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랑 같이 잤던 걸 생각하면 역겨워요!”유강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온다연, 방금 한 말 당장 취소해.”그러나 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왜 내가 취소해야 하죠? 그런 짓들 아저씨가 다 해놓고 난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저씨는 본인이 안 더럽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랑 잤던 걸 떠올리면 토하고 싶어요!”분노로 인해 유강후는 손이 떨릴 정도였다.분명 아이를 챙기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분노를 터뜨리며 막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주한의 옛집에 다녀온 뒤로 완전히 달라졌다.‘주희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변한 거야?’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더럽다고? 나랑 같이 있었던 기억이 역겹다고?”“며칠 전 내 밑에서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던 사람이 누군데?”이 말은 칼처럼 온다연의 가슴에 박혔다.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순간, 그녀는 치욕감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속이고 가지고 놀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했던 것이다.이를 악문 채 온다연은 낮게 외쳤다.“그따위 기술로? 날 즐겁게 했다고요? 역겨워요!”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강후는 순식간에 그녀를 침대 가장자리로 밀쳐 눕혔다.그러자 깜짝 놀란 온다연이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문밖에 경호원이 있다고요!”하지만 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거칠게 그녀의 옷을 벗겼다.온다연은 문이 열려 있다고 착각한 채로 계속해서 격렬히 저항했다.그녀의 반항은 그의 독점 욕구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결국 그녀는 유강후의 거친 욕망에 굴복해야 했다.짧은 폭력적인 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모두 지쳐 침묵 속에 잠겼다.온다연은 몸을 떨며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린 채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유강후는 피로 물든 어깨에서 통증을 느끼며 옷을 여몄다.곧 바닥에 꽂혀 있는 칼을 보고 그는 문을 열어 경호원에게 명령했다.“
“온준휘 씨가 골든 타임을 놓쳤습니다. 방금 호흡이 갑자기 멈췄고... 아마도 살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인평 병원에서 최고 실력을 가진 의사를 데려오라고 했잖아!”비서는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었다.“온준휘 씨가 온준용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대표님이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조금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까 대표님께서... 사모님 병실 앞에서 말씀하신 거로 모두들 대표님이 치료를 하지 말라고 한 줄로...”“이 멍청한 놈들!”유강후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내가 언제 치료하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겁에 질린 비서는 몸을 떨며 대답했다.“아까... 사모님 병실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들렸습니다...”“말도 안 돼!”유강후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응급실로 향했다.“구해! 만약 살리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책임을 묻는지 두고 보라고!”그가 응급실 문에 도착했을 때, 의사가 막 나온 참이었다.유강후는 그를 붙잡으며 다그쳤다.“무슨 상황이에요?”그러자 의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번에는 겨우 살렸습니다. 하지만 방금 뇌출혈 증상이 추가로 발생했습니다...”유강후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다른 의사들을 추가로 데려와요. 인평 병원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당장 모셔 오라고요!”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소용이 없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보내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그 순간, 간호사가 급히 나와 말했다.“교수님, 환자가 누나를 보고 싶어 합니다. 누나분 여기 계신가요? 연락할까요? 제가 보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안색이 굳어진 채로 유강후는 비서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다연이 데리고 와.”이렇게 말한 뒤, 그는 직접 응급실로 들어갔다.침대에 누운 소년은 이미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고 마지막 힘을 다해 유강후를 바라보았다.그가 온 것을 확인한 소년의 눈에는 실망감이
“아빠랑 이모가 말하시는 거 몰래 들은 적이 있어요. 누, 누나는 어쩌면 아빠의...”갑자기 그의 입에서 대량의 피가 쏟아지며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온다연은 온준휘가 이상해진 것을 감지하고 급히 물었다.“많이 힘들어? 괜찮아?”그러고는 문 쪽으로 돌아서며 소리쳤다.“의사! 의사 선생님 빨리 와주세요!”온준휘는 힘겹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누, 누나는... 아마도...”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그는 겨우 힘을 짜내며 말했다.“친자식... 이... 아닐 수도... 새...”그러다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다해 외쳤다.“나를 도와... 우리 엄마를... 구해줘요...”그리고 힘겹게 이어진 그의 마지막 말.“세상은 너무 괴로워요. 누나. 나, 나...”온다연이 말문을 열기도 전에 소년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바로 그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상황을 확인한 의료진은 온준휘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문밖에 살아있는 ‘악마 같은 존재’가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손을 댈 수 없었다.혼란스러운 응급처치가 이어졌고 결국 병실은 조용해졌다.의사는 온다연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온다연은 의료진의 응급처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진 못했지만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었다.그녀는 온준휘에게 큰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소년은 온준용이 온다연을 때릴 때 자신의 작은 몸으로 그녀를 보호했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악마 같은 온준용과 몸싸움을 벌였다.‘분명 살릴 수 있었어. 근데 왜?’온다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살리지 못한 건가요? 분명 그렇게 심한 부상은 아니었잖아요...”그러자 의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최적의 응급처치 시간을 놓쳤습니다. 많은 일들이... 저희의 통제를 벗어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그때 유강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온다연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사람들은
온다연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몇 명의 간호사가 그녀 곁을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도 않았잖아.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는데.”“위에서 압박이 들어와서 못 살리게 했다더라. 불쌍해. 아마 누군가를 잘못 건드린 거겠지.”“듣자 하니 유 대표님이 그렇게 지시했다던데...”“조심해. 이런 말 하다가 들키면 일자리 잃을 수도 있어.”“정말 끔찍해. 고작 열세네 살 아이가 누나를 지키려다가 자기 친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니.”“그리고 또 죽은 사람이 친아버지라던데, 혈액에서 대량의 알코올이 나왔대. 술 먹고 폭주했겠지.”“돈 많은 사람들이란... 어린애까지 이렇게 잔인하게 다루다니.”“그만 말하고 빨리 가자.”...간호사들의 대화 소리가 점차 멀어졌고 복도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따뜻했지만 온다연의 온몸은 차가워 떨고 있었다.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만큼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등은 금세 식은땀으로 젖었다.‘이게 진실이었던 거야?!’온준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그는 분명 살아날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살리게 두지 않았다.그래서 응급처치의 황금시간을 놓친 것이었다!하지만 소년은 아직 어렸다.제대로 성장할 기회도 없이 생명을 빼앗겨 버렸다.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와 다를 바 없는 살인자임을 깨닫고 고통에 몸부림쳤다.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와 분노로 가득 차 속으로 외쳤다.‘차라리 그때 유강후의 심장을 찔러버렸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진정한 악마인데!’바로 그때, 유강후가 전화를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는 그녀의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온다연은 갑자기 폭발하듯 소리쳤다.“꺼져, 이 악마야!”“유강후,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유강후는 몸이 굳어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뭐라고 했어?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라고?”
하지만 온다연의 눈에는 흐릿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몇 걸음 달리자마자 바닥에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쓰러졌다.유강후는 이런 온다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만해. 준휘는 이미 죽었어!”온다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놔! 유강후, 이건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만든 결과라고!”“당신이 사람들한테 막으라고 했잖아!”“다 당신 때문이야!”“놓으라고!”곧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내 잘못 있어. 내가 정확히 지시하지 않아서 아래 사람들이 내가 준휘를 싫어한다고 오해했고 그것 때문에 응급처치 타이밍을 놓쳤어.”“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나는 그 애가 죽길 원한 게 아니라고!”“너희 아버지조차도 살릴 의도가 없었던 적은 없어!”“온다연, 정신 좀 차려!”하지만 온다연은 이미 감정이 폭발해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유강후, 당신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당신의 말 한마디, 심지어 한 문장부호조차 믿지 않아!”“꺼져, 밖에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들 많잖아. 나한테 집착하지 마. 이제 당신한테 마음 줄 일은 없어!”“비켜!”그녀는 울면서 소리쳤고 목소리는 이미 쉰 상태였다.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울다 보니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이 더 나빠질까 두려워 그녀의 손발을 제압했다.그리고 의사에게 신호를 보내 진정제를 주사하도록 지시했다.차가운 약물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자 온다연은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유강후, 또 나한테 뭐 주사했어?”“날 뭐로 보는 거야? 아이 낳는 기계? 아니면 애완동물?”“이렇게 대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증오할지 알아?”“놓으라고!”“준휘야... 누나가 정말 미안해...”...결국 두 번의 진정제를 맞은 뒤 온다연은 힘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인평 병원의 큰 병실 안이었다.의사가 다른 약물도 주사했는지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차는 장례식장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온다연은 창밖으로 보이는 복잡한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공허함으로 물들었다.이 도시에서 21년을 살며 거의 떠나본 적이 없었지만 이곳은 그녀를 키워준 곳이자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안겨준 곳이었다.이토록 화려한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악이 생겨나는 걸까?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연약한 이들에게 손을 뻗어 상처를 주는 걸까?그들의 삶과 생명을 조종하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는 걸까?그녀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걸 가지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하지만 설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악마 중 하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유강후는 그녀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온준휘의 생명을 끊었다.악귀들과 다를 바 없었다.아니, 어쩌면 더 끔찍했다!그 사람들은 온다연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주었고 그들의 악은 망설임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증오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준 것은 그녀의 뼛속까지 각인되게 만들 철저히 계획된 고통과 기만이었다.그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흘러나왔다.‘그 사람이 좋아했던 게 이 얼굴이지. 그 여자의 얼굴이 이랬으니 내 얼굴도 비슷해서 끌렸던 거겠지. 취향이 정말 변함없네. 이 얼굴이 망가진다면 그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여전히 다정한 척하며 날 기쁘게 하려고 애쓸까?’그때 뒤따라오던 경호원이 전화를 받더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동교 묘지로 바로 가세요.”묘지에 도착하자 유강후가 검은 정장을 입고 어머니 묘비 앞에 서 있는게 보였다.그의 뒤에는 경호원 두 명이 각각 유골함을 들고 있었다.온다연이 다가오자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 오늘 눈은 좀 보여?”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의
“그만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온다연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어떻게 해야 내 아이를 찾고 이 악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증오했던 적이 없었다.유강후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그녀는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었다.아이는 이미 그의 손에 넘어갔고 온다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맞서 싸울 용기도 없었다.‘무엇을 카드로 삼아야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을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튼 지금 상황은 이런데 넌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 수 있을지 말해줘. 계속 이렇게 버티면 나도 힘들어.”온다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얼굴은 그녀가 본 얼굴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이었다.하지만 이 얼굴의 주인은 심장이 없었다.아니, 심장은 있었다.그저 온다연을 위한 심장이 아니었을 뿐이다.‘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내가 멍청하게 믿고 따라갔으니까.’“사람 목숨은 아저씨한테 중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고통받는 건 아저씨 자신이 아니니까!”유강후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온다연의 영혼까지 꿰뚫으려는 듯 말이다.“온다연,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도 괴로워.”그러나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괴롭다고요? 아저씨는 쉽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잖아요. 근데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무자비해요?”유하령의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고 그녀를 비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곧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말했다.“다연아, 유자성의 뒤에는 우리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는 내가 형과 대립하는 거로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갔어. 내가 직접 손
온다연은 체구가 작고 연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반면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다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교통경찰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믿게 되었다.교통경찰은 곧바로 말했다.“혹시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저희는 부부입니다. 지금 말다툼 중이니 제발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바로 외쳤다.“아니에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관님, 저 도와주세요!”이 말을 끝내자마자 온다연은 힘껏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일단 검문에 협조해 주시죠!”이미 육교 위로 올라가고 있는 온다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강후는 경찰을 매몰차게 밀치며 말했다.“비켜!”이 말에 경찰들도 얼굴빛이 바뀌며 강경하게 그를 붙잡았다.“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경찰서로 모셔야겠습니다!”이때 뒤따라온 경호원들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와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죄송합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되돌려주며 말했다.“다음부터는 주차나 정차를 신중히 하세요.”하지만 그사이 온다연은 이미 육교 중간에 서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따라가. 놓치지 말고!”그러나 이곳은 번화가였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경호원이 뒤쫓아 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맞은편 쇼핑몰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두 시간 후, 온다연은 시 외곽의 한 영상 제작소 대형 세트장에 나타났다.그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임정아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밀크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그 사람, 인간도 아니에요!”“다연 씨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니... 다연 씨를 뭘로 본 거예요?”“전화했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요!”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