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트바에서 가르치던 학생을 만났다

호스트바에서 가르치던 학생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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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kkuyot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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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바에서 내 강의를 듣던 복학생을 만났다. 그날 밤 그 남자를 샀다. 평생 쓸 조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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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여교수들의 뒷풀이

추계 학술대회는 다섯 시에 끝났다.

​

올해는 태령대에서 치렀다. 윤정희가 학회장을 맡은 해였다. 자기 학교 대강당에서 폐회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고, 그녀는 그걸 즐기면서 하고 있었다.

​

단상 위에서 보면 다 보였다. 누가 졸고 누가 휴대폰을 보고 누가 가방을 먼저 챙기는지. 학회의 폐회사라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을 가릴 수 있는 자리니까.

​

박세경은 셋째 줄 통로 쪽이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회의든 세미나든 회식이든. 지금도 가방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폐회사가 끝나는 문장을 기다리는 손이었다.

​

조교수 주제에.

​

“이번에 발표된 우수한 논문들을 보니…”

​

잠깐 원고로 향했던 눈을 들었다. 박세경을 봤는데, 그녀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윤정희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이크에 대고 다음 문장을 읽으면서도 눈은 그대로 두었다. 박세경이 먼저 피했다. 가방 손잡이를 쥔 손이 풀리는 게 보였다.

​

오늘은 못 나간다는 걸 자신도 알 테지.

​

학술재단의 김 단장이 와 있었다. 올가을 연구단 과제의 심사를 쥔 사람. 여자였다.

​

김 단장이 오는 날이라 특별히 신 사장이 자리를 만들었다. 신 사장은 장비 납품을 하는 여자였고, 학과에 들어오는 장비의 절반이 그 회사 제품이었다. 김 단장과는 윤정희보다 먼저 알던 사이였다.

​

신 사장은 몇 년 전부터 여교수들끼리의 모임을 하나 꾸려 놓고 있었다. 이름은 없었다. 분기에 한 번, 이렇게 학회가 있는 날이면 신 사장이 자리를 만들었다. 뒷풀이에 남자 교수는 없었다.

​

박세경도 그 모임에 들어 있었다. 이름만. 네 번 중 네 번을 빠졌다. 사유는 매번 달랐고 뜻은 하나였다. 안 간다.

​

그런데 오늘은 사유가 없었다. 학회는 그녀의 학교에서 막 끝났고, 끝낸 사람은 그녀의 학과장이었다.

​

“모두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이상으로 폐회를 선언합니다.”

— 짝짝짝

​

윤정희는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박세경에게 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윤정희가 도착했다.

​

“박 교수. 단장님 모시고 가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신 사장이 오늘 작정했어. 오늘은 2차까지 가야 돼. 이번에는 연구단 과제야. 알지?”

​

박세경은 짧게 숨을 내쉬고 가방을 다시 내렸다. 회색 재킷, 낮은 굽, 아침에 한 화장 그대로. 끝까지 빠져나갈 생각이었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차림.

​

윤정희는 그 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저 차림으로 지하까지 가는 걸 볼 거니까.

​

​

​

​

​

—

​

​

​

​

​

호텔 지하 계단 끝에 간판 없는 검은 문이 있었다.

​

소파는 ㄷ자였다. 김 단장이 가운데, 윤정희가 그 오른쪽. 박세경은 맨 끝에 앉았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

윤정희는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도 빠져나갈 생각뿐이냐.’ 냐는 듯.

​

술이 두 순배 돌았다. 건배할 때만 잔을 입에 댔다가 내려놓으려던 세경을 윤정희가 노려보았다. 세경은 움찔하며 남은 술을 단숨에 넘겼다.

​

— 똑똑

“선수들 인사드리겠습니다.”

​

일곱 명이 한 줄로 서서 허리를 숙였다. 이름과 나이가 짧게 오갔고, 웃음이 뒤따랐다. 맨 끝에 선 하나만 달랐다.

​

“안녕하십니까. 시우입니다.”

​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

​

김 단장이 먼저 골랐고 윤정희가 두 번째였다. 다른 교수들이 서로 등 떠밀면서 골랐고, 하나가 다음 팀도 보자고 했다. 하나만 뺀 모두가 기대감으로 깔깔거렸다.

​

실장이 남은 넷을 데리고 나갔다가 다른 다섯을 데리고 들어왔다.

​

박세경의 차례였다.

​

윤정희는 기다렸다. 괜찮습니다, 라고 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아무나 앉혀 놓고 한 시간 내내 투명 인간 취급을 하거나. 어느 쪽이든 김 단장 눈에 걸리게 될 거였다. 그걸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였다.

​

박세경은 새로 들어온 다섯을 보지 않았다.

​

“아까 그 애.”

​

실장이 멈췄다. “어떤애요?”

​

“맨 끝에 서 있던 애. 걔요.”

​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룸이 잠깐 조용했다.

​

실장이 나가다가 윤정희 쪽을 봤다. 윤정희는 턱을 아주 조금 내렸다. 아까 복도에서 한 얘기 그대로. ‘누구든 박 교수 옆에 앉는 애한테.’

​

윤정희도 아는 애였다. 키가 컸다. 넘긴 머리, 어깨에 안 맞는 싸구려 셔츠. 웃지도 않고 말도 없고, 손님 옆에 앉아서 술만 따르는 애. 체인지가 제일 많이 나오는 애.

​

하필 그 애를 골랐다. 두 팀 열두 명 중에 제일 재미없는 애를.

​

상관없었다. 잔은 어느 손에서 건너가든 잔이었다.

​

시우가 박세경 옆에 앉았다. 딱 한 뼘 떨어져서. 잔만 채우고는 손을 거둬서 자기 다리에 올렸다. 둘이 나란히 앉아서 앞만 보고 있었다.

​

윤정희는 그 둘에서 눈을 뗐다. 김 단장이 노래를 시켰다.

​

​

​

​

​

—

​

​

​

​

​

한 시간쯤 뒤였다.

​

룸은 시끄러웠다. 마이크는 김 단장과 그 옆에 앉은 남자 손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윤정희는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곁눈으로 잔을 세고 있었다.

​

다섯 번. 시우의 손에서 박세경의 손으로. 내려놓을 때마다 잔이 조금씩 비어 있었다.

​

박세경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2년을 같은 과에서 봤는데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귀까지 붉었다. 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옆을 보고 있었다. 앞이 아니라. 옆에 앉은 그 애를.

​

그녀가 그 정도에 취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저 얼굴은 분명 취한 얼굴이었다. 고개가 한 번 옆으로 흘렀다가 돌아왔다.

​

윤정희는 옆에 앉은 남자의 손등을 두 번 쳤다. 턱으로 룸 끝을 가리켰다. 박세경. 그리고 천장. 위층. 호텔과 연결된 건물이었다.

​

‘취했으면 데리고 올라가라고 해. 더 늦기 전에.’

​

실장이 시우한테 갔다. 시우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실장을 보고, 박세경을 봤다. 그리고 일어났다.

​

박세경은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상태도 아닌 듯했다. 거의 시우에게 반쯤 들려서 일어났다.

​

소파를 짚은 손이 꽤나 늦게 떨어졌다.

​

​

​

​

​

—

​

​

​

​

​

줄을 서서 룸에 들어갔을 때, 맨 끝에 그 여자가 있었다. 같은 학교 교수가.

​

한결은 고개를 숙이면서 봤고, 드는 동안 알았다. 어떤 사정에도 학생들의 수업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교수. 그나마 괜찮은 어른 하나를 꼽으라면 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도 이런 곳에 와서 사람을 사는 사람이었다.

​

첫 초이스에서 그는 빠졌다. 대기실로 돌아가려는데 복도에서 실장이 팔을 잡았다. 손바닥에 엄지손가락만 한 병을 쥐여 줬다. 술에 빨리 취하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손에 쥔 것은 처음이었다.

​

“마지막에 앉은 여자. 그 여자 술에 타. 잘해.”

​

꼭 해야 합니까, 하는 눈으로 봤다.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

“네가 택한 일이잖아. 돈 필요하다며.”

​

맞는 말이었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될 일이었다.

​

룸에 들어가서는 그녀 옆에 앉았다. 한 뼘 떨어져서. 잔을 채우고 주머니 속의 병을 허벅지로 느끼면서 타이밍을 쟀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고 시선이 모이게 되면.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그 틈이면 충분했다.

​

“너 우리 학교 학생이지.”

​

노래 소리 밑이었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앞을 본 채로, 잔을 손가락으로 굴리면서.

​

윤정희를 포함해서 태령대 교수들은 이 가게에서 그를 몇 번이나 봤지만 아무도 몰랐다. 렌즈와 넘긴 머리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줄 끝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만 보고 알았다.

​

“모른 척해.”

​

그 말은 그에게 한 건지 자기한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한결은 주머니 속의 병을 만지작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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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여교수들의 뒷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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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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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09:00. 공학관 412호.”​명함 뒤에 적어준 자기 글씨를 떠올려 보고 있었다. 어젯밤 저 글자를 쓰고 나온 뒤로 성급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여덟 시 오십 분. 세경은 학사 시스템을 열고 있었다. 창밖으로 1교시 학생들이 공학관 앞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애, 이어폰을 낀 애, 뛰는 애. 그 틈에 그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보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지한결. 건설환경공학과 3학년. 지도교수 란에 정 교수 이름이 있었다. 지난 학기 정년퇴임, 후임 배정은 비어 있었다. 아무도 안 데려간 학생이었다.​상담 이력 한 줄. 2학년 1학기, 휴학 상담. 사유 ‘경제적 사정’. 그다음 줄은 입대였다. 해병대. 복무 기간은 삼 년이 넘었다. 의무 복무보다 길었다. 전역일은 올해 봄. 제대하고 한 학기 만에 그 지하에 서 있었다는 얘기였다.​지난 학기 성적은 세경이 준 구조역학 C를 포함해 전부 C와 D 사이였다. 세경이 준 C 때문에 장학금을 놓친 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 선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똑똑​아홉 시 정각이었다.​“들어와.”​문이 다 열리지는 않았다. 몸이 들어올 만큼만 열고 들어와서, 닫히기 직전에 멈췄다. 한 뼘쯤 열린 채로.​뿔테 안경. 눈을 덮는 앞머리. 두 치수는 큰 체크 남방 위에 늘어난 후드 집업. 굽은 어깨, 한쪽 끈만 멘 낡은 백팩. 어젯밤 열한 시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같은 키라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등이 굽어보여 훨씬 작아보였다.​“앉아.”​그는 방을 한번 주욱 둘러봤다. 책장, 파쇄기, 창가의 테이블. 문에서 창까지 한 번, 창에서 문까지 한 번. 그리고 맞은편이 아니라 한 칸 어긋난 곳에 앉았다. 어제처럼. 부담스럽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백팩은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렸다.​세경은 모니터를 돌렸다. 학사 기록이 그에게 보이게.​“지도교수가 없네.” “……네.” “상담 한 번. 휴학. 입대. 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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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보고서
열두 시 사십 분.​세경은 412호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리뷰할 논문이 펼쳐져 있었고, 빨간 펜은 한 시간째 같은 줄에 놓여 있었다.​창밖은 어두웠다. 공학관은 캠퍼스 가장 안쪽이라 밤에는 가로등 두 개가 전부였다. 그 두 개 사이로 주차장이 보였고, 주차장 너머로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세경은 그 길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블라인드를 내렸다가 다시 반쯤 올렸다.​집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내일 1교시 수업이 있었고, 며칠째 붙들고 있는 리뷰논문은 하루쯤 더 본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이 건물에서 이 시간까지 불을 켜 놓은 방은 자기 방 뿐이었다. 남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표면적으론​열 시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었다. 건물 전체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연구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화장실 물소리, 엘리베이터 소리까지도 희미하게 올라왔다. 세경은 그때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뒤로 몇 시간이나 지났다.​윤정희가 어떤 사람인지 세경은 알았다. 돈을 쓰는 법도, 사람을 세워 놓고 기다리는 법도, 기다리게 해 놓고 즐기는 법도. 그 애가 그 방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정하고 나서도 떠오르는 장면이 종이 위의 글자를 자꾸 흔들었다.​세경은 쓰던 펜을 내려놓고 같은 종류의 다른 펜을 집어들었다. 논문의 같은 줄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었다. 이미 그어진 줄 위에. 줄이 굵어졌다. 세경은 그 굵어진 줄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하아…”​사흘 전 이 방에서 그 애한테 한 말을 떠올렸다. ‘더한 일도 있을 거야. 더 더럽고.’ 그 말을 할 때 세경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사실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렇고 그런 일이겠거니 했을 뿐,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려질 줄은 몰랐다.​어쨌든 보낸 건 자신이었다. 등록금과 하찮은 생활비 몇 푼으로. 그 아이는 누군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만 믿고 지금까지 살아 왔을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게 등록금 절반을 걱정하는 생활이었고.​‘나는 적어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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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다시
— 똑똑​09:00​세경은 펜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들어와.”​맹해보이는 차림. 세경이 시킨 그대로​어젯밤 윤정희의 방에 있던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세경 자신도 그날 밤 그를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테니까.​그가 결재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맨 위는 비품 신청서였다. 세경은 품명 옆 칸에 빨간 펜으로 줄을 긋고 말했다.​“과 행정조교한테 물어본거니?”​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습니다.” “품명에는 모델명이 아니고 규격을 쓰는 거야. 그 조교한테 묻지말고 내가 결재했던 서류들만 찾아서 참고해. 다시 해 와.”​그 한장을 빼내 한결에게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이건…”​종이를 받아 든 한결이 주춤거리고 서 있자 세경은 턱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서류파쇄기.​“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종이는 갈려나갔다.​비품 신청서를 걷어내고 나니 ‘논문 검토 보고서’라는 표지가 나왔다.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세경. 앞머리 사이로 눈이 슬쩍 올라왔다가 다시 서류판으로 내려왔다.​— 스륵​넘어가는 표지​10.24. 22:40 P호텔 1602호. 윤 교수 단독. 23:50경 휴대폰 문자 다수 수신(이사장 긴급 호출). 윤 교수 통화 1건, 상대는 재단 사무처 김 실장(으로 추정). 통화내용: 압수수색 예정 확인, 서류 준비 지시, 신 사장 출국 지시. 박세경 교수 언급 1회(“입단속”). 통화 종료 후 퇴실 지시. 00:20 퇴실.​세경은 두 번 읽었다. 시간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고, 순서가 있었다. 그가 그 방에서 뭘 듣고 뭘 봤는지가 한 장에 들어 있었다. 간단했고 쓸 만했다.​압수수색. 세경은 그 네 글자를 펜 끝으로 짚었다. 늘 이런식이었다.​미리 알려주고 하는 압수수색.​재단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이사장, 아니 그 사람의 방에. 그 방에 뭐가 있는지 세경은 몰랐다. 측근이라는 윤정희도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입단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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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보고서2
열 시가 넘어 있었다.​모니터에는 워드 창이 하나 떠 있었고,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윤 교수는 눈을 감고...』​거기까지 썼다. 기억은 분명했다. 글자로 옮기는 게 다른 일이었다.​낮에 파쇄기가 돌아가던 소리를 떠올렸다. 벗으라고 하던 윤정희보다, 몇 시간을 들여 써 간 종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갈아 버린 세경 쪽이 더 오래 남았다.​‘숨소리 하나까지.’​숨소리라면 기억했다. 들이켜기만 하고 내쉬지 못하던 숨. 그다음에 터지던 숨. 거기까지는 사실이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어디까지 써야 하나.​“후우…”​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 소리를 냈다. 천장 형광등이 모니터 위로 희게 번져 있었다. 저 불을 끄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탁​손을 뻗어 스위치를 내렸다. 방이 꺼지고 모니터만 남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아까보다 크게 보였다.​그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그는 일어났다. 일어서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둘러봤다. 아직 주인이 없는 책상들과 창문. 창문 너머로 가로등, 그 사이의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허리를 펴고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등에서 소리가 났다.​— 뚜뚝 “으으으…”​몸이 굳어 있었다. 책상 앞에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수색훈련에서는 두 시간을 한자리에 엎드려 있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몸은 엎드리는 데 익숙했고 앉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출입문 위 문틀에 손을 걸었다. 손가락 네 개가 걸릴 만큼의 턱. 몸을 당겨 올렸다.​한 번. 두 번.​내려올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부터 내렸다. 열 번째에서 손을 놓았다.​문틀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는데 그가 손가락을 걸었던 자리만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한결은 손을 툭툭 털고는 복도로 나갔다.​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고 센서등이 그를 따라 하나씩 켜졌다. 끝까지 가기 전에 멈췄다. 복도 끝, 412호. 문 아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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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별표
— 똑똑​09:00​결재판이 두 손으로 들어왔다. 세경은 한 손으로 받았다. 어제보다 두꺼웠다.​“방에 가 있어.”​그가 멈칫했다. 어제까지는 앞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오늘은 나가라고 했다.​이유는 묻지 않았다. 한결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나갔다.​— 철컥​소리를 들었는데도 세경은 일어나서 손잡이를 당겨 봤다. 닫혀 있었다. 그 문에 등을 댔다. 잠깐.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표지를 넘겼다.​결재판은 어제보다 무거웠다. 종이도 늘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세경은 그걸 책상에 올려놓고 잠깐 보기만 했다. 표지. ‘논문 검토 보고서.’​첫 장은 어제와 같았다. 시각, 돈 묶음, 재킷, 구두. 둘째 장도 같았다. 셋째 장부터 달랐다.​처음 몇 줄은 어제 오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각이 있고, 동작이 있고, 그 여자가 한 말이 있었다.​그런데 어느 줄부터인가 시각이 없어졌다. 동작만 남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손가락이 어디를 쥐었는지, 어디서 소리가 났고 어디서 소리가 안 났는지.​세경은 그걸 읽었다. 문이 닫힌 방에서, 빨간 펜을 쥔 채로.​손목시계를 치던 펜이 멈춰 있었다.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다시 꼬았다. 창문을 봤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종이로 돌아왔다. 사 층이었다. 누가 볼 리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하?!”​넷째 장에서 세경은 한 번 종이를 덮었다. 손바닥으로. 덮고 나서 자기 손바닥이 뜨거운 걸 알았다. 귀가 뜨거웠다. 숨이 나오는 곳이 코인지 입인지도 헷갈렸다.​“후우……크흠.”​세경은 깊게 한숨을 내뱉다가 헛기침을 했다. 목에 가래가 잔뜩 걸려 있었다. 빨간 펜으로 윤정희의 말, 그리고 반응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또 물음표를 그렸다. 뒤로갔다가 앞으로 돌아왔다. 몇 번을.​상상도 못했던 윤정희의 반응에는 아래에 줄을 긋고 별표를 체크해 뒀는데 그 한 줄을 몇 번이나 읽었다.​— 탁​『윤정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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