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주방 쪽을 힐끔 보며 물었다.“설마 염 대표님을 여기 초대하신 건 아니죠?”‘대기업 총수인 염 대표님도 재력도 도련님 못지않은데... 어떻게 그분이 여기서 요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집사가 웃으며 말했다.“염 대표님은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특별히 초대한 화교 셰프입니다. 손맛이 아주 뛰어나요. 오늘 요리는 아침에 공수해 온 신선한 재료와 특별히 준비한 양념으로 맛을 냈다고 합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온다연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랐다.‘이렇게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위해 굳이 식자재를 공수해 올 필요가 있을까?’유강후는 온다연에게 버섯 수프를 떠서 건네주었다.“한번 마셔봐요.”온다연은 수프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맛있어요! 그래도 염 대표님이 만든 것보다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발그레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입이 꽤 까다롭네. 그래도 반달 정도 지나면 염 대표님 요리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있을 거예요.”온다연은 호기심에 물었다.“어떻게요? 시간이 지나면 그게 가능해질까요?”유강후는 흰 생선 살 한 조각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특별히 제가 손을 쓸 일은 없지만... 유나 씨가 맛있게 먹으면 그걸로 충분해요.”오늘의 요리는 그날 먹었던 요리의 절반 정도밖에 없었지만 맛은 거의 똑같았다. 온다연은 만족한 듯 연달아 밥 두 그릇을 더 먹었고 마지막으로 수프까지 더 마시고 싶어 했다.그러나 유강후는 그녀의 배가 이미 볼록해진 것을 보고 더 이상 마시지 못하게 했다.사실 유강후는 은근히 그녀가 조금 살집이 올라 아이를 갖기 좋은 몸이 되길 바랐다.하지만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온다연은 과식한 탓에 소화불량으로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의사도 과식으로 인해 소화가 안 되는 문제라며 소화제를 처방했다.온다연은 약간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다 강 대표님 탓이에요. 점심에 요리를 너무 맛있게 만들어서 제가 자제할 수가 없었잖아
저택은 고목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곳곳에 자리한 중식 건축물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철저한 관리 덕분에 오히려 그 고풍스러움이 더욱 돋보였다.진씨 가문도 화교였기 때문에 진유나로 살고 있는 온다연은 이런 것들에 나름 익숙했다.강씨 가문의 저택은 수집품과 골동품이 넘쳐났고 그야말로 대형 박물관을 열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역사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유물들까지 눈에 띄었다.“대단하네요. 강 대표님 댁은 정말 박물관 같아요.”온다연의 감탄에 유강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일제강점기 때 저희 가문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그곳에서 기반을 다졌어요. 이후 저희 가문의 어른이신 강양호 선생께서 H국으로 돌아가 최초로 비행사가 되셨죠.”“당시에 최초로 비행기를 조종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당시 고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귀국했지만 시대적 한계로 결국 북아메리카에 머무르셨습니다. 외조모님도 유명한 외교관으로 북아메리카와 H국의 협력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나중에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셨어요.”온다연은 그 이야기에 숙연해졌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강씨 가문이 오늘날의 위치에 오른 거구나.’“외조모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세요?" 온다연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정적으로 업고 걷다가 잠시 대답을 미뤘다. 그녀가 입에 가져다주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너무 시고 달아서 별로예요.”온다연은 그의 불평을 무시하고 다시 입에 주스를 가져다 대며 한 모금 더 마시게 했다.“아직 답 안 하셨어요. 외조모님은요?”유강후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돌아가셨어요. 생전 경원시에 내게 몇 채의 집을 남기셨고 제가 H국에서 자리 잡기를 바라셨거든요. 제 아이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뿌리를 내리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결혼식도 H국에서 한 번 더 올리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저도 사실 돌아가 보고 싶긴 해요.
온다연은 고개를 들며 눈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어떻게 아셨어요?”유강후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여기는 북아메리카예요. 제가 알고 싶으면 알아내지 못할 게 없죠.”그는 천천히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살짝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는 듯 말을 이었다.“유나 씨가 계속 염지훈 씨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럴 필요 없어요. 염지훈 씨는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이미 다른 여자분과 함께하고 있었어요.”온다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걸 그렇게 자세히 어떻게 아셨어요?”유강후는 가볍게 기침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여기 소문 빨라요. 화교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거든요.”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덧붙였다.“어쨌든 그 사람은 유나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깊고 헌신적인 타입은 아니에요. 그러니 심리적으로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이런 건 저한테 맡기면 돼요.”온다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문제를 명확히 짚어내지는 못했다. 염지훈을 변호하고 싶었으나 눈앞의 질투심 많은 유강후가 화낼까 봐 조심스러웠다.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염지훈 씨가 어떤 사람이든, 지난 몇 년간 제 곁에서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에요. 혼담도 양쪽 부모님이 동의한 거라, 파혼하더라도 서로 체면도 명분도 지킬 수 있도록 신중히 상의해야 해요.”하지만 유강후의 생각은 달랐다.염지훈은 온다연이 법적으로 유강후의 아내였던 시절에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로서 그건 아내를 빼앗긴 것과 다름없었다.게다가 염지훈은 H국에서 온다연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이름까지 바꿔 그녀를 진씨 가문으로 돌려보냈다.3년 동안 유강후는 그녀가 세상에 없는 줄로만 알고 하루하루를 죽은 듯 살아왔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버티게 한 유일한 감정은 복수였다.유강후의 성격을 생각하면 첫날부터 염지훈을 철저히 무너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목
저택의 대형 홀은 작은 카펫에서부터 소파, 벽화, 시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고급 골동품이었다.평소 명품을 많이 접하는 디자이너들조차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고 혹시라도 고가의 골동품을 파손해 소송에 휘말릴까 걱정했다.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골동품이 아니라 이 옷들의 주인에게 쏠려 있었다. 이번에 가져온 옷들이 강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을 위한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화교 여성들 사이에서 패션을 선도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고객으로 잡는다는 것은 곧 서양의 아시아계 여성 패션 시장을 장악하는 것과 같았다.모든 디자이너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강씨 가문은 예의 바르게 최고급 얼그레이 티를 준비해 대접하며 약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미래 그룹의 총수와 그의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잘생긴 동양 남성, 그리고 그의 등에 업힌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온다연은 안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등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유강후는 내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소파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마치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듯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작은 소녀가 유강후의 부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여동생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소녀가 그들 앞으로 불려 와 옷을 고르기 시작하자, 디자이너들은 비로소 그녀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마치 그림에서 나온 듯한 정교한 미모를 자랑하는 동양 미인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매끄럽고 만지면 촉촉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디자이너들은 이런 동양 미인은 처음 보는지 잠깐 넋을 잃었다.그때 화장실에 갔던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돌아와 그녀를 보더니 갑자기 소리쳤다.“다연아!”그 소리에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돌아왔다.그 디자이너는 온다연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다.“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정말 살아 있었어! 다연
임혜린은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두 사람은 똑같이 역겹네요. 하지만 한이준이 와도 난 두렵지 않아요. 이제 한이준에게 빚진 돈도 없으니 날 어쩌지 못할 거예요. 왕이라도 된 줄 아는 건가요? 법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네요.”유강후는 차갑게 응수했다.“정말 그럴까? 만약 두 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임혜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유강후! 뒷조사라도 한 거야?”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난 지금은 너랑 말싸움할 시간 없어. 그리고 다연이는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해. 난 다연이가 그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걸 원치 않아. 진유나로 살면서 단지 작은 오해로 인해 잠시 헤어졌던 것만 알면 된다고!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마.”그때 온다연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임혜린을 바라보았다.“저... 분명히 아는 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왜인지 떠올려보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네요.”온다연을 보던 임혜린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녀는 몇 년 전 온다연이 유강후에 의해 나은별과의 거래로 희생당해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임혜린은 분노로 칼을 들고 유강후의 집을 몇 번이나 찾아가 그를 해치려 했다.임혜린에게 유강후는 깊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며칠 전 강씨 가문으로부터 디자이너로 초대를 받은 후, 유강후가 새 연인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온다연이 겪었던 고통이 떠나지 않았다.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유강후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의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진실을 그의 새로운 부인에게 폭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부인이 바로 온다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맞아! 우리는 대학 동창이자 단짝이었어. 모든 걸 터
임혜린은 온다연을 힘껏 안아준 뒤 천천히 풀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예전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몰라. 기억한다고 해도 고통만 더할 뿐이니까...”그녀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꼼꼼히 훑어본 뒤 미소를 지었다.“예전보다 살도 좀 올랐고 더 예뻐졌네. 그런데 강 대표님은 어떻게 널 찾은 거야?”유강후는 온다연을 끌어당기며 차갑게 말했다.“그건 혜린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온다연은 비록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임혜린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함과 믿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유강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혜린 씨는 제 예전 친구예요. 물어보고 싶은 게 아직 많단 말이에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유나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일단 옷부터 골라요. 저녁 만찬에 가야 하니까요.”네 명의 디자이너들은 각자 자신들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 고급 맞춤 의상들을 대거 가져왔고 임혜린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고급 라인 옷들을 준비해 왔다.온다연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은 임혜린이 가져온 개량식 치파오였다. 소녀다운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였고 청초하고 우아하면서도 젊음이 느껴졌다.특히 모든 소재가 H국 전통 방식의 순수 핸드메이드 원단으로 제작되어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시 한 편을 몸에 두른 듯한 감각을 주었다.온다연은 한 벌 한 벌을 애지중지하며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는 임혜린이 준비한 이번 시즌뿐만 아니라 다음 시즌의 신상품들까지 모두 예약했다.물론 이것이 온다연의 사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치파오의 청순하고도 낭만적인 디자인이 여느 소녀라도 빠질 만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 비록 임혜린의 작품만큼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온다연은 그들이 가져온 몇몇 신상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그 브랜드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느끼게 되어 다음 시즌의
임혜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서류를 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유강후를 흘깃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온다연의 귀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고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유강후는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 즉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곧 임혜린의 휴대폰에 낯선 계정으로부터 친구 추가 요청이 들어왔다. 귀여운 곰돌이 그림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된 계정은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계속 온다연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재해 뒀지만 곧 [상대방이 친구 추가를 거부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았다.유강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임혜린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몰래 중지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다시 친구 추가 요청을 보내며 새로운 메모를 남겼다.[한이준은 아들이 두 살인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역시나 임혜린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친구 추가 요청을 수락했다.곧바로 유강후가 메시지를 보냈다.[임혜린, 내 아내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임혜린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답장을 보냈다.[유강후 씨의 아내가 누구죠? 나은별인가요?]유강후는 속으로 임혜린을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지만, 온다연이 있는 자리라 꾹 참았다. 그는 즉석에서 임혜린과 온다연이 대화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이건 또 무슨 장난이죠?][내 아내 앞에서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이 사진은 곧바로 한이준의 휴대폰으로 전송될 거란걸 알아둬.]임혜린은 바로 반응했다.[그럴 배짱이 있나요?]곧 유강후는 한이준과의 대화 일부를 캡처해 그녀에게 보냈다. 임혜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바로 취소
온다연은 유강후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웃었다.“이 치파오 정말 예쁘죠?”달빛처럼 은은한 화이트 톤의 개량식 치파오는 그녀가 착용한 옥 장신구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온다연 특유의 소녀다운 맑음과 온화한 매력을 한껏 살려 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정말 예뻐요. 이제 만찬이 시작될 시간이네요. 가시죠.”세 사람은 곧 연회장에 도착했다.연회장에는 이미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었고 온다연과 유강후는 단연코 오늘 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등장한 임혜린 역시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특히 온다연과 임혜린이 입은 중식 개량식 치파오는 우아하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뽐내 주변의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그 자리에서 임혜린의 작업실은 수많은 주문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연회가 약 3분의 1쯤 진행되었을 때, 집사가 급히 유강후에게 다가와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강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별안간 온다연을 번쩍 안아 올리고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임혜린과 즐겁게 대화 중이던 온다연은 느닷없이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려지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들 앞에서 이러면 어떡해요? 손님들도 있는데...”유강후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임혜린 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께 하시죠.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대기 중이니 편히 돌아가세요.”그의 말은 명백한 작별 통보였다.임혜린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마침 피곤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순순히 온다연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떠났다.온다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왜 갑자기 혜린이를 내보낸 거예요? 한창 재밌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 말이에요. 조금 전 그 행동은 좀 무례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디자이너님의 비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가 아프다길래 제가 먼저 보내 드린 거예요.”온다연은 조금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