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한 회장 만나기로 했어.”
서율은 책을 싸던 손을 멈췄다. 태혁이 식탁 끝에 서 있었다.
“갑자기요?”
“확인할 게 생겨서.”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보여주지 않았다. 서율도 어떤 일이냐고 묻지 못했다. 어젯밤 서우의 메시지와 아버지가 상자에 넣어 보낸 메모가 차례로 떠올랐다.
“저도 가요?”
“같이 가겠어?”
물어오는 말이라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 자리에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간다고 하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눈앞에서 듣게 될 것이다.
서율은 받침을 댄 책을 상자 안에 넣었다. 태혁이 기다리는 동안 포장 끈을 두 번이나 잘못 넘겼다.
“그거부터 해.”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끝내라는 말을 듣자 서율은 꼬인 끈을 풀 수 있었다. 의뢰인이 보내온 주소를 적고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기사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건 받으시면 연락 달라고 해놨어요.”
“강 비서한테 주소 줘. 돌아오는 길에 전해드리면 돼.”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책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일만 남았다. 상자 뚜껑을 덮고 나니 아버지를 만날 일이 더 크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저도 갈게요.”
“한 회장이 부담되면 따로 이야기해도 돼.”
“저 없는 데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요.”
태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놨다. 부정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
서율은 젖은 손을 마른 천에 닦았다. 오늘 여기서 고개를 젓는다고 아버지와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은 더 많은 말을 대신 외워야 할지 몰랐다.
“제가 할 말도 있어요.”
“그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율은 그제야 억지로 붙들고 있던 것을 하나 내려놓은 듯 숨을 쉬었다. 태혁이 식탁 모서리에 놓인 메모를 보고 물었다.
“책 보내고 나면 뭐 해야 해?”
“별채 물건 더 챙겨야죠. 의뢰받아 둔 것들도 있고요.”
“목록부터 챙겨. 돌아올 때 잊지 말고.”
돌아올 때.
서율은 그 말이 일부러 나온 건지 살폈다. 그는 이미 직원에게 상자를 부탁하고 있었다. 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자신보다 먼저 정해놓은 사람처럼.
서율은 그 뒤를 따라가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 안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옷이 많았다. 서율은 그 사이에서 크림색 원피스를 골랐다. 가슴이나 목에 장식이 없고, 앉았을 때 무릎을 덮는 길이였다.
목 뒤를 가릴 스카프를 꺼냈다가 다시 걸었다.
어제까지는 동생의 습관을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오늘은 남의 이름으로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쪽이 더 무서웠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어봤다. 붉은 점이 드러나자 다시 손이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머리끈을 풀지 않았다.
화장대에 작은 장부를 펼쳤다. 의뢰받은 책의 상태와 작업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양유통으로 대금이 들어간 날도, 누구 이름으로 돌려보냈는지도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남겨두었다.
책을 포장하던 손이 그대로 남은 종이였다. 동생이 써준 이력보다 자신의 하루를 더 잘 설명해줄 것 같았다.
서율은 장부 몇 장을 찍어두고 가방에 넣었다. 어젯밤부터 온 메시지도 지우지 않았다. 그러다 전화기가 정말 동생 것이라는 사실이 다시 마음에 걸렸다. 서우가 돌아와 달라고 하면 자신이 남긴 기록까지 가져갈 수 있었다.
복도에서 강 비서를 불렀다.
“제 서류를 조금만 복사할 수 있을까요?”
“집무실 옆에 복합기 있습니다. 직접 하시겠습니까?”
서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사용법만 알려주고 물러났다. 서율은 장부의 몇 페이지를 복사했다. 첫 장이 거꾸로 나와 다시 넣었고, 잘못 나온 종이는 챙겨 접었다.
강 비서는 내용을 묻지 않았다. 대신 얇은 서류봉투를 건넸다.
“차에는 제가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혼자 남은 서율은 봉투에 장부와 복사본을 나눠 넣었다. 이런 준비가 자신을 얼마나 지켜줄지는 몰랐다. 그래도 누군가 아니라고 말하면 곧바로 물러났던 어제와는 다르게 가고 싶었다.
방으로 돌아가니 태혁이 문 옆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다. 다친 손 때문에 매듭이 어긋나 있었다. 서율이 보고 있자 그가 멀쩡한 손으로 한 번 더 잡아당겼다.
“한 손으로도 웬만한 건 되는데 이게 귀찮네.”
서율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깐만요.”
손이 올라가자 태혁이 고개를 낮췄다. 넥타이 끝을 풀어 다시 끼우는 동안 그의 셔츠 깃에 손등이 닿았다. 첫날밤의 온기가 불쑥 떠올라 손놀림이 잠깐 흐트러졌다.
“잘 묶네.”
“아버지 것도 해드렸어요. 서우가 못 하겠다고 하면요.”
말이 먼저 나왔다. 서율은 매듭을 쥔 채 멎었다.
태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매듭을 올릴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서율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부정하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나 가방을 들었다.
“다 됐어요.”
태혁이 손끝으로 매듭을 만졌다.
“고마워.”
추궁하지 않는 목소리가 더 아팠다. 서율은 먼저 복도로 나갔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보탤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버지 전화가 울렸다. 한 번 받고 끝내자는 마음으로 전화를 귀에 댔다.
“제가 같이 간다고 들으셨어요?”
“무슨 소리를 했길래 갑자기 만나자는 거야.”
인사도 없었다. 서율은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태혁을 보았다. 그는 조금 떨어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만나서 들으세요.”
“네가 모르긴 뭘 몰라. 어제 본가에서도 쓸데없이 입을 놀리더니. 너 때문에 회사 일이 얼마나?”
“저도 거기서 할 말 있어요.”
한진규가 말을 멈췄다.
서율은 그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면 익숙했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무서웠다.
태혁이 옆으로 왔다.
“전화 더 받아야 해?”
서율은 고개를 저었다. 문이 열리자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잡았다.
“나 때문에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면, 그건 한 회장한테 물을 거야.”
“그 사람이 저한테 다 떠넘기면요?”
“당신 얘기도 들을 거고.”
서율은 그를 올려다봤다. 들을 거라는 말과 믿을 거라는 말은 달랐다. 그런데 오늘은 그 차이가 오히려 안심됐다. 자신이 한 잘못도 없던 일로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저 중간에 못 나가게 해주세요.”
태혁의 표정이 달라졌다.
“못 나가게?”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면 제가 그냥 나가버릴 수도 있어서요. 할 말 다 하고 나올게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태혁은 서율이 쥔 가방을 한번 보고 대답했다.
“그분이 자리 정하게 두진 않을 거야.”
서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부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
청담의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조금 남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바람이 목 뒤로 닿았다. 서율은 스카프를 두고 온 사실을 떠올렸지만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태혁은 그녀가 뒤따라올 수 있도록 몇 걸음 앞에서 기다렸다.
문을 열어주는 직원이 서율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서율은 인사만 했다. 맞는 이름을 알려줄 수 없는 호칭에는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오늘은 자꾸 발을 붙잡았다.
룸 앞에는 강 비서가 서 있었다. 한진규는 먼저 와 있다고 했다.
태혁이 문을 열기 전에 서율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먼저 할 말 있으면 해.”
서율은 가방 안의 봉투를 만졌다. 지금 단둘이 말하면 아버지의 얼굴을 안 보고도 이름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 다음 태혁이 대신 한진규와 이야기해줄지도 몰랐다.
그러면 또 같은 자리에 남을 것 같았다. 아버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별채에서 기다리던 아이로.
“들어가서 할게요.”
태혁은 문고리를 내렸다.
한진규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서율의 머리가 묶여 있는 걸 보자 입가가 잠깐 굳었다.
“아이고, 대표님. 바쁘신데 시간을 다 내주시고.”
“앉으시죠.”
서율은 태혁 옆에 앉았다. 한진규 맞은편이었다. 직원이 물을 따르는 동안 아버지의 눈이 가방과 옷깃을 오갔다.
“서우야, 얼굴이 좀 좋아졌구나. 사위가 워낙 잘해주니.”
서율은 물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한진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태혁 쪽으로 몸을 틀었다. 긴급 자금, 물류 계약, 이사회 안건. 서율이 모르고 사인하길 바랐던 것들의 이름이 이어졌다.
태혁은 한진규가 식사 메뉴를 펼치려는 순간 손을 올렸다.
“주문 전에 한 가지만 여쭙죠.”
“예, 얼마든지요.”
태혁의 시선이 서율의 목덜미에 잠깐 머물렀다. 전날 아침에 점을 발견하고도 손대지 않았던 곳이었다.
“따님 목 뒤에 있는 붉은 점,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이 보증서로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정 팀장이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발급처에서 보내온 원본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서율이 먼저 표시했던 먹선 옆의 작은 빈틈이었다. 실물에서는 그 자리가 검게 메워져 있었다.“발급 당시 확인한 작품과 현재 출품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같은 작품이라고 입증할 자료가 올 때까지 거래를 중단하겠습니다.”민 여사는 손님들이 앉은 쪽을 먼저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번호판을 만지던 노인이 수행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얇아졌다.“보관하면서 수리했을 수도 있잖아요. 소장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시네요.”“요청한 기록에 그 수리가 없습니다.”서율이 파일을 펼쳤다. 민 여사는 그녀를 보지 않고 정 팀장에게 말을 이었다.“이사장인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박 선임이 서류 한 장을 받침 위에 놓았다. 갈라 전에 출품 담당자에게 보냈던 검토 의견이었다. 수신 확인 옆에는 이사장실로 전달했다는 회신이 붙어 있었다.민 여사의 시선이 그 종이에 닿았다.“제게 올라오는 문서를 제가 일일이 다 읽을 수는 없죠.”“그럼 담당자가 설명하면 되겠습니다.”태혁이 대답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민 여사가 서율에게로 돌리려던 화제를 다시 종이 위로 가져왔다.“오늘 실물을 무대로 바로 옮긴 이유도 같이 듣죠. 약속된 확인 시간을 없앤 사람이 누군지.”진행자가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출품 담당자는 무대 옆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태혁은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라고 몰아붙이는 대신, 거래 중단부터 손님들
“공개 감정을 하라는 말씀이세요?”서율이 묻자 민 여사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감정까지 거창하게 말할 건 없고. 우리 새아가 안목이 어떤지 손님들도 궁금해하시잖니.”“작품을 아직 못 봤어요. 먼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요.”“단상에 올라가면 보일 텐데.”민 여사는 서율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다정한 동작이었지만 놓아주는 시점은 자신이 정하려는 손이었다.태혁이 옆으로 다가왔다.“감정팀하고 약속한 확인 절차부터 진행하시죠.”“태혁아, 오늘은 손님들 모신 자리지 회의실이 아니야. 그 정도 인사도 못 해주겠다는 거니?”서율은 팔을 빼며 먼저 대답했다.“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거래를 진행해도 되는지는 감정팀에서 확인하셔야 하고요.”민 여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웃음을 되찾았다.“그래.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으니 잘하겠지.”그녀가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가자 태혁이 서율을 봤다.“거절해도 돼.”“알아요. 그런데 자료하고 다른 물건이면 누군가는 말해야 하잖아요.”“네가 꼭 그 사람일 필요는 없고.”서율은 파일을 내려다봤다. 검토자 이름이 적힌 첫 장은 안쪽으로 넣어두었다. 밖에서 자기 이름을 바로 밝히지 않기로 한 일과, 본 것을 말하지 않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다.“제가 발견해서 확인하자고 했어요. 마지막도 보고 싶어요.”태혁은 더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강 비서에게 확인실의 두 사람을 무대 가까이 안내해달라고 했다.객석에 앉은 뒤에도 서율은 물을 많이 마시지 못했다. 컵을 들면 손이 떨리는 게 보일까 봐 한 모금씩만 넘겼다. 태혁이 조용히 속삭였다.“물잔하고 싸우지 말고.”“떨리는 걸 어떡해요.”“나도 조금 떨리는데.”서율이 돌아봤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거짓말.”“지금 저기 올라가라고 하면 나보다 네가 잘할 테니까.”서율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태혁은 웃는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물잔을 들었다.경매는 순서대로 진행됐다. 누군가 번호판을 들 때마다 객석의 시선이 움직였다. 서율은 사람
갈라를 사흘 앞둔 오후, 서율은 정 팀장에게 보냈던 비교 사진을 다시 열었다.처음 의문을 적어 보낸 뒤로 2주가 지났다. 출품자는 보수 전후의 차이일 뿐이라고 답했지만, 그 말에 필요한 작업 기록은 아직 다 오지 않았다. 보증서를 발급한 쪽에서 보낸 원본 사진은 오히려 다른 부분을 더 보이게 했다.서율은 두 사진의 같은 글자 옆에 표시했다. 태혁은 맞은편에서 그 자리를 봤다.“사진만 보고 다르다고 할 수 있어?”“그래서 실물을 봐야 해요. 사진 찍은 각도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그런데 왜 자꾸 답을 미루는데.”“그건 제가 모르죠.”서율은 받은 회신을 읽어주었다. 작품은 별도 장소에 보관 중이고, 행사장에 입고된 뒤 지정된 시간에만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장자가 정한 일정이라고 했다.태혁의 표정이 굳었다.“거래 전에 확인부터 해야지. 사람 모아놓고 보여주겠다는 게 말이 되나.”“정 팀장님도 그 말 하셨어요. 확인 끝나기 전에는 낙찰 확정하지 말라고요.”그날 저녁 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실물 확인은 갈라 당일로 잡혔고, 감정팀 검토가 끝나지 않으면 거래를 확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서율은 확인 메일을 받아 폴더에 넣었다.당일 준비할 자료 목록이 늘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고르기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이었다.“발언하라고 하면 어디까지 할 거야?”태혁이 물었다.“제가 본 차이만요. 누가 가짜를 만들었다는 말은 못 하죠.”“민 여사가 그런 말만 하고 내려오게 둘 사람은 아니야.”서율은 초청장을 내려다봤다. 그 여자는 술 한 잔을 못 받는 것도 집안 예의의 문제로 바꿨다. 오늘은 어떤 말을 꺼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럼 안 나가는 게 나을까요?”“내가 싫은 건 네가 망신당하는 거지, 나가는 게 아니야.”태혁이 파일을 덮었다.“네 판단으로 말할 자리면 가. 한양유통 딸 노릇하러 가는 거면 가지 마.”서율은 그 말이 어렵게 느껴졌다.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같은 사람들 앞에 서는데 두 가지가 나뉠 수 있을까.그녀가
“수리한 적이 있네요.”서율이 족자 아래쪽을 가리켰다. 정 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는 상태표를 봤다.“그럼 위작입니까?”“아직은 모르죠.”서율은 새로 보강된 부분과 그림이 그려진 부분을 나눠 표시했다. 뒤에 댄 종이가 새것이라는 이유로 앞의 글씨까지 가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손을 거친 책들도 이전보다 새 종이가 붙어 돌아갔다.“여기 고친 건 맞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고쳤는지부터 보고 싶어요.”박 선임이 소장자가 보낸 이력표를 내밀었다. 보수 작업을 했다는 기록은 있었다. 다만 함께 붙어 있는 사진이 너무 작았다.서율은 돋보기를 내려놓고 청자 쪽으로 옮겨갔다. 입구의 작은 흠과 바닥 사진을 번갈아 봤다. 금동불상도 자료에 표시된 부분을 차례로 확인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두고 자신의 솜씨를 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모르는 것이 나오면 표에 물음표를 그렸다.“금속 쪽은 제가 판단할 범위가 아니에요. 여기 흔적이 수리인지 제작 때 생긴 건지 구분이 어렵네요.”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전문 담당자 의견을 받겠습니다. 서율 씨는 의심되는 부분만 남겨주세요.”서율은 다시 족자 앞에 섰다. 다른 두 점을 보는 동안에도 두 번째 줄의 먹선이 자꾸 눈에 밟혔다. 글씨가 서툴러서는 아니었다. 잘 쓰려고 멈춘 자리가 이상하게 같은 곳에 모여 있었다.그녀는 작가의 다른 서첩 자료를 부탁했다. 정 팀장이 화면을 열어주자 이번에는 앉아서 오래 봤다.원본 자료에서 빠르게 흘러간 획이 족자에서는 중간에 한 번씩 멎었다. 종이 탓일 수도, 붓 상태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 서율은 한 글자만 골라 말하지 않고 비슷한 흔적을 세 군데 더 찾아 표시했다.“이건 손이 망설인 것 같아요.”박 선임이 가까이 왔다.“왜 그렇게 보시죠?”“앞의 획을 끝내고 다음으로 가는 방향이 여기서 꺾여요. 그런데 다른 글자에도 같은 식으로 멈춘 곳이 있어요. 원래 이런 글씨를 쓰는 분인지부터 확인해야겠지만요.”서율은 자기 손으로 허공에 한 번 획을 그었다
도구를 돌려받고 일주일 뒤, 서율은 처음으로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그녀를 이사장실로 데려가려 했다.“보존팀하고 약속했어요.”서율이 말하자 직원이 방문 명단을 다시 봤다.“사모님께서 오신다고 해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옆에서 강 비서가 나서려는 걸 서율이 작은 손짓으로 막았다. 직원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쪽으로 접수되어 있었을 것이다.“정수현 팀장님한테 연락해주시면 돼요. 자료 보낸 사람이라고 해주세요.”서율은 손에 든 서류봉투를 가슴 아래로 내렸다. 며칠 동안 고른 작업 사진과 기록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에도 순서를 바꿔보다가 태혁에게 잠 좀 자라는 말을 들었다.지금은 그 봉투가 없었다면 여기 왜 왔는지부터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재단 건물은 한진규 집보다 밝았다. 그런데 복도 벽의 안내판에는 모르는 부서 이름이 가득했고, 직원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기 갈 곳으로 걸어갔다. 서율은 그들 뒤에 붙어 어느 문으로 들어가면 되는지 지켜봤다.잠시 뒤 정 팀장이 나왔다.“늦게 내려와서 죄송합니다. 이쪽입니다.”그는 강 비서에게 따로 보고하지 않고 서율을 작업실로 안내했다. 보안문을 통과할 때 방문증을 받았다. 이름란에는 사전에 적어 보낸 한서율이라는 글자가 있었다.“보내주신 이름으로 준비했습니다. 외부 공개 범위는 아직 조정 중이라고 들었습니다.”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곳에는 제가 설명할게요.”강 비서는 오후에 데리러 오겠다며 문밖에서 돌아갔다. 서율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문증을 옷깃에 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입으로 대답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됐다.작업실에는 정 팀장 외에 직원 두 사람이 있었다. 박 선임은 서율이 보낸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있었다. 인사를 받은 뒤 곧바로 질문이 나왔다.“이 작업, 직접 하신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서율은 화면 옆으로 갔다. 집에서 혼자 설명을 연습할 때는 잘 나오던 말이 사람들 앞에서는 목에 걸렸다.“여기 찢어진 부위하고, 하단부
어머니 사진은 그대로 있었다.서율은 봉안당 유리 앞에 서서 한동안 꽃병만 보았다. 저번에 놓고 간 꽃이 끝부터 시들어 있었다. 새 꽃을 꽂으려고 가져온 봉투가 손에서 바스락거렸다.옆에서 태혁이 물었다.“여기야?”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식당에서 헤어진 다음 날이었다. 명의 관련 검토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잠을 자다 깨면 빈 유리장부터 떠올라 아침 일찍 오겠다고 했다.태혁은 차를 준비해놓고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서율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한 번도 같이 온 적 없는 곳이었다.새 꽃의 포장을 벗기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태혁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이것만 들고 있을게.”서율은 마른 꽃을 거두고 물을 갈았다. 꽃의 방향을 바로잡느라 고개를 숙였는데, 옆에서 기다리는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왠지 어머니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꽃잎만 만졌다.“엄마, 나 왔어.”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며칠 못 올 줄 알았는데…… 그냥 왔어.”태혁은 사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누군지 길게 소개하지 않았고, 딸을 평생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발 물러서주자 서율은 유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거스른 것 때문에 이 얼굴까지 빼앗길 것 같아 겁이 났었다.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 말을 믿었다.“다음에는 내 손으로 다 챙겨올게.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서율은 유리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뒤돌아보니 태혁은 복도 끝에서 빈 꽃봉투를 접고 있었다.관리 사무실에서는 미리 연락받은 직원이 계약 사본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법무 담당자는 기존 계약과 가족관계를 확인할 자료를 함께 검토하기로 했다. 서율은 자리에서 직접 이름을 말하고, 어떤 연락을 누구에게 보내는지 하나씩 물었다.그동안 변동 사항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서율은 그 말만으로도 의자에 기대고 싶었다. 아버지가 가능하다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