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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한서율입니다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4 13:17:09

한진규의 손이 메뉴판 위에서 멈췄다.

“붉은 점이요?”

“네. 목 뒤에.”

태혁은 덧붙이지 않았다. 서율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가 머리를 묶어줄 때마다 만졌던 점이었다. 같은 집에서 스물네 해를 지낸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이 있을까.

한진규가 억지로 웃었다.

“어릴 때 다쳐서 남은 겁니다. 애가 워낙 조심성이 없어서요.”

“어디서 다쳤는데요.”

“집 정원이죠. 성북동 살 때. 대여섯 살이었나, 나뭇가지에 긁혀서 제가 병원에도 데려갔습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서율의 속은 오히려 가라앉았다. 기억을 더듬는 표정까지 거짓이었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병원에 데려갔다는 대목에서, 서율은 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태혁이 서류 한 장을 펼쳤다.

“보내주신 자료에는 세 살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미국에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다고요.”

한진규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

“제가 나이를 잘못 기억했나 봅니다. 다 큰 딸 어릴 때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습니까.”

“그럼 예식 날 일로 여쭙죠.”

태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식 끝나고 따님 데리고 어디 가셨습니까?”

“집이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쉬다가 밤에?”

“예식장에서 인천으로 간 차가 있습니다. 신부가 직접 불렀고요. 회장님 수행기사는 같이 귀가한 적이 없다는데요.”

룸 밖에서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멀지 않은 식탁에서 누군가 웃기도 했다. 그 소리가 들릴 만큼 방 안은 조용했다.

한진규가 서율을 봤다. 왜 이걸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눈이었다.

태혁은 서류를 한진규 앞으로 밀었다.

“밤에 데려오신 사람은 별채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대표님.”

“한 회장. 딸이 하나 더 있습니까?”

서율은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 아버지가 입을 여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그 얼굴을 똑바로 봤다.

한진규는 물을 마시려다 잔을 내려놓았다.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애는…… 집안에 걱정을 좀 많이 끼치는 애라.”

“여기 있는 분입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서율은 그가 자신을 부정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게 됐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빠져나갈 말을 찾느라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저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서우가 없어졌다고 하더니 얘가 멋대로 옷을 입고 나와서요. 언니라는 애가 동생 혼사를 욕심내고?”

“그만하세요.”

서율의 말이 크지 않았는데도 한진규가 움찔했다.

“뭐?”

“제가 언제 제 마음대로 갔어요.”

“어른들 이야기하는 데 끼어들지 마.”

“제 얘기잖아요.”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율은 손을 다시 쥐지 않으려고 봉투를 꺼냈다. 단단한 종이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받쳤다.

“예식 끝난 날 밤에 별채로 오셔서 서우 대신 들어가라고 하셨잖아요. 오늘 밤만 넘기면 된다고요.”

“그건 네가 자꾸 사모님 자리 갖고 싶다고 하니까?”

“저는 책 돌려줘야 한다고 했어요.”

서율은 아침에 포장을 마쳐 보낸 책의 빈자리를 떠올렸다. 지금쯤 기사 차를 타고 주인에게 가고 있을 것이다. 그 책은 적어도 처음 맡긴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제가 싫다고 하니까 때리셨고요.”

한진규의 눈이 서율의 입술에 닿았다. 태혁도 그쪽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비가 딸 좀 타이른 걸 가지고 그걸 지금……”

“넘어졌다는 말은 제가 거짓말한 거예요.”

서율은 이번에는 태혁을 봤다.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싫다고 해서.”

태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다친 손이 움직이는 걸 보고 서율은 말을 잠깐 멈췄다. 하지만 곧바로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끝내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안 가면 엄마 납골당 없앤다고 하셨어요. 아버지 이름으로 계약돼 있으니까 제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요.”

“누가 없앤대. 옮긴다는 얘기였지. 넌 꼭 말을 그따위로?”

“어디로요?”

한진규가 입을 다물었다.

서율은 묻고도 두려웠다. 어머니 사진이 정말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다음 말을 대신 좋은 뜻으로 해석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옮기실 건지 지금 말씀하세요. 돈이 얼마나 드는지도요. 제가 알아보고 직접 할게요.”

한진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제가 번 돈이요.”

서율은 작업 장부를 꺼냈다. 돈을 달라고 요구하려고 챙긴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냥 넣어둘 수 없었다.

“여기 날짜 적혀 있어요. 제가 맡아서 한 일, 대금이 들어간 날. 서우 이름으로 나간 것도요.”

“집에서 쓴 재료비는 생각 안 하니?”

“그럼 계산해요. 다 아버지 거라고 하지 마시고요.”

태혁은 장부를 빼앗아 보지 않았다. 한진규가 손을 내밀어 낚아채려 하자 그때 처음 움직였다. 멀쩡한 손으로 장부 앞을 막았다.

“본인이 꺼낸 물건입니다. 손대지 마시죠.”

한진규의 손이 멎었다. 그는 곧바로 태혁을 향해 얼굴을 바꿨다.

“대표님, 저런 애입니다. 지 아비한테도 돈 타령을 하는데 신랑한테는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진짜 서우를 데려올 테니?”

“서우가 어디 있는데요?”

서율이 물었다.

아버지는 답하지 못했다. 서율은 전화기를 꺼내 동생의 메시지를 띄웠다. 마카오에 있다는 말과 10억 요구, 돌아와서 정체를 밝히겠다는 협박이 한 화면에 걸렸다.

태혁이 읽는 동안 서율은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끝까지 안 보여주려고 가방 속에 숨겼던 전화였다. 지금은 화면이 꺼지지 않도록 직접 눌러두고 있었다.

“서우는 제가 가뒀다는 말, 또 하실 거예요?”

한진규가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태혁은 화면을 끝까지 읽고 물었다.

“송금했어?”

“안 했어요.”

“그럼 됐어. 일단 넣어둬.”

그가 한진규를 돌아봤다.

“추가 자금 집행은 보류합니다. 제출하신 자료도 전부 다시 보죠.”

“대표님, 그 돈 안 들어오면 다음 주 어음부터 막힙니다. 직원들이 몇 명인데요. 저 애 말만 듣고 회사를?”

“회사 자료로 설명하시면 됩니다. 따님을 다시 데려온다고 풀릴 일이 아니고요.”

한진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사위의 화를 풀기 위해 딸을 내세우는 방법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서율아. 네가 좀 말씀드려라. 그래도 네 아버지 회사인데.”

그 이름이 너무 늦게 나왔다.

서율은 장부를 거뒀다. 한진규가 그렇게 불러주길 바랐던 날들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태혁이 문 옆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들어온 강 비서에게 한 회장과 회사 서류를 확인하라고 했다. 한진규가 다시 입을 열려 하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시선을 맞췄다.

“여기서 따님한테 하실 말씀은 끝난 것 같습니다.”

한진규는 잠시 버텼다. 하지만 강 비서가 문을 잡고 기다리자 결국 서류만 집어 들었다. 나가기 직전 서율을 돌아본 눈에 원망이 남아 있었다.

서율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간 뒤에야 무릎이 떨리는 걸 느꼈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

태혁은 곧바로 앉지 않았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서율 앞의 물잔을 새 잔으로 바꿨다. 서율은 마시려다 잔을 받치는 손이 흔들려 다시 내려놓았다.

“천천히 해.”

그는 기다렸다. 오늘은 그 기다림도 벌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에게 할 말은 다 했는데, 이 남자에게 해야 할 말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

태혁이 물었다.

“직접 말해줘. 이름.”

서율은 테이블에서 손을 뗐다.

“한서율입니다.”

짧은 이름인데 끝까지 말하는 데 숨이 필요했다.

“한서우의 쌍둥이 언니예요.”

태혁은 한동안 그녀를 보았다. 서율은 죄송하다는 말을 서둘러 붙이지 않았다. 자기 이름만큼은 사과에 섞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한서율.”

그가 천천히 불렀다. 서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가 지어줬어?”

“엄마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서율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술 상처에 물이 닿자 아팠다. 조금 전까지는 그 감각도 잊고 있었다.

“저한테 화 안 나세요?”

“나.”

서율의 손이 멈췄다.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태혁은 그녀와 마주 앉았다. 식탁 너머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누구한테 무슨 화를 내야 할지 나눠서 생각하는 중이야.”

서율은 눈을 내렸다. 그가 이해해준다는 이유로 첫날밤이 아무 일도 아니게 될 수는 없었다.

“무서워서 말씀 못 드렸어요.”

“지금은.”

“지금도 무서워요.”

솔직하게 말하자 도리어 목소리가 덜 떨렸다. 태혁은 다친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서율이 그 손을 보자 그가 물었다.

“그것도 연기였어?”

서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태혁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그녀를 다시 봤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남았는데, 도망갈 생각부터 하진 마.”

서율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다 말씀드릴게요. 다 듣고 나가라고 하시면 그때 나갈게요.”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더 있어달라고 하면?”

서율은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이번에도 한서우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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