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서류를 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유강후를 흘깃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온다연의 귀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고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유강후는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 즉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곧 임혜린의 휴대폰에 낯선 계정으로부터 친구 추가 요청이 들어왔다. 귀여운 곰돌이 그림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된 계정은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계속 온다연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재해 뒀지만 곧 [상대방이 친구 추가를 거부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았다.유강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임혜린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몰래 중지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다시 친구 추가 요청을 보내며 새로운 메모를 남겼다.[한이준은 아들이 두 살인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역시나 임혜린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친구 추가 요청을 수락했다.곧바로 유강후가 메시지를 보냈다.[임혜린, 내 아내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임혜린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답장을 보냈다.[유강후 씨의 아내가 누구죠? 나은별인가요?]유강후는 속으로 임혜린을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지만, 온다연이 있는 자리라 꾹 참았다. 그는 즉석에서 임혜린과 온다연이 대화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이건 또 무슨 장난이죠?][내 아내 앞에서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이 사진은 곧바로 한이준의 휴대폰으로 전송될 거란걸 알아둬.]임혜린은 바로 반응했다.[그럴 배짱이 있나요?]곧 유강후는 한이준과의 대화 일부를 캡처해 그녀에게 보냈다. 임혜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바로 취소
온다연은 유강후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웃었다.“이 치파오 정말 예쁘죠?”달빛처럼 은은한 화이트 톤의 개량식 치파오는 그녀가 착용한 옥 장신구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온다연 특유의 소녀다운 맑음과 온화한 매력을 한껏 살려 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정말 예뻐요. 이제 만찬이 시작될 시간이네요. 가시죠.”세 사람은 곧 연회장에 도착했다.연회장에는 이미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었고 온다연과 유강후는 단연코 오늘 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등장한 임혜린 역시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특히 온다연과 임혜린이 입은 중식 개량식 치파오는 우아하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뽐내 주변의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그 자리에서 임혜린의 작업실은 수많은 주문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연회가 약 3분의 1쯤 진행되었을 때, 집사가 급히 유강후에게 다가와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강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별안간 온다연을 번쩍 안아 올리고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임혜린과 즐겁게 대화 중이던 온다연은 느닷없이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려지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들 앞에서 이러면 어떡해요? 손님들도 있는데...”유강후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임혜린 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께 하시죠.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대기 중이니 편히 돌아가세요.”그의 말은 명백한 작별 통보였다.임혜린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마침 피곤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순순히 온다연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떠났다.온다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왜 갑자기 혜린이를 내보낸 거예요? 한창 재밌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 말이에요. 조금 전 그 행동은 좀 무례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디자이너님의 비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가 아프다길래 제가 먼저 보내 드린 거예요.”온다연은 조금
‘다연이가 과거를 잊은 후 새롭게 시작하는 거니까 새로운 여자로 봐도 되겠지...’염지훈이 비꼬는 듯한 웃음과 함께 도발적으로 말했다.“그래서 이렇게 초대도 받지 못한 자리에 왔습니다. 미래 그룹 총수의 새 부인이 얼마나 미인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미스코리아를 나갈만한 미인인가요?”유강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몸이 안 좋아서 이미 잠자리에 들었어. 조만간 내가 아내를 데리고 직접 염 대표님의 회사를 방문하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그의 눈빛이 순간 묘한 빛을 띠며 덧붙였다.“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을 테니 그때 어떤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면 되잖아.”염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옛날엔 다연이에게 목숨까지 바칠 것처럼 굴더니, 겨우 3년 만에 새 여자와 결혼했다는 거네요? 결국 그때도 전부 연극이었다는 거잖아요.”유강후의 손이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듣기로는 아직도 다연이를 찾고 있다던데, 몇 년을 찾아 헤맸다던데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염지훈은 잠시 흥분한 듯 쏘아붙였다.“소식이 있다고 해도 너 같은 놈에게는 절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 넌 온다연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가질 자격이 없어! 설령 다연이가 살아 있다 해도 널 절대 만나주지 않을 거야. 넌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물었다.“그렇다면 소식을 듣긴 한 것처럼 보이네?”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비웃었다.“없다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유강후는 듣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염 대표님, 온다연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건 온다연은 내 아내라는 겁니다. 온다연은 저와 법적으로 결혼했고 우리에겐 함께 키우는 아이도 있어요. 설령 온다연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녀의 묘비엔 우리 가문의 성씨가 새겨질 거고 염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염지훈의 얼굴이 굳어지며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네까짓
연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에 가까웠다.유강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파에서 잠든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다가가 몸을 굽히려는 순간 온다연이 눈을 떴다.“끝났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방에 가서 자지 않았어요?”그에게서 은은한 술 냄새가 풍기자, 온다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밀어냈다.“술 드셨잖아요.”유강후는 분명 몇 잔 마셨고, 약간 취해 있었다. 그는 술기운에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강하게 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저를 싫다고 밀어내는 거예요? 유나 씨...”온다연은 고개를 홱 돌리며 두 손으로 그를 막았다.“제가 가서 해장국 끓여올게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한 손으로 그녀를 마치 작은 고양이를 들듯 번쩍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얼마 후, 집사가 해장국을 준비하고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욕실 안에서 민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집사는 급히 발길을 돌렸다.‘대표님과 유나 씨의 관계가 정말 좋은가 보네...’집사는 지금 이 흐름대로라면 이 집에 작은 도련님이 생기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어르신께 넌지시 알려드리고 미리 아기방 준비를 해야 할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서야 온다연은 겨우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마치 차에 치인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은 진짜 너무해. 그제도 폭풍 같은 시간이었는데... 어제는 더 심했어. 술기운에 밤새 몇 번이고 나를 덮쳤어...’어젯밤의 부끄러운 장면들이 떠오르자, 온다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저주하듯 말했다.“진짜 말도 안 돼요. 쉬지도 않고 밤새...”‘참! 어젯밤에도 콘돔을 안 꼈던 것 같은데...’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다시 쓰러졌다. 유강후는 원래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녀에게 늘 다정하고 세심하게 대해주었는데, 최근 몇 번은
“내 앞에서 가릴 필요 없어. 너희가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잖니...”온다연은 얼굴이 더 붉어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이를 가지겠다고 했다면 그건 강 대표님의 농담이에요. 아직 저희는 아이를 가질 계획이 없어요.”강현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놓인 큰 나무 상자를 가리켰다.“네가 왔으니 간단하게 준비한 선물이야. 어제 네가 치파오 입은 걸 보니 빈티지한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이건 내가 젊을 때 수집한 보석들이야. 네가 새로 맞춘 치파오와 잘 어울릴 거야. 한번 꺼내서 봐.”그녀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온다연이 안을 들여다보자마자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감탄했다.‘너무 화려한데...’상자 안에는 온통 비취 장신구로 가득했고 적어도 백여 점은 되어 보였다.한눈에 보기에도 모든 품질이 완벽했지만, 마치 시장에서 산 물건처럼 하나의 평범한 상자에 마구 담겨 있었다.온다연은 손에 닿는 대로 비취 팔찌 하나를 꺼내 보며 감탄했다.“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투명한 팔찌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죠. 작년에 저희 어머니도 비슷한 걸 구입하셨는데, 그게 16억 정도 하더라고요.”강현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예전에 내가 동남아에 갔을 때 비취 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이야. 그땐 원석 도박이 유행이었는데, 운이 좋아서 귀한 품종을 꽤 많이 얻었지. 네가 비취를 좋아하면, 내 방에 아직 가공하지 않은 큰 비취 원석들이 몇 개 더 있어.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골라서 가공해도 돼.”그녀는 상자 속을 한 번 훑어보며 덧붙였다.“사실 이건 그 원석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온다연은 급히 말했다.“괜찮아요.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게다가 이 모든 게 너무 값비싸서 다 받을 순 없어요.”그녀는 몇 가지 장신구를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이 정도면 제가 가진 옷들과 매치하기에 충분해요. 나머지는 다시 가져가 주세요. 너무 부담돼요.”강현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사를 손짓으로 불렀다.“이걸
몇 개의 고풍스러운 상자 안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중식 개량 치파오가 담겨 있었다.온다연이 입고 있는 치파오와는 다르게, 이 치파오들은 색상이 더욱 우아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온다연이 상자에 놓인 치파오들을 짚으며 말했다.“이건 어제 제 친구가 디자인한 치파오들이에요. 이 디자인을 보고 나서 어머님께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급히 보내달라고 했어요. 시간이 촉박했지만 이미 어머님 치수에 맞게 수정해 두었어요. 그리고 제가 친구에게 주문해 둔 두 가지 특별한 원단도 있어요. 분명히 마음에 드실 거예요.”그녀는 상자에서 원단 샘플을 꺼내 강현미에게 건넸다.“이건 샘플이에요. 이런 원단은 비록 귀하지만 비교적 구하기 쉬워요. 하지만 이 원단은 정말 희귀해요. 제 친구가 연구를 거듭했지만 겨우 네 가지 색상을 재현했어요. 하늘색, 브라운색, 은빛을 곁들인 붉은색과 옅은 그린이에요. 만져보세요.”강현미는 원단을 만지며 감탄했다.“정말 이 원단이 아직 있었네.”하늘색 원단은 마치 안개가 피어오르듯 은은하고 신비로운 색감을 띠고 있었으며 촉감은 가장 얇은 비단보다도 부드러웠다.그녀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동남아에서 왕비가 이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멀리서 봤을 때도 마치 강가의 안개비처럼 아련하고 우아했었다. 그 원단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원단이었고 이미 다시 복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이 원단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사라진 줄로 알았는데?”온다연이 설명했다.“저도 이 원단이 있다는 건 책에서나 보는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제 제 친구가 샘플을 가져와 보여주더라고요. 전설 속 이야기처럼 들렸던 게 진짜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원단이 너무 복잡해서 실패율이 높대요. 경력이 많은 장인들이 몇 달 동안 작업해도 한 필을 얻기가 어렵다고 해요. 지금 제가 주문한 이 네 가지 원단도 친구가 2년 동안 공들여 겨우 얻은 모든 것이에요. 어머님께서는 치파오의 디자인을 먼
“원래는 이 원단을 몸에 두르고 무대 위에서 시연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이 원단을 구매해 치파오로 완성품을 만들기로 하면서, 저 대신 어머님께서 무대에서 입어주실 수 있는지 부탁드리고 싶어 하더라고요.”온다연은 강현미의 반응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물론 이 부탁이 무리인 건 알아요. 어머님의 신분이 워낙 귀하시다 보니 런웨이 무대와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 친구 말로는 이 원단의 공예적 가치는 정말 대단해서 세상에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다고 해요...”“좋아. 그 부탁은 내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구나.”강현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온다연은 잠시 멍해졌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지,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강현미가 이어서 말했다.“이렇게 훌륭한 원단이라면 전 세계에 우리가 가진 럭셔리의 진짜 가치를 보여줄 필요가 있지. 외국의 명품보다 더 희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알려야지. 네 친구에게 가서 내가 참여한다고 전해.”그녀는 온다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했다.“나는 네가 국풍 패션 브랜드에 투자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줄 알았어.”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실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시장 가능성이 정말 크다고 느껴지거든요.”“좋은 판단이야. 나는 네 결정을 지지해. 만약 네가 브랜드를 런칭하면 내가 경영 쪽으로 지원해 줄게.”온다연은 기쁨에 강현미를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다.“어머님, 정말 감사합니다!”강현미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고맙긴... 이제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온다연이 몇 번이나 식사까지 하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강현미는 끝내 점심을 함께하지 않고 떠났다.점심 식사 후, 온다연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미래 그룹 본사로 향했다. 유강후는 아직 회의 중이라 그녀는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미래 그룹의 크기와 유강후의 바쁜 일정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녀가 사무실에서 잠깐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서가 서류를 한가득 안
곧 새로 산 얇은 담요가 배달되었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담요를 덮어주자마자 그녀가 눈을 떴다. 조금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두어 초 동안 낯선 환경에 당황하다가 상황을 파악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맞추며 말했다.“깼어요? 더 잘래요?”온다연은 머리를 비비며 나직하게 말했다.“더 자고 싶지 않아요. 계속 악몽을 꿔서 너무 피곤해요.”유강후는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그녀를 들어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낮게 속삭였다.“무슨 꿈을 꿨어요?”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강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그 소리에 마음이 조금 진정된 후 그녀가 말했다.“누군가가 저를 괴롭히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한 소년이 나타나 저를 구해줬어요. 하지만 그 소년이 결국 죽었어요...”그녀는 꿈속에서 너무나도 무력하고 마치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았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직 그 소년만이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했지만 그 소년마저도 자신을 구하려다 4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심장이 찢어지듯 울었고 그 모든 감정이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꿈이 아니라 실제로 겪었던 기억처럼 느껴졌다.온다연은 그의 옷을 꼭 쥐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강 대표님, 꿈이 아닌 것 같을 정도로 생생해요. 정말로 있었던 일이 꿈에 나타나는 거 아닐까요?”유강후의 눈 속에 어둠이 스쳤지만,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꼭 안았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요. 그저 꿈일 뿐일 테니까...”온다연은 멍하니 말했다.“하지만 요즘 들어 자주 이런 꿈을 꿔요. 그리고 정말 현실처럼 느껴져요. 가짜 같지 않아요.”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그 소년도 기억나요. 그 소년이...”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그건 단지 꿈이라니까요...”잠시 침묵한 후 그가 덧붙였다.“설령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유나 씨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았을 거예요. 아무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