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중에서 유재성이 더욱 그러했다.그의 막내아들 유강후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잘 드러낸 적 없었다. 무슨 일을 하든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해냈으며 자제력도 대단해 실태를 부린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그는 유강후가 아주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웠다. 자식 중에서도 유강후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컸다.그런데 그 자랑스럽던 막내아들이 갈 곳도 없는 여자아이 때문에 이런 실태를 부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그의 친손녀인 유하령의 뺨까지 때렸다.유강후는 어릴 때부터 유하령을 아꼈고 유하령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들어주었다.온다연이 유강후의 마음속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바로 알렸다. 조금 전 서재에서 온다연이 불쌍해서 거둬주고 있다는 말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가슴 속 깊이 불안감이 피어오른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강후야, 하령이는 네 조카잖니. 무슨 일이 있으면 말로 해결해야지 다짜고짜 뺨을 때리면 되겠니? 고작 그 아이 때문에 조카를 때려야겠니?”이때 유하령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유강후에게 처음 맞아 보았다. 그것도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앞에서 말이다.유강후의 한방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기까지 했다.맞은 뺨은 얼얼해졌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너무도 아팠다.그녀는 얼얼하고도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손을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작은 아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왜 남을 위해 날 때렸냐고요! 왜!”강해숙도 충격 속에서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울며 소리를 지르는 유하령에 가슴이 아픈 듯 얼른 자신의 뒤로 숨기곤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유강후에게 말했다.“강후야, 지금 남을 위해 가족을 때린 거니? 네 마음속에 그 오갈 곳 없는 고아가 네 친조카보다 더 소중한 거니?”유자성과 유민준은 여전히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가족들의 질책하는 시선에 유강후는 몸을 돌려 유자성을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형, 형수가 지금 병원으로 이송
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다연이가 심미진을 계단에서 밀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다연이는 내가 제일 잘 알아.”그는 고개를 돌려 취조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지? 아직도 안 나온 거야?”장화연은 고개를 저었다.“취조실에 함께 있는 사람은 전서후 서장님이십니다. 이미 부드럽게 묻고 있는데도 다연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 진술을 써 내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연 씨는 여기로 온 뒤부터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경찰서로 온 지 2시간 정도 지나긴 했지만, 취조실에 들어간 시간은 반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그녀는 이내 뜸을 들이며 말했다.“하지만 다연 씨는 조금 전 본인이 심미진 씨를 민 것이 맞는다고 인정했습니다. 만약 심미진 씨가 고소라도 하면 일이 더 복잡하게 될 겁니다.”유강후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취조실로 다가가 노크했다.작고 압박감이 느껴지는 취조실 안에서 온다연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누군가 취조실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꼭 이미 세상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설령 유강후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전서후가 말했다.“전혀 협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다만 제가 심미진을 계단에서 민 것이 맞냐고 물었을 때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곤 입을 열지 않더군요.”유강후가 나직하게 말했다.“둘이서 얘기를 나눠도 될까요?”전서후는 얼굴을 구기긴 했어도 동의했다.“10분 만입니다. 시간을 더 길게 드릴 순 없습니다.”유강후는 감사 인사를 했다.전서후가 나간 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몸에 기댈 수 있게 끌어당겼다.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난 네가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그는 뜸을 들이다가 아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설령 네가 밀었다고 해
온다연과 심미진은 피를 나눈 가족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심미진은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지금 그녀는 백치처럼 유강후에게 쓸데없는 질문만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생각해도 가소로웠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엔 혈연관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뿐이었다.그러니 그의 말이 진심일 리가 있겠는가?더구나 두 사람은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 눈에 떳떳하지 못한 사이였다. 유강후에겐 약혼녀가 있었다.“다연아,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유강후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한 몇 글자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하게도 맹세하는 것처럼 웅장하게 들렸다.온다연의 눈빛이 흔들렸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유강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모는 이미 절 버렸는걸요. 제 친이모도 절 버리고, 감방에 가길 바라고, 죽길 바라는데... 아저씨도 언젠가 제가 질리면 버리게 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겠냐고?'온다연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었다.피로 이어진 가족마저 그녀를 버렸는데 어떻게 유강후를 믿고 안심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옷자락만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유강후는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혈색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이내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결혼하고 싶어?”온다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그의 옷자락만 잡고 있었다.결혼이란 무엇일까?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몸이 살짝 떨려왔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무서운 것이에요. 전 결혼
유강후는 지금 그녀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아니,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멈칫하던 그는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괜찮아. 난 바로 문 앞에 있을 거야.”“아니야, 싫어요!”온다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세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강제로 다시 의자에 앉게 되었다.유강후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나가자마자 바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까지 왔어요?”핸드폰 너머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대표님. 30분 뒤에 경찰서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길이 많이 막혀서요.”유강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당장 어떻게든 15분 내로 오세요.”남자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네, 대표님.”전화를 끊은 후 유강후는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몇 모금 만에 담배꽁초가 되어버렸다.장화연도 따라 나왔다. 그녀는 유강후가 검은색 셔츠만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들어가 계세요, 도련님. 밖은 추워서 감기 걸리실 거예요.”그러나 유강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길가의 가로등을 보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화연아,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안 되는구나. 난 지금 당장 다연이 괴롭힌 그놈들을 족치고 싶어.”그놈들이 누구인지 장화연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분들은 도련님 가족인걸요.”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고 분위기도 살얼음판이었다.“그놈들이 다연이를 괴롭힌 방식대로 하나씩 전부 다 똑같이 돌려줄 거야. 우리 아버지 제외하곤 난 그 사람들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없거든.”“괴롭힘을 당하는 공포와 치욕을 받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전부 다 알려줄 거야.”장화연은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유민준은 일찍이 온다연의 피곤에 찌든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다연아, 네가 고생했어.”온다연은 머리도 들지 않고 물었다.“이모는 어떻게 됐어요?”유민준은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하면서 대답했다.“아이는 지키지 못했어. 지금 수술 중이야.”온다연은 시선을 숙이더니 옷자락을 꽉 잡았다.“아이가 없으면 또 집안에서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초췌한 모습에 유민준은 더욱 가슴이 떨렸다. 만약 온지유를 얻을 수 있다면 심미진에게 잘해주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괜찮아. 내가 잘해줄게. 남도 아닌 네 이모인데 당연히 챙겨야지. 아버지한테도 잘 얘기할 거야.”온다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저는 이모가 유씨 집안에서 원하는 걸 이루기를 바라요.”그러면 그녀도 더 이상 심미진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아도 되었다.몽롱한 조명 아래에서 온다연의 얼굴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유민준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넌 당분간 밖에서 지내고 있어. 작은아버지네서 지내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나고 잠잠해진 다음, 내가 다시 데리러 갈게. 집도 준비해 놨어. 때가 되면 우리 둘이 같이 살자.”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그는 황급히 말을 보탰다.“효진이는 내가 정리할게. 네가 싫다면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야.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이대로 몇 년만 참아. 우리한테 애가 생긴다면... 아들이 생긴다면 집안에서도 널 인정할 거야. 다연아, 내가 잘해줄게.”온다연의 눈빛에는 선명한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손을 빼내면서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이효진은 유하령이랑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오빠는 이효진의 약혼자이자 유하령의 오빠예요. 저는 오빠랑 만날 수 없어요.”유민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해야 허락해 주겠어?”온다연은 머리를 들어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곧 유민준과 이효진에게 닥칠 일을 떠올리자 삶도 마냥 답답한
온다연은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는 옷에 손을 있는 힘껏 닦았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말이다.이때 유민준이 그녀를 따라와서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강후의 눈치가 보여서 그냥 멈춰 섰다.“다연아, 작은 아버지랑 돌아가. 내가 내일 만나러 갈게.”그는 온다연을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유강후가 지켜보는 데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유강후는 그가 아버지보다도 무서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유강후와 팔짱을 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 저 힘들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누가 봐도 유민준을 피하려는 말이었다. 유민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만류했다.“다연아, 아직도 내가 미워?”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끼어들었다.“그게 무슨 말이지? 유민준, 넌 이미 약혼했어. 다른 말 나오지 않게 똑바로 행동해.”유강후의 시선만으로도 유민준은 단단히 쫄았다. 더 이상 입을 열면 안 될 것 같은 경고의 눈빛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져서 소름이 다 났다.본가에서 일어난 일은 유민준도 알았다. 유강후는 유하령의 뺨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회사 투자 계획도 철수했다. 그날 유자성과 크게 싸웠다는 말도 들렸다.유민준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유강후가 유하령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하령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줬다. 심지어 한 번은 비행기까지 선물했다.유강후와 유자성은 사이가 좋았다. 유민준이 알기로 두 사람은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유민준에게도 엄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 줬다.그런 유강후가 온다연 때문에 집안과 척을 진 것이다.유민준의 기억 속에서 유강후는 좋은 작은아버지였다. 그런데도 거리감은 언제나 유지했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타고 난 냉혈한인 그는 유재성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유하령을 그렇게 아끼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발짝도 못 들어가게 했다.
온다연이 차에 탄 것을 보고 그는 더욱 급해졌다.“다연아, 네가 말한 거 내가 잘 생각해 볼게. 금방 연락할 테니까 절대 날 차단하지 마. 알았지? 내가 꼭 연락할게.”자꾸만 쫓아와서 말하는 유민준 때문에 온다연은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그러나 유강후가 곁에 있기에 빨리 대답해 버렸다.“알았어요. 이만 돌아가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뒤로 기대 빨리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그녀의 외면에 실패감이 들었는데도, 유민준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인내심 있게 말을 이었다.“네 이모 일도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아버지한테 잘 말할게.”이때 유강후가 차에 올라타서 유민준의 시선을 막았다. 차는 퍽 소리를 내며 닫혔고 금방 멀어져갔다.출발한 지 2분 정도 지나 온다연이 물었다.“아저씨, 여기 물 있어요?”유강후는 그녀가 목이 마른 줄 알고 물을 가져다줬다.“차가운 물이야. 적게 마시고 집에 돌아가서 따뜻한 물 마시자.”온다연은 말없이 뚜껑을 열고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 그러고는 물을 손에 쏟아서 한참이나 씻었다.창밖에서 찬물이 닿은 손은 금방 빨개졌다. 더군다나 자꾸만 비벼서 살이 떨어질 지경으로 달아올랐다.그녀의 이상 행동을 보고서도 유강후는 말이 없었다. 그녀를 말리지도 않았다. 하얗고 예쁘던 손이 빨갛다 못해 보랏빛을 띠자, 그제야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유강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목소리도 약간 차가워졌다.“손 버리고 싶어? 이 추운 날에 찬물로 씻으면 어떡해.”그는 온다연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에 꼭 감쌌다. 차가운 살얼음이 한층 낀 것 같은 온도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추워졌으니 말이다.얼음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동안 잡고 있었는데도 녹여지지 않자, 그는 온다연의 손을 외투 속으로 넣었다.손이 얇은 한 장의 셔츠를 두고 복근에 닿자, 온다연은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온도였다.지금껏 쌓였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기
유강후는 원래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말은 안 해도 온다연이 부탁한 일을 벌써 지시했다.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갑자기 속상해진 그는 그녀를 본가에 데려간 자체가 후회되었다.그는 자신이 있는 한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의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 있었다.‘괴롭힘이 습관이 된 건가? 아니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어찌 됐든 그는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잠시 후 온다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 내일도 경찰서에 가야 해요?”유강후는 느긋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부르면 가야겠지?”온다연은 약간 굳은 몸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저는 이제 가기 싫어요...”“나랑 변호사가 같이 갈 거야. 걱정할 것 없어.”온다연은 이제야 약간 안심한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우리 이모는 정말 유산한 걸까요?”유강후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마도.”“근데 저 진짜 이모를 밀지 않았어요. 맹세해요.”“알아.”“이모는 왜 그런 걸까요? 전에는 저한테 잘해줬는데, 왜 갑자기...”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미진이 한 모든 행동이 그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는 하도 찔려서 무감각해질 지경이었다.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미진이 남과 손을 잡고 유일한 혈족인 그녀를 괴롭히는 이유를 말이다.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어.”그의 옷깃을 꽉 잡은 온다연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게 맞아요. 제 물건이 아직 그곳에 있잖아요.”“중요하지 않은 거면 버려도 돼. 내가 새로 사줄게.”“엄마가 남겨준 물건이에요. 꼭 가져와야 해요.”유강후는 자그마한 상자가 떠올라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자 안에 뭐가 들었어?”“그건 제 비밀이에요. 아저씨한테도 알려줄 수 없어요.”얌전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