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원은 고개를 들어 낡은 집을 바라보며 물었다.“여기 곧 철거되나요?”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이 집 참 오래됐죠. 수아가 돌아오기 전에 철거될 줄 알았는데 아직 그대로네요.여긴 수아가 자란 곳이라 그런지 수아도 아쉬워하더라고요. 그렇게 오래 살던 집인데 누가 안 아쉽겠어요? 그래도 낡은 건 언젠가 사라지고 새것이 들어와야죠...”선생님은 한참을 이야기하며 임정아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당부한 끝에 아쉬운 마음을 안고 자리를 떴다.선생님이 떠나자마자 임정아는 송지원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듯 받아들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송지원은 다리가 길어 몇 걸음 만에 그녀를 따라잡았다.임정아는 이번에는 그를 더 이상 내쫓지 않았다.그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낡은 건물에는 이제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아 밤에 혼자 있자니 은근히 무서웠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식탁 위에는 갓 사 온 듯한 채소와 계란이 놓여 있었고 냉장고에는 큰 상자에 담긴 만두가 들어 있었다.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니 어릴 적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냉이 만두였다.그녀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만두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고 송지원은 그런 그녀를 가볍게 무시한 채 집 안을 둘러보았다.작은 투룸 아파트는 정말 오래되어 벽지 군데군데가 벗겨져 있었고 리모델링한 흔적은 있지만 세월의 흔적은 감출 수 없었다.가구는 중고였지만 상태가 괜찮았고 생활용품은 새것들이었지만 낡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묘하게 어색했다.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 뒤 손수 옷을 빨아 베란다에 널었다.그때 마침 만두를 담은 그릇을 들고 임정아가 나왔고 그녀는 빨래 건조대에 널린 송지원의 옷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그 옷은 분명 사이즈가 작았다. 190이라 쓰여 있었지만 그의 체격에는 바지가 짧아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 스타일의 투박한 상의는 그의 잘생긴 얼굴과 곧은 자세를 전혀 가리지 못했다.오히려 짧은 바지조차도 그에게는 묘하게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임정아는 속
임정아는 송지원을 슬쩍 바라보았다.비록 바지는 진흙에 더러워졌지만 그는 키가 크고 품위가 있었다. 어두운 시장 한복판에 서 있어도 마치 그 존재만으로 시장 전체에 빛이 비치는 듯했다.그녀는 그를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고 결국 직원에게 말했다.“됐어요. 그냥 운전기사라서 경비원 일 같은 건 할 수 없어요. 가장 저렴한 옷으로 주세요.”직원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임정아는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옷들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감촉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결국 가장 저렴한 옷 두 벌을 골랐다.외출복 한 벌은 3800원, 잠옷 한 벌은 3500원이었고 임정아는 계산을 마치고 옷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길이 좁아 두 사람은 자연스레 앞뒤로 걸었고 멀리서 다소 눈에 띄는 개조 차량이 조용히 뒤따랐다.두 사람 모두 외모가 뛰어나 쉽게 시선을 끌었다. 특히 임정아는 얼굴을 모자와 마스크로 가렸지만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그녀가 아름다운 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아파트 앞에 이르자 임정아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화를 내듯 말했다.“끝까지 따라올 건가요? 여긴 제 집이에요. 당신은 들어올 수 없어요.”송지원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못 들어가? 어머님께서 남긴 부동산인데 사위라고 못 들어온단 규정이라도 있어?”임정아는 비웃으며 말했다.“송지원 씨, 말조심하세요. 누가 당신 어머님이에요? 그분은 제 어머니고 당신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 당신 어머니는 경원시 송씨 가문 저택에 계시잖아요? 이런 작은 집은 송 씨 같은 귀한 분이 머물 곳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세요.”그녀는 송지원의 어두워지는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고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문 앞에서 선생님이 나왔다.임정아는 선생님을 보자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인사했다.“선생님.”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직접 만든 만두를 좀 가져왔는데 네가 집에 없어서 냉장고에 넣어뒀어. 그런데 말이야 가구는 중고로
“그 일을 떠올린 이상 저쪽 감옥과 그 주변 동향을 계속 주시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나 의심스러운 정보가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해. 그 무리들은 당시에 현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충성스러운 추종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아의 신분을 몇 번이나 바꾸면서 철저하게 조치할 수밖에 없었지.”양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시장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그 사람의 아들이 며칠 전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관련 부서에서 보고서와 자료를 보내왔는데 요즘 시장님 일정이 너무 바쁘셔서 아직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죽었다고?’송지원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정말 그의 아들이 맞는지 신원 확인은 끝났어?”양 비서가 말했다.“그렇게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 매일 교화 수업을 받았는데 안 죽는 게 이상하죠. 오늘까지 살아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이건 큰 사건이라 함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돌아가는 길에 직접 저쪽에 들러 사망자 신원을 확인하고 지난 몇 년간의 관련 기록도 전부 다시 조사해 줘. 완벽한 자료가 필요하니까.”양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여기서 출발하는 대로 바로 가겠습니다.”바로 그때 앞서가던 택시가 멈췄고 임정아가 내려 개조된 차량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양 비서도 급히 차를 세웠고 송지원은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려 임정아의 뒤를 따라갔다.임정아는 그가 따라오는 것을 알면서도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전날 내린 비로 시장 바닥은 아직 축축하고 지저분했고 임정아는 송지원의 깔끔한 바지에 진흙이 튄 걸 보자 왠지 모를 통쾌함이 밀려왔다.그녀의 목표는 단순했다. 송지원이 불편해할수록 그녀는 묘한 기쁨을 느꼈다.송지원이 진흙투성이 시장 바닥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따라오고 싶다면 굳이 말릴 필요는 없었다.임정아는 채소 코너를 지나 살아 있는 닭을 파는 곳에서 닭 한 마리를 사고 신선하고 값싼 과일을 고른 뒤 의류 매장으로 들어섰다.그곳은 중년 남녀를 위한 캐주
도심에 이르자 송지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점쟁이가 한 말 들었지?”양 비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네. 하지만 그런 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 점쟁이는 그냥 사기꾼일 뿐이고 시장님께 돈을 잔뜩 뜯어냈어요. 시장님은 평소에 그렇게 냉철한 분인데 임정아 씨 일만 생기면 귀신 같은 일까지 믿게 되시더라고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송지원은 창밖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떠올랐어? 나 확고한 무신론자였어. 하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어. 특히 수아 일만큼은...”양 비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직접 보지 않았다면 저도 안 믿었을 겁니다. 그때 임정아 씨가 크게 다쳤잖아요. 그런데 그 무당이 잠깐 손을 얹더니 다음 날엔 멀쩡하게 걸어 나왔어요. 더 이상한 건 임정아 씨가 다친 부위랑 시장님 몸의 상처 부위가 똑같았다는 거예요. 시장님은 워낙 강인한 체질이고 특수한 약을 쓴 덕에 살아나신 거겠지만 혹시 이게 전설 속의 ‘환혼’인가요?”그 일은 군에서 제대하기 전 극비 임무 수행 중 벌어졌다.송지원은 특수 작전 도중 20일간 연락이 두절되었다.그의 소식이 끊기자 16세였던 임정아는 송씨 가문을 몰래 빠져나와 현지인을 고용해 수온 산맥 근처 무인지대로 향했다.이후 그녀의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며칠 뒤 그녀가 고용한 현지인들의 시신이 발견됐을 때는 이미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송지원은 직접 대규모 수색팀을 이끌고 일대를 뒤졌고 7일 만에 시냇가에서 거의 죽어가는 임정아를 발견했다.그녀는 복부를 야생 동물에게 물어뜯겨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모두가 포기하려 했고 송지원조차 그녀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바로 그때 스스로를 현지 무당이라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며 10kg의 금과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금은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조건은 도저히 납득할
양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차를 길가에 세웠다.송지원은 차에서 내려 헐레벌떡 뒤따라온 점쟁이를 마주 보며 정중하게 말했다.“죄송하지만 방금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점쟁이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이제는 믿으시겠습니까?”송지원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차에서 내린 양 비서에게 말했다.“점쟁이에게 777만 원 송금해.”양 비서는 눈이 휘둥그레져 되물었다.“시장님, 정말 하시는 겁니까?”송지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양 비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점쟁이에게 계좌이체를 해주었다.돈을 받은 점쟁이는 근처 돌 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땅을 짚으며 무언가를 점쳤고 곧 송지원을 불러 세세하게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송지원은 처음에는 담담하게 듣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다시 양 비서를 불렀다.“조금 전보다 더 큰 금액을 송금해.”일이 끝난 후 점쟁이는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허벅지를 탁 쳤다.“망했네. 남자와 그 아가씨 얘기만 하느라 아이에 대해서 말하는 걸 깜빡했어. 그 아이의 사주는 정말 귀해서 제대로 키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뭐 그래도 그들은 분명 귀하게 여길 거야. 그리고 돈도 너무 적게 받았잖아. 이 정도 큰 천기를 누설했으면 무슨 큰 혼란이 일어날지 나도 몰라. 이젠 더는 점을 칠 수 없겠지. 이 돈으로 그냥 노후나 조용히 보내야겠군.”차 안에서는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임정아가 차가운 표정으로 비꼬듯 말했다.“정말 놀랍네요. 송지원 씨 같은 일 중독자가 이런 실수를 다 하다니. 근무일 대낮에 운해 같은 외진 곳엔 무슨 일로 오신 거죠?”송지원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고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고향에 내려왔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그는 회의 후 빈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그녀를 기다렸지만 연락은 끊겼고 그녀는 결국 전화기까지 꺼버렸다.윤지영에게 간신히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운해
임정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 송지원을 보지 못했고 점쟁이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점괘를 주우며 고개를 갸웃했다.“점괘가 안 좋게 나왔나요?”점쟁이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서둘러 점괘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아가씨 당신 사주는 큰일을 해낼 운명입니다. 하지만 제가 더 말하는 건 천기를 누설하는 일이니 인과응보를 피하려면 777만 원을 봉투에 담아 주셔야 합니다.”임정아는 그가 자신을 속이려 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점쟁이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나를 사기꾼으로 보십니까? 나는 열다섯 살부터 점을 봤고 50년 동안 사람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겨우 생계를 위해 점을 쳤지만 양심은 지켰습니다.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아가씨의 사주는 귀하지만 최근 피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석 달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임정아는 여전히 사기라고 확신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점쟁이는 다급하게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제발 가지 마세요, 아가씨.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두 사람은 짧은 실랑이를 벌였고 임정아는 날카롭게 외쳤다.“지금 당장 안 놓으면 경찰 부를 거예요!”점쟁이는 더욱 다급해져 목소리를 높였다.“777만 원은 정말 적은 금액입니다. 아가씨가 아직 젊고 가짜 명품 가방을 든 걸 보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고 생각한 겁니다. 만약 부자였다면 난 77777를 요구했을 겁니다!”임정아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졌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바로 그 순간 누군가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무슨 일이에요?”임정아는 놀라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 송지원이 서 있었다.“당신이, 여기서 왜...”송지원은 두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고 점쟁이에게 날카롭게 경고했다.“이 이상 난동을 부리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점쟁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더는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듯 점괘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