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온다연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어떻게 해야 내 아이를 찾고 이 악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증오했던 적이 없었다.유강후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그녀는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었다.아이는 이미 그의 손에 넘어갔고 온다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맞서 싸울 용기도 없었다.‘무엇을 카드로 삼아야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을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튼 지금 상황은 이런데 넌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 수 있을지 말해줘. 계속 이렇게 버티면 나도 힘들어.”온다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얼굴은 그녀가 본 얼굴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이었다.하지만 이 얼굴의 주인은 심장이 없었다.아니, 심장은 있었다.그저 온다연을 위한 심장이 아니었을 뿐이다.‘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내가 멍청하게 믿고 따라갔으니까.’“사람 목숨은 아저씨한테 중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고통받는 건 아저씨 자신이 아니니까!”유강후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온다연의 영혼까지 꿰뚫으려는 듯 말이다.“온다연,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도 괴로워.”그러나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괴롭다고요? 아저씨는 쉽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잖아요. 근데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무자비해요?”유하령의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고 그녀를 비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곧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말했다.“다연아, 유자성의 뒤에는 우리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는 내가 형과 대립하는 거로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갔어. 내가 직접 손
온다연은 체구가 작고 연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반면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다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교통경찰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믿게 되었다.교통경찰은 곧바로 말했다.“혹시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저희는 부부입니다. 지금 말다툼 중이니 제발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바로 외쳤다.“아니에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관님, 저 도와주세요!”이 말을 끝내자마자 온다연은 힘껏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일단 검문에 협조해 주시죠!”이미 육교 위로 올라가고 있는 온다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강후는 경찰을 매몰차게 밀치며 말했다.“비켜!”이 말에 경찰들도 얼굴빛이 바뀌며 강경하게 그를 붙잡았다.“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경찰서로 모셔야겠습니다!”이때 뒤따라온 경호원들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와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죄송합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되돌려주며 말했다.“다음부터는 주차나 정차를 신중히 하세요.”하지만 그사이 온다연은 이미 육교 중간에 서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따라가. 놓치지 말고!”그러나 이곳은 번화가였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경호원이 뒤쫓아 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맞은편 쇼핑몰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두 시간 후, 온다연은 시 외곽의 한 영상 제작소 대형 세트장에 나타났다.그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임정아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밀크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그 사람, 인간도 아니에요!”“다연 씨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니... 다연 씨를 뭘로 본 거예요?”“전화했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요!”
그러다 임정아는 갑작스레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다연 씨!”그 순간, 온다연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고 얼굴은 유령처럼 새하얘졌다.임정아는 다급히 다가가며 말했다.“뭐가 이렇게 급해요! 그냥 가능성을 말한 거지 사실이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창백한 얼굴을 한 채 뒤이어 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정아 씨, 함부로 말하지 마요. 내 아이는 살아 있어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이지...”눈앞이 깜깜해져 휘청거리더니 온다연의 몸은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흔들렸다.“내가 데려올 거예요. 반드시...”이 말을 끝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임정아는 깜짝 놀라 외쳤다.“여기! 빨리 119 좀 불러줘요!”그러자 임정아의 매니저가 급히 들어와 온다연을 부축하며 바깥으로 옮겼다.이때, 옆에서 구경하던 여배우 한 명이 온다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어머, 이 사람 내 그 싸구려 동생이 말하던 여자친구 아니야? 왜 쓰러졌지?”그러면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염지훈, 네가 찾아다니던 여자친구...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정보비는 2억, 한 푼도 깎지 마!”...온다연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방은 깨끗하고 밝았으며 침대 머리맡에는 백합꽃이 꽂혀 있었다.창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엔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온다연이 깨어난 것을 보자 그는 본래의 태도를 되찾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가 그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했다.“깼네?”염지훈은 다가와 뜨거운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물 좀 마셔.”온다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왜 여기 있어요?”염지훈은 살짝 비웃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 지도교수가 그러더라. 휴학했다면서. 잘 다니던 학교를 왜 갑자기 휴학한 거야? 혹시 유강후가 널 가둬뒀어?”유강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온다연의
“짝!”다음 순간, 강렬한 뺨 소리가 울리며 온다연의 손바닥이 염지훈의 얼굴에 꽂혔다.거의 모든 힘을 쏟아 때린 탓에 염지훈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염지훈은 손으로 상처를 닦으며 혀를 차고 말했다.“꽤 달콤하네.”분노가 차오른 온다연은 펄쩍 날뛰며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미쳤어요?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입술이 닳도록 씻은 뒤에야 다시 나왔다.그러자 염지훈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단지 한 번 스친 것뿐인데 그렇게 날 싫어할 필요 있어?”온다연은 문을 가리키며 낮게 소리쳤다.“나가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 그 사람은 네가 그렇게 할 가치가 없어.”“뒷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알려주는 거야. 그 사람이 한 짓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온다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나와 그 사람의 문제지 지훈 씨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염지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온다연은 다시 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외쳤다.“나가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염지훈 씨,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유강후 씨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염지훈 씨를 좋아할 일은 없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로요.”순간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염지훈의 눈빛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여?”온다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말했다.“나가라니까요. 내 말 안 들려요?”“온다연!”갑자기 염지훈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나랑 같이 가자. 내가 너를 이 도시에서 데리고 나갈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줄게. 유강후, 그놈 곁에...”끝내 그는 말을 멈췄다.온다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어쨌든 그놈은 자격이 없어.”이번에 온다연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내리깔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에서 싸움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유강후는 낮게 포효했다.“나가! 이건 우리 두 사람 일이야. 너희들은 끼어들지 마!”염지훈은 비웃으며 말했다.“의외로 남자답게 행동할 때도 있네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 손목을 한 번 돌렸다.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조금씩 풀어냈다.오랜만에 이런 싸움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오늘 이 방 안에서 유강후와 염지훈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쓰러질 것이었다.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유강후 자신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염지훈이 반응할 틈도 없이 유강후는 표범처럼 그에게 덤벼들었다.염지훈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강렬한 펀치를 한 대 맞고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들은 방 안에서 두 명의 권위 높은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아무도 싸움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한참 뒤, 유강후가 간신히 우위를 점했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일어서며 염지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이, 내가 이미 경고했지. 다연이는 네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다시 다연이한테 다가가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염지훈은 피를 뱉어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오늘 겨우 이겼다고 승리한 줄 알아요? 웃기지 마요. 그쪽은 다연이 옆에 설 자격이 없으니까. 그쪽이 하는 사랑은 결국 다연이를 가두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학교에 보내면서도 다연이가 금융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모든 금융 수업을 끊어버린 것. 다연이의 그림을 대가들이 감탄했을 때, 그 대가들의 전시 제안을 막아버린 것. 이런 것들은 다연이에게조차 숨긴 게 바로 그쪽이에요.”“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연이의 날개를 꺾고 깃털을 뽑아버리며 그쪽 곁에만 묶어두려 한 거죠. 개인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서.”“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은별의 집안에 대
염지훈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유씨 가문에서 지내온 세월 동안, 다연이는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어요. 그게 다 당신 덕분이고요. 유강후 씨,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때 다연이를 괴롭힌 사람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한들, 당신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으니까!”그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냉소적으로 덧붙였다.“열세 살이던 해에, 심미진이 다연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던 걸 당신이 막았잖아요. 강제로 다연이를 남게 했었죠. 그런데 남게 한 다음엔 뭘 했죠? 방치하고 대놓고 유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더 큰 괴롭힘을 받게 만들었잖아요!”“유강후 씨,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그는 천천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잖아요. 온준용이 다연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이용해서 다연이를 자기 곁에 가두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다연이가 그렇게 아름다운 건 다연이의 유전자가 특별하기 때문이겠죠. 다연이의 친부모를 찾아주면, 그 사람들이 다연이의 편에 서서 다연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까 봐, 그래서 다연이가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날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요!”그러자 눈빛이 싸늘해지며 유강후가 말했다.“염지훈, 오늘 여기서 죽고 싶은 거야? 입 닥쳐!”하지만 염지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뭐예요, 내가 당신 약점 건드리니까 심장이 떨려요? 겁나요?”“유강후 씨, 정말 잘도 계획했네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 꿈은 곧 끝나게 될 겁니다.”“그리고 난 당신과 달라요. 나는 다연이를 데려가서 당신 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겁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단호히 말했다.“난 다연이를 존중해 줄 거예요. 자유를 줄 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응원할 거예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새로운 삶을 탐험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당신처럼 병적으로 다연이를 가둬두는 짓은 하지 않고요.”그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닿았다.유강후는
유강후는 자신이 그녀를 더 많이 바라보다가 위험한 감정이 깊어질까 두려워 일부러 유씨 가문을 떠나 따로 거처를 마련했었다.심미진이 그래도 친이모였기에 온다연에게 큰 관심을 주진 못해도 가볍게 잔소리를 들을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유하령과 그 무리들이 그렇게 잔인할 줄은 유강후도 몰랐다.그는 자신이 정말로 큰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끔찍할 만큼 잘못된 판단이었다.염지훈의 말 중 하나는 또 맞았다.온준용이 그녀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깊게 파헤치지 않았다.온다연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녀가 이 생에서 의지해야 할 사람은 원래부터 부모가 아니었다.그녀의 세상에는 오직 그만이 있어야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두고 간 외투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말이다.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정아는 온다연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가는 길에 별장 근처에 있는 미용실의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을 본 온다연이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한참 동안 유리창을 바라보더니 낮게 말했다.“정아 씨, 나 이 미용실에 들어가고 싶어요.”임정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참 신기하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미용을 하고 싶어 하다니.”그러면서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뺨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얼굴이 이렇게 예쁘고 탱탱한데, 미용 스타들도 다 이길 것 같은데 굳이 뭐하러 가요?”하지만 온다연은 대꾸하지 않고 미용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그러고는 자신을 반기러 온 미용사에게 말했다.“작은 시술을 받고 싶어요.”뒤이어 온다연은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여기에 작은 점이 있는데 없애주세요.”미용사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있는 바늘구멍만큼 작은 점을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점은 굉장히 작고 위치도 참 좋네요. 미모를 방해하기는커녕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주는걸요. 없앨 필요가 없어요!”그때, 안으로 들
그러고는 아쉬운 듯 말했다.“입술 위의 그 작은 점, 정말 아쉽네요. 사실 굉장히 매력적이었는데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느낌이었거든요. 이제 없어지니까 좀 어색해요!”“근데 말이에요...”임정아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요즘 우리 사이에서 눈가 밑에 작은 눈물점 찍는 게 유행이거든요. 뭔가 절망에 빠진 것 같은 감성이 있는데 다연 씨처럼 이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한테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온다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랑 안 어울려요.”임정아는 온다연의 얼굴을 억지로 돌려 정면을 바라보게 하며 말했다.“하려면 확실히 바꿔야죠. 게다가 이건 그냥 화장을 하는 정도예요. 약물 효과가 두세 달 정도밖에 안 가니까 시간이 지나면 점도 자연스럽게 흐려질 거예요.”온다연은 결국 묵묵히 동의했다.미용실에서 나온 뒤 온다연은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어깨에 닿는 짧은 머리는 그녀를 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 만들어 딱 고등학생 같은 느낌을 줬다.그런데 새로 찍은 눈가의 작은 점이 얼굴 전체에 묘한 매력을 더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임정아는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배우를 안 한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이 얼굴을 사람들에게 안 보여준다는 건 완전 재능 낭비라니까요?!”“있잖아요, 배우 해볼 생각 없어요? 내가 보장하는데 지금의 주혜성보다 훨씬 더 뜰 거예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다연 씨 팬이 될걸요?”그러나 온다연은 살짝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쉴 수 있는 곳 좀 찾아줄래요? 잠깐만이라도 자고 싶어요.”임정아는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가요.”그날 온다연은 저녁이 될 때까지 푹 잠들었다.눈을 뜨자마자 임정아는 그녀를 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온다연은 처음으로 연예인의 드레스룸을 보게 되었고 그 규모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수백 평에 달하는 공간은 각종 명품 브랜드의 최신 시즌 의상들로 가득 차 있었고 화려한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