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표창식에 송하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행사가 끝난 뒤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전우들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들 사이에 유민재도 있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동료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송하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예전처럼 밝아 보였지만 유민재는 알았다.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마치 하룻밤 사이에 순진한 소녀가 억지로 성숙해져 버린 것처럼 그 눈빛에는 외로움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강인함이 서려 있었다.‘고통’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지금 자신의 심정을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가 두 손으로 소중히 떠받들고 품에서 길러낸 아이였다.어릴 적 그녀는 몸이 유난히 약해 늘 한약에 의지해야 했고 쓴맛 때문에 마시길 거부하면 그는 곁에서 함께 마셔주며 달래고 억지로라도 삼키게 했다.낯선 사람만 봐도 울음을 터뜨리던 겁 많은 아이였기에 그는 그녀를 꼭 안아 올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따뜻하게 속삭여 주곤 했다.그녀는 분명 그가 직접 가꾸어낸 장미였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깊어져 있었다.오랜만에 전우들을 만난 송하월은 무척 반가워했지만 속으로는 이번이 아마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라 결심하고 있었다.그녀는 미리 준비한 작은 선물들을 꺼내 나누어주었다.경원시에서 가져온 특산품과 이곳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실용적인 물건들이었다.유민재 역시 선물을 받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 특별함은 전혀 없었다.내내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마치 단순한 상관과 부하 사이의 관계일 뿐 과거의 모든 기억은 이미 스쳐 지나간 바람에 불과한 것처럼.동료들이 떠난 뒤 송하월은 조용히 돼지우리로 향했다.네 마리 돼지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콧김을 뿜으며 부비적거렸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송하월은 가져온 과자 두 상자를 열어 나눠주며 작별을 고했다.“앞으로는 다시 못 보겠지. 너희는 천천히 자라야 오래 살 수 있어.
송하월의 마음속은 저릿하게 아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굳이 안 봐도 돼요. 어차피 앞으로 다시 볼 일도 없을 텐데 그냥 이쯤에서 끝내요.”임정아는 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하지만 너는 어릴 때부터...”송하월은 곧장 말을 이었다.“엄마도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어릴 때 일이에요.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저도 이제는 다 컸어요. 저는 송씨 가문의 딸이에요. 선택지는 얼마든지 있죠. 굳이 한 사람만 붙잡고 매달릴 필요는 없어요. 게다가 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회복하면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도 다시 하고 일도 열심히 할 거예요. 안 되면 아빠 따라 정치 쪽으로 가서 그냥 성실한 공무원으로 살면 되죠.”그러고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덧붙였다.“다만 제 월급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 나중에 예쁜 옷이나 가방 사고 싶으면 엄마랑 아빠가 좀 보태주셔야 해요.”임정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이 녀석 장난꾸러기 같으니. 네 아빠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 잠시 혼자 있어.”임정아가 나간 뒤 송하월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비록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유민재는 결국 그녀가 십수 년 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집착이자 그리움이었다.그런 감정이 하루아침에 마치 끊어내듯 사라질 리 없었다.창밖의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그 순간 유민재가 들어왔다.그의 눈빛은 고통과 안쓰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송하월은 예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어린 티가 남아 있던 볼살도 다 사라지고 손바닥만 한 얼굴은 핼쑥하게 바래 있었다.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며왔다.곽 박사는 그녀의 손이 망가져 이제는 다시 의사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하지만 유민재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유민재는 그녀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해도 이 넓은 기지 안에서 그녀가 설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그는
열여섯째 날 송하월은 마침내 깨어났다.송지원 부부는 유민재가 병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송하월의 뜻이었고 그녀는 유민재를 보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보고 싶어 하지 않자 유민재는 문밖에서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송하월이 중환자실을 나오는 날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곽혜진의 보살핌 덕분에 송하월은 빠르게 회복했다.당시 그녀는 혈액을 거의 모두 잃고 심장과 장기 기능 저하로 인해 죽음에 이를 뻔했다.반면 어깨 부상은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살아남았다 해도 어깨뼈가 부러진 상태라 앞으로 정밀 수술은 할 수 없게 되었다.의학계의 천재 신성 이제 막 궤도에 오른 그녀의 재능은 이렇게 꺼져버린 셈이었다.곽혜진은 그녀의 손상된 신경과 뼈를 복구할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시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찾지 못했다.다행히도 송하월은 마음을 비교적 담담하게 먹었다.“박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정밀 수술을 못 하고 최고의 의사가 되지 못해도 그래도 평범한 의사로 일할 수 있어요. 잊으셨나요? 제가 침구도 잘하잖아요. 그건 어깨를 쓰지 않고 손목만으로도 할 수 있어요. 더 나아가 의사가 안 되더라도 전 송씨 가문의 딸이에요.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죠.”곽혜진은 그녀의 얼굴에 미소를 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너 정말 많이 컸구나.”곽혜진은 여러 번 생각하다가 결국 현실을 말했다.“윗선에서 네 공적에 대한 표창이 나왔어. 2등 공을 받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마 기지에 머물 수 없을 거야. 원하면 내가 너를 내 조수로 남기도록 신청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마 생활 조수 정도가 될 거야...”송하월은 고개를 저었다.“박사님, 저 이미 기지를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여기는 전부 천재급 선수들이잖아요. 저 같은 ‘폐인’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차라리 나가서 다른 걸 배울래요. 의사가 안 되면 다른 일도 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저는 제 길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곽혜진은 마음이 무너졌다.그녀가 가장 아끼던 제자 자신
그녀는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함께 싸운 전우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천천히 멀어져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 헬기가 도착했지만 그때 이미 송하월의 호흡은 극히 미약했다.유민재는 헬기에서 내려온 구조대원을 향해 온몸이 피로 얼룩진 그녀를 안고 달려가며 외쳤다.“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구조대는 곧장 응급 처치를 시작했으나 그녀의 맥박은 이미 희미했다.결국 산소마스크를 씌운 채 기지로 이송되었고 도착했을 때는 호흡조차 멈춘 상태였다.곽혜진이 직접 수술을 집도했다.6시간이 넘는 긴급 수술 동안 송하월의 심장은 여섯 번이나 멎었고 매번 전기 충격으로 간신히 뛰기 시작했다.유민재는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술실 안에서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생애 처음으로‘두려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그 순간만큼은 팀장도 장교도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그는 이제 더 이상 지휘관이 되고 싶지도 장관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오직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송하월이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에‘만약’은 존재하지 않았다.그는 평생 그녀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아마 끝내 용서받지 못할지도 몰랐다.수술을 마친 송하월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곽혜진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의지력에 달려 있었다.잠시 뒤 송지원과 임정아도 달려왔다.임정아는 중환자실 문 앞에 서자마자 가슴이 너무 아파 그대로 쓰러졌고 송지원은 아무 말 없이 긴 벤치에 앉아 한참을 침묵했다.언제나 당당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단숨에 열 살은 늙어버린 듯 보였다.그 앞에서 유민재는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끝내 지키지 못했습니다.”송지원은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차분하지만 깊은 고통이 스며든 목소리로 말했다.“직무의 관점에서 너는 올바른 선택을 했어. 잘못이 없어. 너는 훌륭한 전사고 이번 작전에 대한 상급자의
분명히 자신이 큰 부상자 중 하나였는데 왜 유민재는 여전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상이 덜한 사람에게 양보한 건지 송하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심지어 다치지도 않은 구연진조차 헬기에 올랐다.그녀가 아무리 강하고 용감하다 해도 죽고 싶진 않았다.바로 이 순간 그녀는 유민재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전우였고 그의 책임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아무리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 해도 그녀는 절대로 그의 마음속에서 첫 번째 자리에 있을 수 없다.그는 심지어 자신의 의무 때문에 원래 그녀에게 주어져야 했을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송하월은 그가 전우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행동을 이해했다.그러나 한 여자의 마음으로는 자신을 살릴 기회를 전우에게 내어준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모든 일은 전부 그를 향해 달려온 것이었다.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그녀를 지켜주지 않았다.그녀의 시선이 점점 흐려지며 입술이 미약하게 떨리며 중얼거렸다.“유민재... 예전에 맹세했었잖아...”유민재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눈가를 붉혔다.“그래. 예전에 널 꼭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는데... 내가 지키지 못했어. 미안해, 하월아...”송하월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난 너를 원망하지 않아...”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식어버렸고 앞으로는 더 이상 그를 쫓아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유민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자기 얼굴에 붙였다.“너는 절대 무사할 거야. 다른 구조 헬기가 곧 도착해. 조금만 버텨...”그러나 송하월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고 생명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걸 그녀 자신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두려웠고 무서웠지만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는 이가 아니었다.그녀의 마음은 부모님께 그리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향했다.그들에게 죄송할 뿐이었다.‘겨우 열
유민재와 한 대원은 눈이 뒤집힌 듯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대규모 살상 무기까지 사용할 기세였다.다른 한 대원은 상처를 입은 전우를 필사적으로 안전지대로 끌어내고 있었지만 적의 포격은 점점 거세졌고 더는 선택지가 없었다.그들의 화력을 막지 못하면 곧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잠시 고민하던 유민재가 송하월을 향해 저음으로 외쳤다.“송하월, 나를 보호해 줘.”송하월은 곧장 약품 가방을 내던졌다. 그리고 전우의 총을 움켜쥐고 앞으로 뛰어들었다.두 사람의 첫 협력 전이었지만 놀랍게도 호흡은 완벽했고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싸워온 전우처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 안쪽에서 땅이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폭발 소리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곧이어 요란하던 총성이 뚝 그쳤고 두 사람은 지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유민재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잘 해냈어.”송하월의 얼굴은 흙투성이였고 옷은 찢겨 있었으며 손과 발은 상처투성이였다. 이토록 초라한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달콤하게 벅찼다.수년간의 노력이 드디어 그의 인정을 얻어낸 순간이었다.송하월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한테 뽀뽀해 줘.”유민재의 눈가에 잠시 웃음기가 스쳤다.“지금은 안 돼. 아직 안에 살아 있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전우들도 전부 상처를 입었어. 긴장을 늦추면 안 돼.”그 순간 계곡 입구에서 불쑥 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송하월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유민재에게 몸을 던졌다.“탕, 탕.”연속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한 발은 송하월의 몸을 관통했고 다른 한 발은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극심한 고통에 그녀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고 유민재는 분노에 찬 포효를 터뜨리며 눈이 붉게 충혈됐다.땅에 떨어진 기관단총을 움켜쥔 그는 그 사람을 향해 광폭한 사격을 퍼부었다.그 사람은 총탄 세례를 받아 온몸이 벌집처럼 뚫렸다.곧 다른 전우들이 달려왔다.방금의 사건에 분노로 이글거린 두 사람은 동시에 기관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