 과에서 봤는데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귀까지 붉었다. 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옆을 보고 있었다. 앞이 아니라. 옆에 앉은 그 애를.
그녀가 그 정도에 취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저 얼굴은 분명 취한 얼굴이었다. 고개가 한 번 옆으로 흘렀다가 돌아왔다.
윤정희는 옆에 앉은 남자의 손등을 두 번 쳤다. 턱으로 룸 끝을 가리켰다. 박세경. 그리고 천장. 위층. 호텔과 연결된 건물이었다.
‘취했으면 데리고 올라가라고 해. 더 늦기 전에.’
실장이 시우한테 갔다. 시우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실장을 보고, 박세경을 봤다. 그리고 일어났다.
박세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상태도 아닌 듯했다. 거의 시우에게 반쯤 들려서 일어났다.
소파를 짚은 손이 꽤나 늦게 떨어졌다.
—
줄을 서서 룸에 들어갔을 때, 맨 끝에 그 여자가 있었다. 같은 학교 교수가.
한결은 고개를 숙이면서 봤고, 드는 동안 알았다. 어떤 사정에도 학생들의 수업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교수. 그나마 괜찮은 어른 하나를 꼽으라면 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도 이런 곳에 와서 사람을 사는 사람이었다.
첫 초이스에서 그는 빠졌다. 대기실로 돌아가려는데 복도에서 실장이 팔을 잡았다. 손바닥에 엄지손가락만 한 병을 쥐여 줬다. 술에 빨리 취하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손에 쥔 것은 처음이었다.
“마지막에 앉은 여자. 그 여자 술에 타. 잘해.”
꼭 해야 합니까, 하는 눈으로 봤다.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택한 일이잖아. 돈 필요하다며.”
맞는 말이었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될 일이었다.
룸에 들어가서는 그녀 옆에 앉았다. 한 뼘 떨어져서. 잔을 채우고 주머니 속의 병을 허벅지로 느끼면서 타이밍을 쟀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고 시선이 모이게 되면.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그 틈이면 충분했다.
“너 우리 학교 학생이지.”
노래 소리 밑이었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앞을 본 채로, 잔을 손가락으로 굴리면서.
윤정희를 포함해서 태령대 교수들은 이 가게에서 그를 몇 번이나 봤지만 아무도 몰랐다. 렌즈와 넘긴 머리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줄 끝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만 보고 알았다.
“모른 척해.”
그 말은 그에게 한 건지 자기한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한결은 주머니 속의 병을 만지작 거렸다.
— 똑똑09:00결재판이 두 손으로 들어왔다. 세경은 한 손으로 받았다. 어제보다 두꺼웠다.“방에 가 있어.”그가 멈칫했다. 어제까지는 앞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오늘은 나가라고 했다.이유는 묻지 않았다. 한결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나갔다.— 철컥소리를 들었는데도 세경은 일어나서 손잡이를 당겨 봤다. 닫혀 있었다. 그 문에 등을 댔다. 잠깐.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표지를 넘겼다.결재판은 어제보다 무거웠다. 종이도 늘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세경은 그걸 책상에 올려놓고 잠깐 보기만 했다. 표지. ‘논문 검토 보고서.’첫 장은 어제와 같았다. 시각, 돈 묶음, 재킷, 구두. 둘째 장도 같았다. 셋째 장부터 달랐다.처음 몇 줄은 어제 오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각이 있고, 동작이 있고, 그 여자가 한 말이 있었다.그런데 어느 줄부터인가 시각이 없어졌다. 동작만 남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손가락이 어디를 쥐었는지, 어디서 소리가 났고 어디서 소리가 안 났는지.세경은 그걸 읽었다. 문이 닫힌 방에서, 빨간 펜을 쥔 채로.손목시계를 치던 펜이 멈춰 있었다.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창문을 봤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종이로 돌아왔다. 사 층이었다. 누가 볼 리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하?!”넷째 장에서 세경은 한 번 종이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덮고 나서 자기 손바닥이 뜨거운 걸 알았다. 귀가 뜨거웠다. 숨이 나오는 곳이 코인지 입인지도 헷갈렸다.“후우……크흠.”세경은 깊게 한숨을 내뱉다가 헛기침을 했다. 목에 가래가 잔뜩 걸려 있었다. 빨간 펜으로 윤정희의 말, 그리고 반응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또 물음표를 그렸다. 뒤로갔다가 앞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상상도 못했던 윤정희의 반응에는 아래에 줄을 긋고 별표를 체크해 뒀는데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읽었다.— 탁『윤정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전
열 시가 넘어 있었다.모니터에는 워드 창이 하나 떠 있었고,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윤 교수는 눈을 감고...』거기까지 썼다. 기억은 분명했다. 글자로 옮기는 게 다른 일이었다.낮에 파쇄기가 돌아가던 소리를 떠올렸다. 벗으라고 하던 윤정희보다, 몇 시간을 들여 써 간 종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갈아 버린 세경 쪽이 더 오래 남았다.‘숨소리 하나까지.’숨소리라면 기억했다. 들이켜기만 하고 내쉬지 못하던 숨. 그다음에 터지던 숨. 거기까지는 사실이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어디까지 써야 하나.“후우…”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 소리를 냈다. 천장 형광등이 모니터 위로 희게 번져 있었다. 저 불을 끄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탁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이 꺼지고 모니터만 남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아까보다 크게 보였다.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는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둘러봤다. 아직 주인이 없는 책상들과 창문. 창문 너머로 가로등, 그 사이의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허리를 펴고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등에서 소리가 났다.— 뚜뚝 “으으으…”몸이 굳어 있었다. 책상 앞에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수색훈련에서는 두 시간을 한자리에 엎드려 있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몸은 엎드리는 데 익숙했고 앉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출입문 위 문틀에 손을 걸었다. 손가락 네 개가 걸릴 만큼의 턱. 몸을 당겨 올렸다.한 번. 두 번.내려올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부터 내렸다. 열 번째에서 손을 놓았다.문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는데 그가 손가락을 걸었던 자리만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한결은 손을 툭툭 털고는 복도로 나갔다.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고 센서등이 그를 따라 하나씩 켜졌다. 끝까지 가기 전에 멈췄다. 복도 끝, 412호. 문 아래
— 똑똑09:00세경은 펜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맹해보이는 차림. 세경이 시킨 그대로어젯밤 윤정희의 방에 있던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세경 자신도 그날 밤 그를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테니까.그가 결재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맨 위는 비품 신청서였다. 세경은 품명 옆 칸에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말했다.“과 행정조교한테 물어본거니?”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 “품명에는 모델명이 아니고 규격을 쓰는 거야. 그 조교한테 묻지말고 내가 결재했던 서류들만 찾아서 참고해. 다시 해 와.”그 한장을 빼내 한결에게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이건…”종이를 받아 든 한결이 주춤거리고 서 있자 세경은 턱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서류파쇄기.“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종이는 갈려나갔다.비품 신청서를 걷어내고 나니 ‘논문 검토 보고서’라는 표지가 나왔다.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세경. 앞머리 사이로 눈이 슬쩍 올라왔다가 다시 서류판으로 내려왔다.— 스륵넘어가는 표지10.24. 22:40 P호텔 1602호. 윤 교수 단독. 23:50경 휴대폰 문자 다수 수신(이사장 긴급 호출). 윤 교수 통화 1건, 상대는 재단 사무처 김 실장(으로 추정). 통화내용: 압수수색 예정 확인, 서류 준비 지시, 신 사장 출국 지시. 박세경 교수 언급 1회(“입단속”). 통화 종료 후 퇴실 지시. 00:20 퇴실.세경은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고, 순서가 있었다. 그가 그 방에서 뭘 듣고 뭘 봤는지가 한 장에 들어 있었다. 간단했고 쓸 만했다.압수수색. 세경은 그 네 글자를 펜 끝으로 짚었다. 늘 이런식이었다.미리 알려주고 하는 압수수색.재단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사장, 아니 그 사람의 방에. 그 방에 뭐가 있는지 세경은 몰랐다. 측근이라는 윤정희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입단속
열두 시 사십 분.세경은 412호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리뷰할 논문이 펼쳐져 있었고, 빨간 펜은 한 시간째 같은 줄에 놓여 있었다.창밖은 어두웠다. 공학관은 캠퍼스 가장 안쪽이라 밤에는 가로등 두 개가 전부였다. 그 두 개 사이로 주차장이 보였고, 주차장 너머로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세경은 그 길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블라인드를 내렸다가 다시 반쯤 올렸다.집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내일 1교시 수업이 있었고, 며칠째 붙들고 있는 리뷰논문은 하루쯤 더 본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이 건물에서 이 시간까지 불을 켜 놓은 방은 자기 방 뿐이었다. 남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론열 시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었다. 건물 전체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연구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화장실 물소리, 엘리베이터 소리까지도 희미하게 올라왔다. 세경은 그때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다.윤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세경은 알았다. 돈을 쓰는 법도, 사람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법도, 기다리게 해 놓고 즐기는 법도. 그 애가 그 방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고 나서도 떠오르는 장면이 종이 위의 글자를 자꾸 흔들었다.세경은 쓰던 펜을 내려놓고 같은 종류의 다른 펜을 집어들었다. 논문의 같은 줄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었다. 이미 그어진 줄 위에. 줄이 굵어졌다. 세경은 그 굵어진 줄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하아…”사흘 전 이 방에서 그 애한테 한 말을 떠올렸다. ‘더한 일도 있을 거야. 더 더럽고.’ 그 말을 할 때 세경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사실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렇고 그런 일이겠거니 했을 뿐,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려질 줄은 몰랐다.어쨌든 보낸 건 자신이었다. 등록금과 하찮은 생활비 몇 푼으로. 그 아이는 누군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만 믿고 지금까지 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게 등록금 절반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나는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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