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장하늘은 깊은 상념에 잠겨 허공을 응시하다가, 귓가를 울리는 유환의 낮은 부름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이 좀 들어? 괜찮은 거냐고.”
유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걱정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손가락이 장하늘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아 당겼다. 등 뒤로 전해지는 유환의 묵직한 체온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장하늘은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 세심한 배려에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찰나, 장하늘의 눈동자에 희미한 물기가 어린 채 일렁였다. 습관처럼 배어 나온 죄책감에 시선을 피하려던 장하늘의 눈길이, 여전히 초조함이 가시지 않은 유환의 그늘진 안색에 머물렀다.
장하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안심시키려는 듯 유약하게 웃어 보였다.
“유환아, 또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 이제 정말 괜찮아.”
유환은 제 속이 타들어
유환과 오붓하게 데이트도 하고 소중한 추억도 쌓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너무도 잔인했다.하필이면 춘천이라니. 전생의 유환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 또한 영혼이 조각나듯 기억을 잃어버렸던 그 저주받은 핏빛 무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장하늘은 타들어 가는 마른침을 삼키며 본심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유환의 탄탄한 등을 가볍게 툭 쳤다.“유환아, 5월은 가정의 달이잖아. 우선은······ 어른들께 충실해야지.”나직하게 떨리는 목소리 뒤로 '그러니 제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가자고 하지 마'라는 애원이 숨어 있었다.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유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정색하며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또다시 집안의 압박이 나타나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거냐는 밀어내기로 들렸는지, 그의 깊은 눈빛이 서운함과 차가움으로 얼룩졌다.“도S 안방마님이 아주 나를 제대로 한 방 먹이네. 미안해서 더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장하늘은 누가 도S냐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지만, 밀려드는 통증에 가슴이 저려와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향해 서둘러 걸어 나갔다.유환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자 관중석에서는 떠나갈 듯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5회에도 선발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는 건, 이 경기를 완봉승으로 단숨에 끝장내겠다는 에이스의 강력한 의지였다.야구팬들은 새로운 슈퍼스타의 탄생을 목격하며 열광했다.장하늘은 귀를 먹먹하게 채우는 이 눈부신 광경을 제 생의 마지막 풍경인 듯 눈에 담았다.“유환아, 이렇게 마운드에 서 있으니 정말 좋지?”그의 나지막한
장하늘은 유환을 바라보자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져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피곤해서 좀 늦었어.”대충 대꾸를 하고 고개를 돌리자, 유환이 다시금 다가왔다.“어디 아픈 건 아니고?”주변의 서정우와 유경호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유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환은 역시 이런 녀석이었다. 그는 글러브를 바닥에 툭 떨어뜨리더니 장하늘의 이마에 냅다 손을 올렸다.“컨디션 안 좋았던 거야? 미안.”애써 딱딱하게 굴려던 장하늘의 가시 돋친 방어막이 유환의 다정함 앞에서 허무하게 허물어졌다.스스로를 책망하며 뻣뻣하게 굴다가도 결국 본심을 드러내고 마는 유환을 보며, 정작 먼저 무너진 것은 장하늘이었다.“너야말로 안 올 줄 알았는데.”그 말에 유환의 귓불이 순식간에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먼 그라운드로 돌렸다. 저 멀리 오늘의 상대인 L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모습이 보였다.“중요한 경기가 있는데 내가 왜 안 와.”“바쁘다길래.”“진짜 미안하다. 도저히 면목이 없어서.”유환이 찰나의 순간 주춤했다. 장하늘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무도 평온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히려 사흘간 ‘별일’이 아주 많았음을 증하고 있었다.장하늘은 묵직한 미트를 끼며 시선을 잔디 위로 던졌다. 외야의 초록빛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선명했다.“오늘 경기 잘하자.”“당연하지, 장하늘. 오늘은 너 절대 혼자 안 둬.”장하늘은 쓰게 웃었다. 미트로 유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것
대한민국 아침 드라마는 자고로 막장이어야 제맛이라던데, 지금 장하늘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어떤 각본보다도 지독하고 자극적이었다.국내 굴지의 재벌가 후계자가 야구 선수가 된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시커먼 사내와 엉켜 몸을 섞던 현장을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들키다니.남들이 보기엔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없겠지만, 장하늘에게 이곳은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변해버린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이런, 아버지가 오실 줄이야······ 젠장. 장하늘, 미안한데 잠깐만 여기 있어 줘. 불편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장하늘의 젖은 어깨를 다급히 다독인 유환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미안함과 당혹감이 처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어, 괜찮아. 부모님이 아들 집에 불쑥 오실 수도 있지. 유환아, 어서 가 봐.”장하늘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담담한 척 손짓했다.욕실 안의 로브는 단 한 벌뿐이었고, 수건 한 장 걸치고 나갈 용기도 없었기에 장하늘은 식어가는 탕 안에 몸을 숨긴 채 유환의 뒷모습만을 쫓았다.유환은 서둘러 몸을 닦고 로브를 걸친 채 폭풍전야 같은 거실로 나섰다. 욕실 문이 닫히고, 그는 홀로 유도완이라는 거대한 벽과 마주했다.[아버지! 이 밤중에 예고도 없이 대체 왜 오신 거예요!]날 선 유환의 포효가 욕실 벽을 타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이 녀석이 어디서 큰소리야! 너, 저 비실비실한 포수 놈이랑 진짜로 욕실서 살까지 비비는 거냐? 정신 차려, 이놈아!]유도완도 이미 짐작했으리라. 금지옥엽 키운 아들이 자신 같은 남자와 살을 맞대고 있었으니 속이 오죽 타들어 갈까.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남남
뜨거운 열기는 유환의 집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화약고처럼 터져 나왔다.씻고 자야 한다며 비틀거리는 장하늘의 뒤를 따라, 유환은 마치 그에게 매달린 그림자처럼 욕실의 습기 찬 공기를 가르며 파고들었다.온몸에 밴 닭갈비 냄새가 민망했던 장하늘은 샤워볼에 잔뜩 거품을 내며 몸을 문질렀다. 이 냄새를 씻어내는 행위는, 유환을 온전히 받아내기 위한 밤의 의식처럼 경건하고도 관능적이었다.양치질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해 한 번 더 칫솔질을 할 때쯤, 알몸이 된 유환이 옆에서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귀엽긴.”필름이 끊기기 직전이라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평소 주량보다 훨씬 과하게 들이켠 탓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너한테······ 상쾌한 향기만 주고 싶은데······.”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투정하는 장하늘의 목덜미에 유환의 입술이 와닿았다.미칠 듯이 감미로운 감각에 장하늘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유환의 손가락이 비눗방울을 튕기듯 척추 라인을 따라 미끄러질 때마다, 장하늘은 첫눈이 뺨에 닿은 듯한 경이로운 전율을 느꼈다.“그럼 머리라도 두 번 감겨줄까?” “아······, 맞다. 내 머리에서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유환은 대뜸 장하늘의 목덜미를 깊게 집어삼키며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묵직한 한숨이 욕실 안을 울렸다.“진짜 잡아먹고 싶네. 아, 미치겠군.”유환의 목울대에서 흘러나온 낮은 신음은, 사냥감을 목전에 둔 맹수가 억누르는 포효처럼 장하늘의 귓가를 핥았다.내가 그렇게 맛있는 먹잇감인가 싶어 장하늘도 흐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비누 거품이 둘 사이를 가로막는 얇은 베일처럼 존재했지만, 오히려 그 매끄러운 촉감 덕분에 서로의 피부 열기가 더욱 예민하게 전달되었다.장하늘은
얼마나 마신 걸까.장하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차가운 유리잔 가장자리를 느릿하게 맴돌았다. 유환을 바라보는 장하늘의 눈동자에는 달빛 아래 잔잔히 일렁이는 호수처럼, 깊고 진한 애착과 탐닉이 서려 있었다.사랑이 밀물처럼 거세게 밀려오면, 그 뒤엔 반드시 뼈아픈 이별의 썰물이 찾아오는 법.본능적으로 예감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장하늘은 그 본능을 거스르지 못한 채 태어난 가련한 죄인이었을지도 모른다.전생에서도 늘 이랬다. 이만큼 가까워져서 이제야 행복하다 느낄 때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끝나버리곤 했다. 지금 느껴지는 이 완벽한 충만함이 도리어 장하늘을 불길한 예감 속에 몸서리치게 만들었다.살아만 있다면, 멀리서라도 그를 지켜보며 응원할 텐데. 신이 자신에게 그런 자비로운 기회를 허락할지 의문이었다.장하늘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누르려 연거푸 술잔을 비워냈다.“뭐야, 오늘 꽤 마시네?”유환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다가왔다. 장하늘은 녀석의 그림자만 스쳐도 심장이 수런거렸다. 온 마음이 유환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기울어지는데. 그와 멀어지는 삶 따위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너랑 같이 침대로 갈 거니까 걱정 마.”혀끝이 살짝 꼬부라졌음에도 장하늘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유환을 꿰뚫었다.1분 1초라도 더 뜨겁게 유환의 품을 만끽하리라. 1학기만 마치고 떠나야지, 아니 12월 24일 직전에는 정말 끝내야지.혹시 모른다는 희망을 품으며 1년을 버텨 볼까.온갖 생각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몇 년 뒤의 미래를 꿈꾸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사치인 것만 같아, 장하늘은 결국 다시 술잔만 기울였다.***“장하늘, 기분 진
경기는 어느덧 5회 말, S대의 파죽지세에 당황한 상대 팀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면서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상대측은 콜드게임 패배라는 굴욕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조금 전, 장하늘은 홈 플레이트를 향해 몸을 날렸고 베이스를 꽉 밟았다. 상대 포수는 아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항의했고, 판독 시간은 길어지고 있었다. 만약 세이프가 선언되어 홈런이 인정된다면 점수는 11대 0. S대의 콜드게임 승리로 경기는 즉시 종료된다.더그아웃으로 향하던 장하늘에게 유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누가 봐도 완벽한 홈런이었어, 장하늘.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이기는 게 좋지.”장하늘은 비록 판정이 번복되어 2루타로 깎인다 해도, 승리는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었음을 확신했다.다만 이대로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면 유환은 6회에도 등판해 어깨를 소모해야 할 상황이었다.“유환아, 오늘 컨디션 정말 좋아 보이네. 혹시 6회에도 더 던질 수 있겠어?”장하늘은 꾹 참아왔던 애정을 담아, 평소처럼 활짝 웃으며 유환에게 스포츠음료를 건넸다.유환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음료를 받아 뚜껑을 따며 매력적인 입꼬리를 올렸다.“이제 좀 풀린 거야?”풀렸냐니. 장하늘은 자신이 거리를 두려 했던 노력이 유환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 정도로 비쳤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하지만 지금은 그 오해가 도리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응, 다 풀렸어.”그제야 유환은 안심한 듯 환하게 웃으며 장하늘의 어깨를 든든하게 다독였다. 개운한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너랑 정식으로 교제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우린 1년간은
드디어 A대학과의 본선 1차전, 운명의 서막이 올랐다. 그라운드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다행히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주며 간간이 드리워지는 그늘 덕분에 경기를 치르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경기가 시작되자 장하늘의 심장은 터질 듯 고동쳤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유환을 오래 살게 하려면 야구에 인생을 걸게 하면 안 되었다.그리고 또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장하늘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준철의 눈매는 유환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굳은 의지, 세상을 발아래 두려는 오만함 속에 감춰진 올곧음까지도.“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장하늘 군.”물론 장하늘의 1차 목표는 유환을 살리고 자신도 살아 남는 것이다. 그저 더 행복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그런 답은 낼 수 없었다.노회장의 질문은 진부할 법했지만, 유도완 사장보다 훨씬 영민하고 노련한 유준철은 어려운 대화를 무척이나
지금 이 순간에도 유도완은 장하늘 자신이 유환의 곁에 있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길 터.장하늘은 다음 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단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오피스텔을 거쳐 학교로 향했다.캠퍼스는 평화로웠다. 텅 빈 그라운드 위는 시합이 마무리될 때까지 훈련 일정조차 잡혀 있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라커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던 장하늘은 도저히 이 불안을 견딜 수 없어 다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심란한 마음 탓에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깊은 어둠이 창밖에 자욱하게 내려앉았다.별빛조차 삼켜버린 도시의 밤은 차가운 유리창에 푸르스름한 막을 드리우고 있었다.유환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욕실에서부터 이어진 격정적인 행위 끝에 찾아온 만족감이 그를 깊은 수면 속으로 몰아넣었으리라.장하늘은 그의 일정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와 휴대전화를 챙겼다.테라스로 나선 장하늘은 서울의 불빛이 강물처럼 흐르는 야경을 응시하며 차가운 생수를 들이켰다. 액정에 비친 얼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