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이가 먼지 거실 안으로 들어서니 해이가 여자를 잠시 응시하다가 저도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거실 안이 매우 밝았다.
“블라인드 걷었네요? 새끼 고양이 보고 있었어요?”
테이블 위에 아이스크림을 내려놓으며 그가 다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재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이던 말을 내뱉었다.
“그런 것도 있고, 그냥. 이젠 해를 봐도 될 것 같아서….”
“그런 건 누군가의 허락이 없어도 돼요.”
남잔 봉투 안에서 아이스크림과, 포장된 숟가락 두 개도 함께 꺼내 들었다. 숟가락 하나를 재이에게 건네며 그가 싱긋 웃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우유 맛이에요.”
뚜껑을 여니 새하얀 아이스크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고소한 우유 향이 나자, 문득 보육원에서 지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재이는 숟가락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떠먹어 보았다.
“어렸을 때 이후로 아이스크림 먹는 건 오랜만이에요.”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었어요?”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날이야 많았지만 보육원 내에서 미움받는 처지였던 그녀에게까지 개수가 돌아갈 만큼 넉넉한 양은 아니었다. 어쩌면 저에게만 나눠주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맛있네요.”
“그렇죠? 여기에 맥주까지 마시면!”
생각만으로도 행복한지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다. 평소 차가운 음식을 즐겨 먹지 않았던 재이는 점차 뱃속이 차가워져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 모습을 기민하게 살피던 그가 넌지시 궁금하던 걸 물었다.
“머리는 혼자 잘랐어요?”
“...네.”
“내가 다듬어줘도 돼요?”
의외의 제안에 재이의 새카만 눈이 옆집 학생을 응시했다.
“군대에 있을 때 이발 봉사를 좀 했거든요.”
처음 봤을 때보단 조금 다듬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부자연스럽게 긴 여자의 앞머리로 남자의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그래 줄래요?”
머리가 이 상태가 되기 전엔 그저 남편의 뜻대로 함부로 자르지도 못했다. 치렁치렁해진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넘어가서 관리가 잘되지 않았는데, 남편을 떠나고서야 재이는 성가신 제 머리를 스스로 잘라냈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실력이 없어 듬성듬성 길이가 다른 머리카락은 모자로 그런대로 가려서 다니곤 했다.
자기 머리를 여기서 그가 더 망친다고 해서 티가 나진 않을 것이었다.
...
“여기 앉아요.”
집 안에 마땅한 의자가 없어서 해이가 조리실 한편에 있는 접이식 식탁을 펼치곤 그 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무너질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자신이라면 모를까 이 여자가 제 몸무게에 가구가 무너질까, 걱정하는 게 우스웠다. 그가 확인이라도 시켜줄 듯 여자를 가뿐하게 들어 올려 식탁 위에 앉혔다.
“봐요. 안 무너지죠?”
사내의 손이 여전히 여자의 허리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향기에 재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앉아 있는 다리 양옆으로 사내가 팔을 짚고 섰다. 그 바람에 가까워진 거리가 매우 어색해서 여잔 제 긴 앞머리로 시선을 차단했다.
식탁이 제법 높았는데도 여자의 키가 작아 머리를 자르는 데에 불편함은 없을듯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옆집 여자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자를게요.”
저의 집에서 가지고 온 가정용 미용 도구 안에서 가운을 꺼낸 사내가 그것을 여자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그 손길이 매우 부드럽고 상냥해서 남자의 손끝이 스치고 간 목덜미가 흠칫 떨릴 정도로 간지러웠다.
“실력이 형편없진 않지만, 여자 머리는 처음이라 시간이 좀 더 걸릴지도 몰라요.”
가위를 꺼내 들고 여자의 뒤편으로 다가갔다.
“...망쳐도 상관없어요.”
“네?”
목소리가 작아 못 들은 그의 얼굴이 대번에 여자에게로 기울어졌다. 재이는 아까보다 분명한 목소리로 다시 망쳐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여자 머리를 망치면 안 되죠. 걱정 마요. 망치더라도 내가 책임질게요.”
사내의 목소리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지만, 그는 굳이 여자의 귓가에 대고 대답했다.
그 뒤 남잔 가위를 들고 제법 능숙하게 재이의 너저분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거울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머리카락을 가르는 가위 소리에 신뢰가 갔다. 돌연 재이의 머릿속으로 사내의 큼지막한 손이 들어왔다. 손으로 엉킨 머리를 풀어내는 손길은 조금 거칠면서도 다정했다.
“...머릿결이 부드럽네요.”
재이의 시선이 괜스레 아래로 내려앉았다. 제 다리만 바라보던 그녀 앞으로 그가 어느새 다가와 섰다.
“잠깐.”
사내의 손끝이 여자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무런 저항 없이 맞닿은 남자의 시선에 그녀가 황급히 눈을 피했다. 그러곤 왜 이토록이나 해이의 시선을 거북하게 여기는지를 생각했다. 속이 울렁대면서 세차게 떨리는 기분이 매우 불편했다.
“고개 숙이지 마세요.”
저를 피하는 여자를 알아챈 사내가 돌아간 그녀의 고개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한 번만 더 피하면 앞머리 이상하게 자를 거예요’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는 수 없이 재이는 학생이 제 앞머리를 자르는 동안 정면을 응시했다. 머리의 길이가 맞게 잘 잘렸는지 무릎을 굽혀 자세히 확인하는 모양새가 영 초짜 같아 보였다. 제법 그것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제야 어린 나이가 실감이 났다.
일정한 앞머리 길이에 만족함을 느끼는지 사내의 미소가 점차 커졌다.
“끝! 진짜 잘 잘랐어….”
남자의 말은 어색하게 끝맺음이 됐다.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던 재이의 미소도 그 같은 반응에 점차 지워졌다.
“...왜요?”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당황으로 물드는 남자의 얼굴에 여자도 슬슬 불안감을 보였다.
못 본 새 많이 자란 재영을 보며 그가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나름 애정 표현이었지만, 아이는 한껏 짜증을 부렸다.“하지 마!”“키가 많이 컸네?”그는 아이의 신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식탁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정희는 행복해 보이는 부부를 다정하게 응시하며 입을 뗐다.“너무 축하해요. 결혼식에도 가고 싶었는데.”그들이 먼 지방으로 오게 되면서 재영과는 전처럼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결혼식을 동네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했기 때문에 재영의 가족이 오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되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저희가 더 죄송했어요. 오늘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저희가 감사드리죠. 재영이가 빨리 가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데요.”“나도 재영이 너무 보고 싶었어.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재이의 상냥한 목소리에 재영은 얼굴을 붉혔다. 기차 타고, 배 타고 버스 타고 도착한 동네는 바다도 있고 공기도 맑은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런 데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인 재이가 살고 있기도 했다.“누나는 이제 서울에 안 와?”하지만 그렇긴 해도 한 번 오갈 때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재영은 제 맞은
쿵, 쿵, 쿵그녀에겐 익숙한 소리였다. 점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나워지자, 재이는 깊어지는 한숨을 속으로 삼켜내며 입을 삐죽였다.아마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뭐 하는 거예요?”“......”“재이,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요. 빨리 문 열어요. 나 정말 화나려고 해.”“오늘은 날 가만히 놔둔다고 약속했잖아요.”굳게 잠긴 방문 앞에 서서 달래듯 속삭이니 남자의 짜증을 억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하, 그래서 알겠다고 했잖아.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던 남자가 별안간 조용해졌다. 여잔 문에 바짝 귀를 갖다 붙였다. 포기하고 자리를 옮기는 모양인지 인기척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그것에 안도해, 손가락 하나 정도 빠져나갈 만한 틈을 두고 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그때, 익숙한 모양새로 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재이의 몸도 힘없이 딸려 나왔다. 이것 역시 익숙한 모양새였다.“잡았다!”남자의 얕은수에 보기 좋게 당한 재이는 그에게 허리를 붙들린 채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그러게, 누가 문을 잠그랬나.”그
*이번 회차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이용 시 유의 바랍니다.남자는 보육원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여긴 고민 있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상담 신청을 하고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공간이에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진다며 자주들 찾아요.”지나치는 교실마다 족족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덧붙이는 원장의 말을 무시하고 상담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 여자를 바라봤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책상 위에 있는 화분을 허리 굽혀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무엇을 보고 저리 작게 미소 지을까.남자의 시선이 상담실 어딘가를 오래도록 응시하자, 원장도 그 눈길을 따라갔다.‘저 앤 왜, 하지 말라는 짓을 저리 성실히 하고 난리래?’곧 상대를 알아본 원장은, 난을 돌보는 소녀의 모습에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돌도 안 돼서 들어 온 친구인데, 얌전하고 착해요. 이번 신약 실험 조에 넣으려고요.”원장의 말에 순간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돌연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조급증이 밀려들었다.“아뇨. 저 친구는 빼세요.”“네? 왜….”실험 조의 아이들을 그가 관리하는 일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순간, 원장의 얼굴에
“...책임질게요.”“정말?”은밀하게 속삭이는 말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 후회하지 말아요.”후회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구는, 불안한 청년을 다소 안타깝게 응시했다. 그의 불안은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여잔 먼저 용기 내어 남자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붙였다. 그 얄팍한 애정에도 버겁도록 행복해하는 사내의 반응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사랑해요. 내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서로의 입술이 닿았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여자의 숨과 뒤섞인 말들이 사내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 애간장을 녹이는 언행에 그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재이,”바로 곁에 있는데도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행동에 여잔 그저 눈을 맞추고 웃어주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지고 깊어졌다. 어느새 남자에게 몸이 들려 붕 떠 있는 걸 자각한 재이가 서둘러 사내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뭘 하려고요?”“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것 같아요?”뻔한 답 앞에서 괜한 씨름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곧장 침실로 이동해 여자의 몸을 조심히 내려놨다. 침대 위에 눕혀져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니, 그가 조급함이 느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로 밀착된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맞추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시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재이는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에요.”“정말?”구태여 되묻는 이유는 그녀의 애정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에 재이는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한다, 말했다.“이따가 데리러 올게요.”여자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흘끗 그녀의 어깨 너머 아이들을 바라봤다. 도담 반은 제 선생님의 연애를 바로 곁에서 직관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뭐에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이만 가요.”“잠깐.”이미 제가 재이를 쫓아다니며 애정을 구걸한다는 걸 모든 꼬맹이가 아는 마당에 여기서 더 티를 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급작스럽게 다가온 남자의 입술이 재이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가 금세 달아났다. 남잔 벙찐 얼굴을 한 여자의 볼을 장난스럽게 손으로 툭 건들곤 빠르게 두세 걸음 자리에 멀어졌다.“사랑해요!”남자의 익숙한 사랑 고백에 새삼스럽게도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뒤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짙어졌다.-“해이.”&ldq
“선생님!”“왜.”“그렇게나 좋아요?”운동장 계단에 앉아 어린이집 건물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체육 선생님을 이현이 어쩐지 불손한 표정으로 응시했다.그는 제자를 쳐다도 보지 않고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죽겠다, 아주.”“재이 선생님은 쌤,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는 것 같던데.”“뭐?!”아이가 장난으로 하는 말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는지 그가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의 난데없는 고함에 놀란 아이는 하마터면 계단 밑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깜짝 놀랐잖아요!”“이현이 너! 내가 얼마나 재이한테 사랑받고 있는데 그런 소릴 하는 거야?”“그렇잖아요! 재이 선생님은 쌤, 귀찮아하잖아요!”지지 않고 대꾸하는 말에 그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주춤했다.귀찮아하다니. 그럴 리가 없다.물론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자신을 귀찮아할 리가 없었다. 늘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손잡아주고 그러는데….그렇지만 다시 떠올려보니 그건 다 어리광 부리는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용도로, 습관처럼 행하는 애정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진심이 깃들어 있던가.문득 조급한 마음이 든 남잔 성큼성큼 운동장을 가로지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