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유강후의 모습에 장지현은 기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욕실로 갈까요? 찬물로 샤워하면 조금 나아질 거예요.”장지현은 자신이 벗으면 끄떡없던 유강후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유강후는 단번에 그녀를 밀쳤다.“꺼져.”그러더니 혼자 비틀거리며 욕실로 걸어갔다.찬물을 몸에 잔뜩 끼얹었지만 여전히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심지어 그 욕구가 점점 더 강해져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런데 이때 문득 뭔가가 머릿속에 스쳤다.유강후는 세면대 위에 칫솔을 집더니 단숨에 두 동강 냈다.그 후 옷을 찢어 왼쪽 팔의 어느 특정한 위치를 찾아 주저 없이 세게 그었다.한 번.두 번.세 번.곧 피가 팔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극심한 통증에 유강후는 정신을 조금 차렸지만 뒤따라오던 장지현은 바닥을 가득 채운 피에 겁을 먹었다.유강후가 그녀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단호하고 잔인했다.다량의 약물 투여로 인해 이성을 잃고 덮쳐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려고 자해까지 하니 정말 말이 안 나왔다.장지현은 눈앞의 남자가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탐이 났다.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소용없으니까 제발 그만해요. 약효는 이틀 동안 지속될 거예요. 이런다고 달라질 게 없다고요.”쿵.벽에 부딪힌 장지현은 코피를 쏟기 일보 직전이었다.유강후는 피투성이 된 자리에 대고 다시 여러 번 그었다.너무도 끔찍하고 잔인한 모습에 장지현은 더 이상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아 겁에 잔뜩 질린 채로 가만히 지켜봤다.유강후가 칫솔을 던진 후 상처 난 곳을 손가락으로 파헤치는 건 정말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처로부터 아주 작고 얇은 칩 하나를 꺼냈다.종이에 버금가는 얇은 두께에 손톱의 3분의 1 정도의 크기였다.유강후는 희망을 발견한 듯 눈빛이 반짝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후 얇
장지현은 고개를 숙여 유강후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귀를 찌르는 비명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아파요...”유강후는 칫솔로 장지현의 손등을 세게 찔렀다.어찌나 힘을 썼는지 칫솔이 그녀의 손등을 꿰뚫을 지경이었다.장지현은 극심한 고통으로 거의 실신할뻔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등에 찍힌 칫솔을 빼내더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싸늘하게 말했다.“한 번만 더 다가오면 네 목을 그을거야.”장지현은 겁이 나서 감히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주섬주섬 옷을 챙겨 몸을 가렸다.같은 시각 한옥. 장화연은 유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연히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유재성이 직접 받았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장화연을 덮쳤다.“회장님, 장화연입니다.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요?”유재성은 장화연을 매우 중시했다. 강현미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기에 장화연은 다른 집사나 도우미에 비해 지위가 월등히 높았고 안주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고질병이 도졌을 뿐이야. 큰 문제는 아니고 2, 3일이면 퇴원해.”장화연은 곧바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큰 도련님이 오전에 연락 왔을 때는 회장님께서 뇌출혈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셋째 도련님은 회장님을 만나러 나갔다가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고요.”장화연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셋째 도련님 몸에 이식된 위치 확인 장치가 활성화됐습니다. 신호를 보낸 주소는 유씨 가문의 본가고요. 어떻게 된 일이죠?”“강후는 오늘 병원에 안 왔는데? 집으로 갔나? 그 칩은 지문인식이 되어야 작동되는 건데...”“당장 경호원이랑 헬기 준비해서 본가로 이동해.”장화연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그 후 곧바로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권은 경호원 수십 명과 헬기를 동원해 유씨 가문의 본가로 달려갔다.유재성과 이권의 헬기는 거의 동시에 유씨 가문의 활주로에 착륙했다.유재성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유자성의 따귀를 내리쳤다.“빌어먹을 놈.”이때 강해숙이
유강후의 흰 셔츠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온다연은 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유강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그러나 유강후는 주저 없이 옆으로 밀어내며 버럭 소리쳤다.“꺼져.”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졌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온다연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너무 괴롭고 아팠지만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저 다연이에요.”“나 좀 봐봐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연이라고요.”다연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유강후는 정신을 차린 듯 중얼거렸다.“다연... 정말 너야? 다연아...”너무 괴로워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다.“만져봐요. 나잖아요. 아저씨의 다연이.” 유강후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하... 또 환각이네. 너 그 여자잖아. 당장 꺼져.”곧이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꺼지라고!”환각이 보였다고 착각한 유강후는 칫솔을 집어 들더니 다시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극심한 고통에 경련까지 일어나자 그나마 시야가 또렷해졌다.“다연이네...”그런 그를 보며 온다연은 수만 가지의 감정이 오갔지만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보며 말했다.“병원으로 이송해요. 지금 당장.”경호원 몇 명이 황급히 달려와 유강후을 일으켰다.유강후는 온몸이 피로 물들었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잠깐만요.”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의 옷장에서 옷 한 벌을 꺼내 경호원에게 갈아입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그러다가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꺼져.”장지현은 그제야 꿈에서 깬 듯 벌벌 떨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왜 자해를 할지언정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지 몸소 깨달았다.온다연은 너무 아름다웠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우아한 분위기는 동화 속에서 뛰어나온 인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장지현은
강해숙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를 내며 버럭 호통쳤다.“천박한 X. 네가 없었다면 강후가 이렇게 됐을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강후를 꼬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내 말을 잘 들었을 거야. 유씨 가문의 일에 신경도 안 쓰고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게 다 너 때문이잖아.”오늘 이 일을 겪으면서 온다연은 강해숙에 대한 마지막 인내심까지 잃었다.온다연은 수년 전 집안 도우미에게 들었던 소문들을 언급하며 반박했다.“내연녀를 가장 싫어한다고 늘 말씀하셨죠? 왜요? 바람피운 남편한테 버림받는 신세 되어서 그런가요? 혐오하고 원망하는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나 봐요?”이 말은 의심할 바 없이 강해숙의 상처를 드러내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수십 년 동안 감히 아무도 언급하지 못했다.그 말을 들은 강해숙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고 온다연은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유자성도 추악한 얼굴로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야, 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온다연이 반박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다연 씨, 상대하지 말고 얼른 가요. 도련님 건강이 가장 중요하잖아요.”온다연이 답했다.“곧 따라갈 테니까 아저씨랑 먼저 가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극도로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 유자성을 바라봤다.“유씨 가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서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면 강후 씨가 치료받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건가? 강후 씨가 잘못돼서 혼자 유씨 가문의 모든 걸 상속받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죠?”유자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지나가던 개한테도 괴롭힘당하던 어린 고아 소녀가 지금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말대꾸를 하고 있으니 더욱 분노를 참지 못했다.“우리 형제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했나 봐?”온다연은 피식 웃었다.“갈라놓을 공간이 있었어요? 동생한테 하는 짓을 봐서는 그렇게 각별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유재성을 바라봤다.“저분도 회장님 아들이지만 강후 씨도 회장님 아들이잖아요. 이 일은 강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있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과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고 있었다.게다가 필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선명하게 튀어 오른 걸 보니 여전히 고통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런 그를 보며 온다연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너무 힘들어 보이네요. 고통을 덜어줄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의사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대표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거죠?”곧이어 의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대표님에게 투여된 약은 성 호르몬제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부관계를 갖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은 어리둥절하더니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말을 더듬었다.“최선의 방법인가요?”의사가 답했다.“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귀까지 빨개진 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자 온다연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을 나서 장화연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인 후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연이 돌아왔고 온다연은 그녀에게서 알파벳이 적힌 박스를 건네받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집사님,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세요.”장화연이 떠난 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물을 건네며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졌어요?”유강후는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이 뜨거웠다.온다연을 만지기는커녕 그녀의 향기만 느껴져도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밀려왔다.유강후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피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여기 있지 말고 얼른 나가.”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분명히 자제력을 잃기 십상이니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온다연이 그런 고통에 시달리기를 원하지 않았다.온다연은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안 갈 거예요.”가뜩이나 활활 타오르는 몸에 온다연의 손길이 닿자 마치 경유 한 통을 부은듯 급속도로 불길이 거세졌고 금방이라도 재가될 듯한 느낌이었다.이미 빨갛게 충
유강후는 인생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했다.“내려가.”온다연은 주저 없이 팔을 뻗어 그의 벨트를 풀었고 두 손을 그의 허리에 얹었다.“싫어요. 안 내려갈 거예요. 난 아저씨의 여자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밀어내요?”온다연의 손길에 유강후의 몸은 더욱 활활 불타올랐지만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 지금 이상해. 시작하면 절대 자제하지 못할 거야. 네가 다치게 될 수도...”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손에는 하얀 박스가 들려있었고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안에 여덟 개 들어있어요. 능력 있으면 오늘 다 써보든가.”박력 있게 말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더불어 어느새 그녀의 목도 핑크빛으로 물들었다.어쩌면 이번 생에 한 일 중에서 가장 상식을 벗어난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비로소 유강후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이제는 온다연을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유강후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목을 잡았다.“다연아, 너 다칠 수도 있어.”온다연은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괜찮아요. 두렵지 않거든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온다연은 번쩍 안았고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유강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박스를 뜯더니 난폭하게 안에서 하나를 꺼내고선 온다연의 입가로 가져갔다.“뜯어. 나한테 끼워줘.”온다연은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완전히 자제력을 잃기 전 유강후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다연아, 예전처럼 부드럽게 못 할 수도 있어. 정말 아프거나 견디기 힘들면 나 때리고 밀쳐내.”사실 온다연도 조금 겁이 났지만 물러서지 않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참지 마요. 왜 시작하기도 전에 겁부터 먹어요? 자신 없어서 그러는 건가?”그 말은 유강후의 이성을 완전히 잃게 했다.공기 중에는 므흣한 분위기가 흘렀고 곧이어 침대가 부딪치는 소
고개를 숙인 온다연은 착잡한 눈빛이었다.곧이어 장화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큰 도련님이 어젯밤부터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일단 올라오지 못하게 저희가 경호원을 대동해 막았습니다.”온다연의 눈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절대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요. 아저씨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화연이 답했다.“알겠어요.”잠시 후 온다연은 아이 방으로 향했다.아이는 이미 7개월이 넘은 상태였고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전히 인큐베이터에 있었다.아이는 온다연의 소리에 반응한 듯 손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고 뽀뽀를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림아, 엄마 왔어.”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큰다지만 상상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는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이제는 정상적인 피부로 돌아왔고 이목구비도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래도 아이를 지켜냈다는 현실에 온다연은 이미 매우 만족했다.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우림아, 우리 며칠만 더 있다가 집으로 가자.”“앞으로 우림이는 엄마랑 같이 지내는 거야. 알겠지?”...방에서 나온 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냈다.영상을 올린 이후로 핸드폰을 만지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어제 오후와 저녁이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기에 분명히 반응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자마자 엄청난 양의 게시물과 댓글이 쏟아져 나왔다.게다가 어제 올린 영상은 백만 번이나 리트윗되었다.하지만 실검에는 오르지 못했다.분명히 누군가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다른 수단을 동원한 게 틀림없다.모든 영상에는 수백만 개의 좋아요와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렸고 하룻밤 사이에 새 계정의 팔로워가 300만에 달했다.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뜨거웠다.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고 댓글 창을 눌렀다.[세상에나. 가해자가 피해자로 된 거네? 이게 실화
온다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내려가서 상황 좀 볼게요.”온다연이 손해 볼까 봐 걱정됐던 장화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경호원 수십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 절대 여기까지 못 올라올 거예요.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요.”장화연이 누굴 욕하는 걸 처음 들은 온다연은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하면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분노에 찬 강해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유강후는 내 손자야. 손자 보러 왔는데 너희들이 뭔데 허락하나 마나야.”“당장 비켜.”“어르신, 대표님께서 유씨 가문은 아무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저희도 이게 직업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르신이 들어가는 순간 저희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릅니다.”“강후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분명히 그 미친 X이 옆에서 시켰을 거야. 우리 강후가 지금 저렇게 된 게 다 걔때문이잖아.”...온다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말했다.“욕쟁이 할머니가 따로 없네요. 입 안 아파요?”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과 조롱이 배어 있었다.강해숙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어제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무례한 말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오늘은 경호원들에게 저지당해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으니 이번 생에 가장 면목 없는 순간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강해숙은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원인이 온다연이라고 확신했다.온다연이 아니었다면 유하령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민준도 갑자기 사생아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들과 동등한 가문의 아가씨들은 감히 아무도 유씨 가문에 시집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오자마자 새엄마가 되는 신세인데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강해숙은 온다연이 유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에 앉으려고 유강후를 꼬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유강후가 가족들과 멀어진 가장 큰 원인이 온다연이라고 확신했다.유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