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온다연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만족했어?”온다연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몇 곳은 심하게 아프기까지 했다.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아저씨, 그런 말 하지 마요!”유강후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왜 아까처럼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온다연은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조금 전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고삐 풀린 자신이 너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온다연이 아니었다. 유강후에게 홀린 다른 사람이었다.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다리가 풀렸어요. 저 좀 안아서 데려다주세요.”유강후는 이불을 가져와 그녀를 감싸서 위층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간단한 청소를 마치고 그녀를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온다연은 침대에 닿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유강후는 방을 나와 거실에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영상을 정리해서 올려줘요. 내일 오후 검색어 순위에 올라가야 해요. 그리고 진설아라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집안 도우미의 딸이에요. 최근 소비 내역과 인간관계 전부 조사해서 알려줘요.”...온다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오후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토록 깊게 잠들어 봤다. 꿈속에는 주한도, 어머니도,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들도 없었다.그녀는 몸을 움직여 봤다. 아픔이 한결 덜해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반쯤 잠든 상태에서 유강후가 약을 발라주었던 것이 생각났다.부끄러운 생각이 또다시 밀려오자,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간은 오후 2시 반이었다.유강후는 보이지 않았고, 침대 머리맡에는 그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 쪽지에는 짧은 몇 글자만 적혀 있었다.“깨어나면 전화해.”간결한 일곱 글자는 마치 그처럼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힘찬 필체는 마치 금으로 조각한 듯 아름다웠다.온다연은 그 작은 쪽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이 접어서 핸드폰 케이스 안에 끼워 넣었
전화 너머로도 온다연은 유강후가 주는 강렬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저씨, 인터넷에서 보니까 근처에 괜찮은 분식집이 있던데... 저 거기 가서 먹고 싶어요. 집이랑 엄청 가까워요. 저 ... 가도 돼요?”마치 초등학생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온다연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반대로 유강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식당 음식은 깨끗하지 않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주방에 얘기해.”온다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그래도 전 가고 싶어요!”잠시 침묵이 흐른 후, 유강후가 마침내 대답했다.“알았어. 근데 너무 많이 먹지는 마. 뭘 먹었는지 사진 찍어 보내고.”“네, 아저씨.”“어제저녁에 입었던 두꺼운 옷 입고, 목도리도 잘 두르고 나가.”온다연은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곧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섰다. 뒤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누가 봐도 유강후의 사람들이었다.발걸음을 재촉해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온다연은 빠르게 골목길로 들어서서 ATM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재빨리 어딘가로 송금했다.다시 모퉁이로 돌아갔을 때, 검은색 승용차는 도로 끝에 정차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건장한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그중 한 명은 어딘가 약간 비굴해 보이는 모습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온다연이 다시 나타나자, 두 남자는 누가 봐도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온다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근처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다 먹고 나왔을 때 검은색 승용차는 여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다. 타라는 뜻으로 말이다.그녀는 이 차가 유강후의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올라탔다. 차는 유강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온다연이 도착했을 때 유강후는 아직 회의 중이었다. 온다연은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렸다.핸드폰을 보던 중, 온다연은 이효진이 인기 검색어에 오른 것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도 등장했다. 나은별은 그와 팔짱을 끼며 무어라 다정하게 말했다. 유강후는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천상의 커플 같았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입은 옷을 봤다. 캐주얼 하게 예쁜 옷이기는 하지만, 나은별에 비해서는 너무 유치해 보였다.그녀가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때 그들은 사라져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여니 밖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도 있었다.“너무 갑작스러워요. 그런 분이 왜 연락도 없이 오셨대요?”“그분 우리 대표님 아버지세요. 몰랐어요?”“여자분은 대표님 약혼녀시죠? 너무 아름다워요. 역시 재벌가 딸은 다르네요.”“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려요. 사진 몇 장 찍어서 저장해야겠어요.”...온다연은 잠깐 듣고 있다가 외투를 챙겨 들고 탕비실에 갔다. 사무실에 올지도 모르는 나은별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서였다.유재성은 딱히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있는 자리에 그녀처럼 애매한 사람이 끼어 있는 건 불편할 것이다.역시 예상대로, 잠시 후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유재성의 굵은 목소리와 나은별의 맑고 달콤한 목소리 전부 있었다. 간간히 ‘강후 씨’라고 부르는 나은별의 목소리는 귀에 콕 박혔다.그 소리를 들으며 온다연은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밝지 않았던 조명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그녀는 탕비실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른 문을 통해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모든 사람이 유재성을 맞이하는 데 정신이 팔렸기에, 아무도 그녀가 나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회사를 나서며, 온다연은 머리를 돌려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이때부터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점점 강해져서 옷깃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어 추위가 느껴졌다. 오랫동안 걸은 후에야 그녀는 서둘러 나오느라 목도리를 가져오지 않았던
온다연은 잠시 침묵한 후 가볍게 입술을 움직였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생각나서 전화 한 통 했을 뿐이에요. 아저씨한테 안 전해도 돼요. 그럼 저는 이만...”전화를 끊고, 그녀는 다시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로는 고작 1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걸어서 가자니 시간이 생각 밖으로 오래 걸렸다.눈은 점점 많이 내렸다. 가슴 속에 뚫린 구멍도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은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려는 듯 구멍을 향해 몰아쳤다.호텔 정문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온다연은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천천히 나오는 것을 보았다. 어두운 환경 속에서도 그중 한 대가 유강후의 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회사에 있는 줄 알았더니... 벌써 호텔에 돌아온 거야? 그렇다면 나은별 씨는 호텔에서 전화를 받은 건가? 샤워도 호텔에서 했다는 말이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온다연은 그림자 속에 서서 열린 차창 너머로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냉정하고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고 여자는 달콤하고 우아했다.정말이지, 그들은 빛나는 한 쌍으로 늘 햇빛 속에 서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반면 그녀는 어둡고 초라한 구석에 숨어서 살아가야 할 한낱 들풀에 불과했다.이때 차 안에 있던 나은별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를 발견한 듯 나은별은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며 그녀를 바라봤다.나은별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유강후의 시선을 막고 차창을 올렸다. 온다연의 시선을 차단하는 동시에 두 사람의 세계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처럼 보였다.온다연은 눈보라 속에 서서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유강후와 함께했던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생각했을 때, 유강후가 그녀를 의도적으로 찾아주지 않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호텔로 돌아갔다.호텔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그녀를 알아보
자그마한 곰돌이. 유강후의 프로필 사진은 자그마한 곰돌이였다.그는 온다연이 좋아하는 줄 알고 바꾼 것이다. 지난번 그에게 선물한 커프스 단추도 귀여운 곰돌이 모양이었기 때문이다.그건 그녀가 처음으로 선물해 준 물건이다. 하도 귀해서 아직 써보지도 못했다. 사진으로 찍어서 혼자 감상하던 중 보면 볼 수록 마음에 들어서 프로필 사진으로 해놨다.그날로 SNS는 난리가 났다. 오전 사이로 유재성까지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게 영원을 지나가는 길에 회사까지 찾아왔다.더욱 시끄러운 건 한이준이었다. 그는 유강후가 납치라도 당한 줄 알고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했다.유강후는 다시 한번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얌전한 모습이 온다연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걸 사람들은 왜 유난인지 이해가 안 갔다.그는 핸드폰 넘어 곰돌이를 쓰다듬다가 이권에게 문자를 보냈다.[다연이는 뭐 하고 있어?]이권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침실에 계셔서 뭐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들어간 지 세 시간이 됐는데, 제가 노크해서 확인할까요?][됐어. 잠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둬. 밖에 나오면 나한테 문자 보내고.][네, 알겠습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거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기사한테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이 말은 나은별한테 하는 것이었다. 나은별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그 잠깐 같이 있는 것도 안 돼? 아버님이 가시자마자 날 쫓아내는 거야? 강후야, 너 저기 기억해? 진수도 있을 때 우리 자주 갔었잖아. 네 18살 생일도 저기서 보냈어.”나은별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실은 나 어제 꿈에 진수가 나왔어. 너랑 진수가 같이 바다에 빠지는 꿈이었어...”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강후야, 나 진수 보고 싶어. 곧 진수 생일이잖아. 우리 저기라도 가보면 안 돼?”옛친구가 언급되자 유강후는 침묵에 잠겼다. 그는 한진수의 희생 덕분
온다연은 한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 건너편에서는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 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혼자 호텔에 돌아갔어?”“네. 아저씨는... 가족분이랑 같이 있어요?”핸드폰을 사이 두고도 유강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도 화가 나 있어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온다연은 혼자 호텔에 돌아갔다. 문자도 전화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녀는 10살도 아닌 20살이었다. 그런데도 철없이 연락하지 않는 건 이해가 안 됐다.그는 완전히 잊었다. 온다연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그녀는 뭐든 혼자 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는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선택도 한다.유강후는 핸드폰을 꽉 잡으며 말했다.“난 친구랑 같이 있어. 저녁에 늦게 돌아갈 거야. 룸서비스 시킬 테니까 그거 먹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온다연은 짧게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이때 나은별이 갑자기 웃으면서 끼어들었다.“다연 씨예요? 나 강후랑 같이 있어요. 전에 자주 가던 식당에 갈 건데, 다연 씨도 같이 갈래요?”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온다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다연 씨도 여기 있었어? 왜 한 번도 못 봤지?”“응.”유강후는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온다연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건 질색이었기 때문이다.그러자 나은별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는 온다연과 통화하던 유강후의 말투가 아주 거슬렸다. 함께 자란 사이이니,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았다.유강후는 태생이 냉랭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그가 먼저 온다연의 상황을 알아봤다. 심지어 늦게 돌아간다는 설명과 함께 저녁 식사도 챙겨줬다.사실 나은별은 괘 오래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성인 남녀가 함께 살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유강후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온다연은 그저 며칠 누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나은별이 등장했다.잠시 앉아 있던 그녀는 또다시 비밀 계정에 로그인했다. 오전에 올린 글은 벌써 꽤 화제가 되고 있었다.지금쯤 이효진은 스팸 전화와 문자에 꽤 골치를 앓고 있을 것이다. 온다연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돌려받는 셈이다. 이 생각에 온다연은 속이 후련했다.이효진에 관한 글을 잠시 보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계정을 클릭했다. ‘별&강’이라는 계정이었다.몇백 명의 팔로워가 있는 이 계정은 나은별의 비밀 계정이었다. 이걸 찾으려고 온다연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이 계정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올린 것은 자잘한 일상생활이었다. 그 속에는 유강후의 그림자도 볼 수 있었다.지난번에 올린 사진은 반지를 끼고 있는 나은별의 손이었다. 반지에 새겨져 있는 자그마한 Y는 모든 걸 설명했다.이번에 다시 확인하니 계정의 프로필 사진은 곰돌이로 변해 있었다. 유강후의 프로필 사진과 똑같았다.온다연은 또다시 가슴이 아팠다.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면서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커플 프로필 사진이겠지.’잠시 후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만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나은별이 또 무언가 올린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이 깍지 낀 손을 찍어 올린 사진이었다. 약간 희미하기는 했지만 남자의 중지에 은색 반지가 있는 것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다음 사진에서 두 견지의 옷은 마구잡이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곁에는 힘줄이 튀어나온 팔뚝이 보였다.온다연의 머릿속에는 자동으로 유강후와 나은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봤던 유강후의 모습을 나은별도 똑같이 봤을 것 같았다.원래는 달콤하기만 했던 기억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 그녀는 참다못해 결국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전화 건너편에서는 나은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 씨, 강후는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목소리 중에는 신음도 들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남자는 방에 잘못 들어왔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잠든 온다연을 발견했다.물안개 속에서 자그마한 몸집은 의자에 완전히 담겼다. 비단 같은 머리카락은 몸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남자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시선이 완전히 꽂혔다. 공기 중에 드러난 하얀 다리와 의자 아래로 툭 떨어진 손은 특히 매력적이었다.작은 덩치가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아서 쉬운 인상을 줬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몸을 훑어봤다. 얇은 발목은 한 손으로 잡힐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몸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남자는 예쁜 여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러나 얼굴을 보기 전에도 마음이 끌리는, 정확히 몸이 끌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이곳은 VIP 온천탕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걸 망각할 정도로 온다연이 아름다웠다.그는 휘청거리며 온다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피부는 유독 하얗게 빛났다.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붙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온다연이 울며 애원하는 모습으로 가득했다.가장 놀라운 것은 얇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볼륨이었다. 곁으로 누워서 드러난 얇은 허리 라인도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잡고 싶게 했다.남자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얇은 허리를 잡힌 채 자신에게 매달리는 온다연을 말이다. 취기가 가시지 않는 머리는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했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평생 가장 후회할 결정을 했다. 그는 결국 온다연에게 손을 뻗기로 했다.이제는 그녀가 누구든지 상관없었다. 정 안 되면 결혼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영원에 그가 얻지 못할 여자는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결정을 내린 그는 주저 없이 온다연의 위로 올라타 얼굴에 마구 입을 맞췄다. 한순간 잠을 깬 온다연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포박하며 위로했다.“괜찮아. 괜찮아. 살살할게. 내가 진짜 좋아서 그래. 책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