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그룹 부사장들의 자료를 전부 프린트해 와.”“네, 대표님.”권진섭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미래그룹이요? 북아메리카 3대 재벌의 하나인 미래그룹을 말하는 거예요?”이권이 그를 째려보았다.“왜? 자격이 부족해?”권진섭이 급히 부인했다.“아니, 충분해요. 그런데 당신들, 당신들은...”이권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너는 알 필요 없어.”잠시 후 이권이 한 뭉치의 자료를 들고 왔다.유강후가 자료를 남자 앞에 던지며 말했다.“적합한 사람을 직접 골라. 내가 그쪽으로 보내서 협조하게 할 테니.”그는 지하실에서 나가면서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저놈 다리에 약을 발라줘. 지금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네, 대표님.”지하실에서 나온 이권이 이해가 안 되는 듯 말했다.“대표님, 나은별을 유인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대표님 전화 한 통이면 바로 달려올 텐데요.”유강후는 ‘멍청한 자식’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너 비서 자리에서 내려와야겠다. 우리는 경찰에 협조하는 쪽이잖아. 그 여자는 지금 테러리스트야. 그 여자와 얽혀서 미래그룹 주식을 포기할 거야?”이권이 그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대표님은 주도면밀하십니다. 지금 작은 사모님 위치를 옮겨드릴까요?”“지금 이동하면 그쪽에서 눈치챌 거야.”“하지만 사모님이 그곳에 계시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유강후가 잠시 생각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염지훈을 1층의 구석진 병실로 옮기고, 기존 병실에는 가짜 환자를 배치해. 그리고 다연과 닮은 사람을 그곳에 보내 매일 지키도록 하고.”“이 일은 네가 직접 처리해. 최측근 경호원을 데리고 가야 해. 절대 소문이 새어나가서는 안 돼.”“네, 대표님, 즉시 처리하겠습니다.”다음 날, 서해안의 대형 유람선 위.나은별이 키 큰 서양 남자와 팔짱을 낀 채 유람선의 레스토랑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호화로운 VIP룸으로 안내받았다.적임자로 낙점된 미래그룹 임원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나은별은
유강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여자를 때리지 않아. 너는 지금 여자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야.”나은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소름 끼치게 웃었다.“솔직히 그때 내가 온다연을 바꿔치기한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온다연이 사라진 그날부터 우리 나씨 가문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뭘 해도 망했어. 마치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밑지는 장사만 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말이야.”“게다가 매번 수익이 날 것 같으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이 생겼지.”“마치 거대한 손이 우리의 목을 조르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 것 같았어.”“심지어 아버지도 관직을 잃었어. 그렇게 조심스럽고 소심한 사람이, 단 한 푼도 뇌물을 받은 적이 없고 누구에게 밉보인 적도 없는데, 왜 관직을 잃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우리 외가에도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끊이지 않았어. 무슨 일을 해도 안 되고 어딜 가나 벽에 부딪혔지.”그녀는 유강후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배후의 보이지 않는 손은 너였어. 네가 나씨 가문을 몰락으로 이끌었던 거야. 온다연이 바꿔치기 당한 사실을 진작에 알고 나한테 복수한 거지?”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다가 웃었다.“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너의 능력으로 알아내지 못할 리 없는데, 내가 너무 멍청했어. 이렇게 뻔한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유강후, 넌 정말 잔인해. 단지 한 여자 때문에 두 집안의 인연을 끊고, 우리 집안을 쫄딱 망하게 하다니. 너무 독해. 나한테 전혀 살길을 남겨주지 않았어.”유강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야. 하지만 나씨 가문은 이제 완전히 망했어. 한 달 안에 너희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고택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공중화장실을 지을 거야. 공공시설로 변해서 너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어줄 수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니?”“안 돼.”나은별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 강후 씨. 우리 같이 자란 정을 생각해서라도 고택만은 남겨줘. 제발 그러지 마.”그녀는 말하
나은별은 더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손가락에서 시작된 통증은 심장까지 전해져 바닥을 뒹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하지만 유강후는 동작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발에 다시 힘을 주자, 나은별은 연신 비명을 질렀다.“아파! 나한테 이러지 마. 유강후, 이러면 안 되잖아.”유강후는 눈빛에 독기가 가득했고,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건 네가 받아야 할 벌이야.”나은별은 통증에 기절 직전이었지만, 정신을 다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유강후, 너는 매번 내게 속아 넘어갔고, 매번 그 여자를 버리고 내게로 왔어.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어.”“너 아직 모르지? 나 우울증 같은 거 없어. 우울증에 걸린 척하는 건 정말 짜증 났지만 매번 그년한테서 너를 빼앗아 가는 건 정말 통쾌했어.”“내가 보기엔, 온다연 그년이 진짜 우울증인 것 같아. 쯧쯧, 불쌍한 것! 유씨 집안 사람들에게 10년이나 개처럼 학대당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너의 노리개가 돼야 했으니.”“닥쳐!”유강후의 발길질에 그녀는 몇 미터 밖으로 날아갔다.나은별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두렵구나. 그년이 진실을 알고 너를 버릴까 봐 두려운 거지? 유강후, 이건 너와 너희 유씨 가문의 업보야. 벌받은 거라고.”“너는 나를 천하의 나쁜 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는 너는 무슨 좋은 사람인 줄 알아? 너는 한 번도 나쁜 짓을 안 했다고 말할 수 있어?”“네가 미래그룹을 막 인수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기억해? 너희가 주가를 조작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길이 없어 죽어갔는지 알아?”“잠잘 때, 주변에 수많은 원혼이 떠도는 걸 느끼지 못해?”유강후가 냉혹하게 말했다.“내가 미래그룹을 인수한 건 단지 그룹 내 배신자들을 쓸어내기 위해서였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적이 없어. 주식 투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야. 욕심을 부려 전 재산을 걸지 않았다면 궁지에 몰릴 일도 없었잖아?”“하지만 너는 지금 나와 이런
한재민은 내리자마자 나은별의 비참한 몰골을 보았다.머리는 흐트러지고 드레스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얼굴에도 피가 묻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은별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울부짖었다.“오빠, 살려줘. 유강후가 미쳤어. 나를 죽이려고 해.”그녀는 손을 내밀어 보였다.“방금 내 손가락을 밟아서 부러뜨렸어. 너무 아파.”“너무 잔인해. 여자를 위해서 우리의 옛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아.”한재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녀를 일으키고 손을 살펴보았다.원래 가늘었던 손가락들이 퉁퉁 부었고, 축 늘어진 것을 보니 이미 부러져 기능을 잃은 것 같았다.한재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유강후는 비록 일 처리 방식이 잔인하지만, 친구에게 손을 대는 일은 절대 없었다.그래서 나은별이 나쁜 짓을 저질러도 유강후는 옛정을 생각해서 그녀에게 극단적인 수단을 쓰지는 않았다.그런 그가 오늘 직접 손을 댔으니 반드시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나은별이 울면서 말했다.“유강후가 내 손을 밟아서 망가뜨렸어. 어쩌면 이렇게 잔인해? 열 손가락을 모두 밟아서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나를 테러 조직의 멤버라고 모함하고 있어.”“오빠, 나를 살려줘. 유강후가 정말 미쳤어.”이때 유강후도 갑판에 도착했다.나은별은 부들부들 떨면서 한재민 뒤로 숨었다.한재민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겁내지 마. 네가 잘못한 일이 없다면, 유강후가 너를 어떻게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있으니까.”“하지만 네가 정말 용서받지 못할 일을 했다면 이건 네가 받아야 할 벌이야.”나은별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오빠도 유강후처럼 나를 믿지 않는 거야?”“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 전에 분명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몇 년간 사라졌다가 돌아오더니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 오빠는 정말 무정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생기니 옛정은 전혀 생각 안 해.”“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겠지? 그렇지?”“내가 그
“또 한 가지, 나은별이 가졌던 아이는 한재민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였어.”“그때 나은별은 그 아이를 이용해 한씨 가문에 시집가려고 한재민의 술에 약을 타서 둘이 잤던 것처럼 꾸몄지. 하지만 한재민은 그때 너무 취해 깬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여자와 잘 수 있었겠어?”“나은별은 심보가 보통 나쁜 게 아니야. 내가 잘해주면 언젠가는 마음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여자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또 외국 남자와 잤을 뿐 아니라 그 ‘성염’ 조직 두목의 내연녀가 됐더라고. 나는 그 여자가 수많은 남자와 잤다는 생각만 하면 구역질 나고 그 여자를 위해 멍청한 짓을 했던 것이 후회돼.”“그리고 몇 년 전 너희가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나은별이 손을 쓴 거야. 그 여자가 약을 사용해 상어 떼를 불러왔어.”“그 말은, 내가 그때 물에 빠진 것도 나은별이 꾸민 짓이라는 거야?”“아니, 나은별은 그때 한이준을 죽이려고 했어. 왜냐하면 한이준이 그 여자를 싫어하고 그녀 뱃속의 아이가 한재민의 것이 아니라고 의심했거든. 그래서 상어를 끌어오는 수단을 썼는데 예상치 못하게 네가 물에 빠진 거지.”“우리 중에서 나은별이 가장 아낀 것은 너였어.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한재민을 너의 희생양으로 내놓았지.”“그 여자는 우리 모든 남자를 가지고 놀면서 마치 자기가 여황제이고 우리는 후궁인 것처럼 행동했어. 내가 그 여자를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역겨워.”...의심할 바 없이 유강후와 소이섭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은별은 몇 번이나 휴대폰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다친 손을 들 수 없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주먹을 꽉 쥔 채 깊은숨을 몰아쉬는 한재민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그동안 결혼하고 아이도 가졌지만, 그는 생각처럼 행복하지 않았다.그와 나은별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항상 가시처럼 그와 아내 은하 사이에 박혀 있었고 때때로 튀어나와 문제를 일으키며 둘 사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은하는 온화한 성격이라 한 번도 이 일을 먼저 언급한 적이
그녀는 도시가 보이는 난간 쪽으로 비틀비틀 달려가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시간이 됐어. 이제 곧 화염이 너의 병원과 온다연 그년을 삼킬 거야. 하하하! 유강후, 너는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너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냐고?”“아니, 넌 패자야. 너는 나를 선택할 수 있었어. 그랬으면 나는 네가 지금의 위치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탰을 거야. 하지만 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마음속에 오직 온다연 그년밖에 없었지.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너에게 당연한 결말이야.”“이번에는 네가 그년을 지킬 수 없어. 그년은 반드시 불타 죽을 거야.”유강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나은별은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틀림없이 시신을 수습하러 오라는 전화일 거야. 나를 죽여도 소용없어. 그년이 감히 내 남자를 빼앗으려 했으니 불에 태워 죽이는 것도 봐준 셈이지.”유강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나은별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지만 여전히 미친 듯이 웃어댔다.이때 전화를 받은 유강후는 한참 그쪽에서 하는 말을 듣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고마워요. 제 아내한테는 그저 단순한 화재라고 말해 주세요. 제 아내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충격을 받으면 안 됩니다.”그쪽에서 또 무언가를 말하자, 유강후는 두 번이나 고맙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나은별의 표정은 우쭐함에서 점차 놀라움으로 바뀌었고, 다시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뀌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온다연이 왜 불에 타 죽지 않았어? 왜?”이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당신이 한 짓들을 경찰이 모두 감시하고 있었어. 성염은 무슨, 귀신불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조금 전에 너희 두목과 모든 고위층이 체포됐어. 지금 경찰서에서 모든 죄를 인정하고 조직의 명단과 연락처를 일일이 자백했대. 너희 귀신불 조직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잘됐네. 세상에서 또 하나의 쓰레기 조직이 사라졌으니까.”나은별은 공포에 질려 눈을 동그랗게
한재민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피우려는 순간, 유강후가 그의 담배를 빼앗아 던져버렸다.“너도 이제 자식이 있는 사람이잖아. 좀 적당히 피워. 아이와 임신부에게 안 좋아.”한재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 평소에는 안 피우는데, 오늘만큼은 마음속 돌덩이가 사라진 것 같아서 한 모금 피우고 싶었어.”그는 유강후의 어깨를 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너 원래 우리 중에 가장 차갑고 무뚝뚝했잖아. 결혼하고 아내 바보가 될 줄은 생각지 못했네.”유강후는 비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너는 안 그래?”한재민이 허를 찔린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나도 마찬가지야.”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한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나은별과 결혼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너무 무서운 여자였어. 여자는 다 순하고 가끔 고집부릴 때 달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악독한 인간일 줄은 몰랐어.”유강후가 담담하게 말했다.“너희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잊었어? 악당은 남녀와 상관없이 그냥 악당이야.”한재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옛날 일은 대부분 잊었어. 온화하고 착한 은하만 바라보다 보니 여자들은 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유강후는 난간에 기대어 경호원에게 손짓했다.“유턴해 돌아가. 레스토랑은 정상 영업해야지.”한재민이 문득 입을 열었다.“이준과 임혜린의 일에 네가 개입했어?”유강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니, 내 일도 처리하기 바쁜데 남 일까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한재민이 말을 이었다.“어제 한밤중에 이준이 만취 상태로 나한테 전화해서 미친 듯이 울더구나. 임혜린이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다고, 숨은 게 분명하다고.”“생각해 보니, 네가 이 지역을 제일 잘 알고, 또 임혜린이 온다연과 친하잖아. 그래서 네가 어딘가에 숨겨놓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런 게 맞지?”유강후는 넋을 놓고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를 바라볼 뿐 대답이 없었다.한재민이 그의 팔을 툭 쳤다.“말 좀 해봐.”그런데 손이 그의 팔에
병원에 도착해 체온을 재니 40.3℃였다. 의사도 깜짝 놀라며 서둘러 수액을 처방했다. 검사 결과는 곧바로 나왔는데, 폐렴에 감염까지 동반돼 입원이 필요하다는 진단이었다.모든 절차가 끝나고 이권이 가족에게 전화하려는 순간 유강후가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가까이 가서 들으니 온다연의 이름만 거듭 되풀이하고 있었다.순간 가슴이 먹먹해진 이권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병원에 도착했고,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가 내렸다. 꼬마는 경호원의 품에 안긴 채 유강후의 병실로 향했다.이권이 안으려 하자 강우림이 경호원 품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말했다.“창피하니까 좀 안지 말아요. 저 이제 다 컸고 다리도 멀쩡해요.”이권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작은 도련님, 아버님이 이번에는 진짜 벽에 부딪히셨네요. 진씨 가문의 따님이 아버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이렇게 열이 펄펄 끓는데도 만나주지 않고 말이죠.”강우림은 입을 삐죽 내밀고 유강후 곁으로 가더니 이마를 짚어보았다.“이렇게 뜨거워요? 의사 선생님은 뭐래요?”이권이 말을 이었다.“폐렴으로 넘어가서 입원해야 한대요. 정말 불쌍하지 않아요? 도련님이 좀 도와주세요.”강우림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중요한 실험 중이었는데, 갑자기 여기로 끌려왔어요. 기분 나쁘니까 우유를 줘요.”강우림은 모성애를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는 데다 유강후도 바빠서 아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꼬맹이는 어린 나이에 독립적이었지만 분유에 인이 박여 가끔 젖병 꼭지를 물고 자서 치아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이번에 강씨 저택에 돌아올 때, 심리 상담사는 분유 횟수를 점차 줄일 것을 권했다. 안 그러면 앞으로 젖병을 떼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한다.그래서 지난주부터 꼬맹이의 분유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울고 떼썼지만 소용없었다. 반드시 끊게 하겠다는 유강후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으니까.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꼬맹이는 항상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