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람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서도 두 시간 동안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얼굴이 빨개져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유강후가 아니다.“어떻게 사람이 뭐요?”온다연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유강후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말해봐요. 뭘 물어보려고 했어요?”얼굴이 확 달아오른 온다연은 입술을 깨문 채 그의 질문을 피했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감싸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좋았는지 말해봐요.”온다연은 너무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유강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만족했어요?”온다연은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그러자 유강후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힘을 좀 자제했더니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네요.”그렇게 말하며 유강후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까라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온다연의 몸은 여전히 매우 예민했고 유강후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부들부들 떨려 주체할 수가 없었다.손이 그곳에 닿고서야 온다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만족했어요. 엄청 만족해요.”유강후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치더니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는 온다연의 옷을 다시 정리 해주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피곤하죠? 좀 쉬어요.”온다연은 정말 피곤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몇 시간 동안 시달렸으니 극도로 지쳐 있었다.게다가 주위가 온통 유강후의 기운으로 가득 차서 더없이 안심되었고 몸이 나른해졌다.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유강후를 옆에 눕히고 그의 품으로 들어가 심장 소리를 들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이권이 들어왔을 때, 유강후는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며 다른 한 손으로 품에 안긴 온다연을 조심스럽게 토닥이고 있었다.문을 여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곧바로 싸늘한 눈빛이 이권에게 떨어졌다.등골이 오싹해진 이권은 천천히 문을 닫고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유강후에게 말했다.“어르신의 건강이
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투자하면서 전폭 지지해. 모든 것이 준비되고 개봉이 임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는 거야. 그럼 그 영화는 평생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거야.”이권이 답했다.“화가 나서 미칠 게 분명합니다. 지난 3년 동안 나은별 씨가 이루려던 모든 것들이 성공의 빛을 보기 전에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제 남은 건 나씨 가문이라는 빈껍데기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장 하나를 팔아 영화에 투자한 걸 보면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그러자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그럼 혹할만한 조건을 많이 제시해 봐. 그래야 영화가 망했을 때 타격감이 크지 않겠어?”“명심해. 절대 쉽게 죽여서는 안 돼. 너무 쉽게 죽으면 시시하잖아.”이권이 말했다.“그럼 소이섭 씨는...”유강후의 눈에는 분노가 번쩍였다.“걔는 다연의 손에 놀아날 자격조차 없는 놈이야. 나은별과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게 좋겠어.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 아무리 생각해도 나은별이 직접 처리하는 게 답이야. 좋아하는 사람의 손에 죽게 된다면 소이섭도 만족할 거야.”이권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난 2년 동안 유강후는 더욱 냉혹해졌다.예전에는 그래도 정을 중요시했지만 온다연이 떠난 이후로 그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다.“아참, 회장님 생신이 곧 다가오시는데 북아메리카로 돌아가실 건가요?”이때 온다연이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시끄러워요.”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돌아가야지. 시간 빼놔.”“다연이도 같이 갈 거니까 집 인테리어 싹 다 바꿔. 셰프랑 도우미는 국내에서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믿을 만한 사람으로.”“메뉴는 레시피까지 전부 프린트해서 나한테 보여주고 옷이랑 생활용품도 설명서까지 사진 찍어서 나한테 검사받아.”“알겠습니다. 도련님.”이권이 떠나기 전에 유강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절대 실수해서는 안 돼. 강씨 가문은 규모가 큰 만큼 속셈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너무
예를 들면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입술이 왜 이렇게 부드러운지, 몸에서 나는 향기는 왜 이렇게 좋은지, 어떤 향수를 쓰고 있는지 모든 게 궁금했다.정장을 입은 모습은 잘생기기 그지없었고 복근은 물론이며 몸 곳곳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이런 남자를 롤모델로 삼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니 어느새 얼굴은 또다시 화끈 달아올랐고 어쩔 수 없이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척했다.유강후는 자연스레 그 옆에 누웠고 그녀를 품에 안고선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푹 자요. 깨울 사람 없을 거예요.”서로를 방해하지 않자 두 사람은 어느새 꿈속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은 이번에도 꿈속에서 두 아이를 만났다.아이들은 예쁜 옷을 입은 채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해바라기 꽃밭에서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온다연이 몸을 숙여 팔을 뻗자 남자아이가 그녀의 품에 들어왔다.“엄마, 드디어 우리를 데리러 오셨네요?”“새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예쁘죠?”온다연은 남자아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끌어안았다.“우리 아들은 뭘 입어도 예뻐.”그러자 남자 아이는 온다연의 옷을 잡아당기더니 나지막이 귓속말했다.“동생이랑 같이 왔어요. 동생도 안아줘요.”고개를 들자 잔뜩 긴장한 채로 옆에 서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자신의 치마를 꽉 움켜쥐었는데 사슴 같은 눈망울은 은하수를 담고 있는 듯 더없이 반짝이며 눈부셨다.온다연은 곧바로 아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아가야. 얼른 엄마한테 와.”그러자 여자아이는 미소를 활짝 지으며 엄마의 품으로 달려갔다.“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온다연은 울컥하는 감정을 억제하며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래의 내 아이들인가?’이때 남자아이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눈을 반짝였다.“엄마, 저기 봐봐요. 아빠가 유치원에 데리러 왔네요. 저도 아빠처럼 저렇게 클 거예요. 너무 멋있어요.”온다연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역광 속에서 유강후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흰 셔
그는 두 아이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고 자신의 눈물이 이렇게 아무 쓸모도 없을 줄 몰랐다. 두 아이가 그의 옷을 잡고 엄마를 찾으러 가자고 할 때에야 그는 두 아이의 옷이 예쁜 작은 옷으로 변했고 얼굴도 어느새 깔끔하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은 모습을 한 남자아이와 진유나를 쏙 빼닮은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자 그는 또다시 울컥했다.두 아이에 이끌려 진유나 옆으로 다가가자 진유나는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지금 이 순간, 그는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창문을 통해 불어와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그들이 이토록 비슷한 꿈을 꾸고 있는 걸 아무도 몰랐고 그들이 꿈꾸며 눈물을 흘린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달콤한 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갔다.한 달 후, 유강후의 몸이 완쾌되자 이권은 셋째 도련님의 소도 때려죽일 만큼 건강한 모습에 걱정이 앞섰다. 더 이상 아픈 척 연기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이렇게 안색이 좋고 정신상태도 좋은 환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하지만 유강후는 진유나의 보살핌을 계속해서 받고 싶은 속셈이 가득했기에 계속 연기를 이어가야만 했다. 누가 누구를 보살피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너무 빨리 회복되면 안 되니까 방법을 좀 생각해 봐. 곽 선생한테 전화 걸어서 좀 늦게 회복되는 약이 없냐고 한번 물어봐. 되도록 한 반년쯤 걸리는 그런 약으로. 있으면 가서 좀 가져와.”“이미 여쭤봤어요. 곽 선생께서 화를 내시면서 빨리 죽는 약은 있는데 드시겠냐고 하더라고요.”유강후는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돌팔이 의사 같으니라고!”그러고는 이내 다시 물었다. “나 진짜로 다 나아 보여? 진짜 환자 같지 않아?”이권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게다가 곽 선생님께서 주신 연고를 바르시고 나서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아물고 있어요. 만약에 계속 입원하고 있으면 진 선생께서 꾀병을 부리는 것을 알아채고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돼요.”유강후는 고뇌했다. “정말로 아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유나 씨가 오랫동안 곁에 없어서 그래요. 여기도 아파요.”진유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온 지 네시간밖에 안 되는데요?”유강후는 휴대폰을 한번 보고는 진유나의 말을 정정하며 말했다.“네시간 21분이 안 길어요? 저는 환자라서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해요.”그는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고 안색도 피로해 보였다. 진유나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진짜로 아파요? 제가 의사 불러올게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괜찮으니 가지 마요. 유나 씨가 여기 곁에 있어 주면 괜찮아질 거예요.”진유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다.“보름 동안 조금도 나아진 것 같지가 않아요. 곽 선생님이 주신 약도 약발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아요. 제가 다시 곽 선생을 모셔 와 진찰해 볼까요?”문 앞에 있던 이권은 진유나의 말을 듣고는 도리머리를 저었다.모든 사람이 유강후가 꾀병을 부리는 것을 알아챘지만 진유나만 눈치를 채지 못했다.“곽 선생 요즘 실험하느라 바빠요.”진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오늘 아침에 곽 선생의 sns를 봤는데 며칠 동안 쉰다고 했어요. 남편과 함께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갈 거라고 친구들에게 맛집을 추천해달라고도 해서 제가 여러 군데 추천해 줬어요. 시간 날 때 같이 바다에 있는 카페도 가보자고 약속도 했는데요.”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무슨 카페? 사람도 많을 텐데 그런 데를 왜 가요? 유나 씨랑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언제부터 곽 선생이랑 그렇게 친하게 지냈어요?”곽혜진과 염동식, 두 사람에 대해 유강후는 들은 바가 있었다. 곽혜진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스타일이라 유강후는 자기 사람이 그 사람과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진유나의 생각은 달랐다. “아마도 바다 위 덱에 있는 카페일걸요. 아름다운 뷰도 감상하고 친구들이랑 얘기도 나누고 얼마나 좋아요? 곽 선생은 사람도 예쁘고 의술도
진유나는 유강후의 옷깃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앞으로도 경영에 괜해 많이 알려줘요. 요즘 연수라도 가서 경영 공부할지 고민도 하고 있어요.”유강후는 진유나를 안아 창턱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와 허리를 감싸안더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한참 후, 유강후는 그녀에게 타이르듯 속삭였다.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유나 씨가 직접 대진 그룹을 운영하고 싶다면 제가 뒤에서 도와줄게요. 아니면 제 밑에 있는 임원 중 유나 씨 마음에 드는 분이 있으면 말만 해요. 제가 안배해 놓을게요. 어때요?”진유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까만 큰 눈동자로 진지하게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마음이 안 놓일 것 같아요. 회사는 아버지가 저한테 물려주신 자산이라 많이 키우지 못하더라도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나중에 저는 오랫동안 외국에 머무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강 대표님은 본가가 미국에 있잖아요...” 그녀는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희 둘은 헤어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그는 마치 벌주기라도 하듯 진유나의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평소처럼 젠틀한 모습도 조심스러운 모습도 없었다.진유나는 당황스러움에 유강후를 밀치며 말했다. “아파요, 놔줘요, 아프다니까요...”유강후는 진유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더욱 세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평소 부드럽던 그의 모습은 마치 환상인 듯 찾아볼 수가 없었다.진유나는 유강후가 멈추기를 바라며 뿌리치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유강후는 더욱 거칠게 그녀에게 다가갔다.결국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유강후는 정신을 차리고 진유나를 놓아주었다.진유나는 붉게 번진 유강후의 눈을 보고 두려움에 그를 밀치고 창턱에서 뛰어내려 도망가려고 했지만 두 발짝도 못 가 그의 품에 안겨졌다. 유강후는 그녀를 창문 앞에 세워 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그런데...”진유나는 어딘가 찝찝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속삭이듯 말했다.“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맡겨요. 내가 지켜봤는데 진씨 집안에 괜찮은 남자가 몇 명 있어요. 일을 열심히 배우게 해서 유나 씨를 보좌하도록 하면 돼요. 그리고 나중에 우리도 아이가 생길 건데 아들이랑 나랑 같이 유나 씨를 지켜줄 건데 뭐가 걱정이에요?” 유강후는 진유나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진유나는 얼굴이 빨개져 그의 손을 밀쳤다. “누가 대표님이랑 아이를 낳는대요?”진유나는 그날의 은밀하고도 달콤한 꿈이 떠올랐다.“만약에 딸이면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들이면 우리 부자가 유나 씨를 지켜주고 딸이면 내가 다 지켜주면 되죠.”진유나는 말없이 유강후의 가슴에 파묻혀 조용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한참이 지나 그녀는 입을 뗐다.“그런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유나 씨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요. 박씨 가문과의 혼약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눈이 반짝거렸다. “북아메리카에 예쁜 여자애들이 많잖아요. 그가 거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랑 만나고 있을지도 몰라요.”진유나는 내심 미안해했다. “삼 년 동안 그가 저를 옆에서 보살펴줬는데 저는...”진유나는 유강후를 처음 본 순간 바로 사랑에 빠졌었다.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염지훈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유나 씨, 사랑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며칠 후, 우리가 북아메리카로 돌아가면 그때 시간 내서 만나서 얘기해 봐요. 다들 어른인데 잘 얘기하면 될 거예요.”진유나는 그날 그 동영상과 여자애가 떠올랐다. 염지훈과 그 여자애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둘 사이에 정말로 무슨 일이 있다면 오히려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됐어요, 생각하지 말고 일로 와요. 내가 게살 발라줄게요.”게 네 마리 모두 품질이 아주 좋았다. 유강후
속으로 흐뭇해하던 유강후는 진유나의 손을 잡으며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진씨 집안 주방]진수현은 유강후를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딸을 위해 미리 요리도 많이 준비하고 또 H국 쉐프도 초빙해 왔다.하지만 표정이 영 밝지 않아 진유나의 엄마가 몇 번이나 옷깃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준 후에야 조금 나아진 기색이 보였다.식사가 절반쯤 지나자 진수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강 대표님은 이제 다 나은 것 같은데 왜 아직도 퇴원하지 않는 거예요? 계속 꾀병 부릴 셈인 거예요?”유강후가 대답하기 전에 진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강 대표님 진짜로 아파요. 꾀병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진수현은 근엄하게 말했다. “어른들 얘기에 너는 끼어들지 마.”유강후는 숟가락을 놓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제 거의 다 나아서 곧 퇴원하려고 해요. 남은 일만 마저 처리하고 유나 씨랑 같이 북아메리카에 가려고요.”진수현은 얼굴이 더 어두워지며 말했다. “나는 두 사람 아직 허락 안 했어요.”유강후는 진유나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유나 씨도 이제 어른이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진 회장님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곁에 두는 일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뭐라고요? 지금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진수현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화를 했다.유강후는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진수현이 대답하기 전, 유나의 엄마, 안심이 먼저 말을 꺼냈다. “됐어요. 수현 씨. 오늘 북아메리카로 가는 일에 대해 의논하려 온 건데 잘 얘기해 봐야죠. 딸 얘기만 나오면 화내는 거 안 좋아요.” 진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기는 왜 계속 강 대표 편을 드는 거야?”안심은 한숨을 쉬고는 유강후한테 사과했다. “미안해요, 유나 아버지가 유나가 걱정돼서 성질내는 거니까 이해해 줘요. 북아메리카 가는 일에 관해 우리도 유나의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