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차태혁이 피 묻은 냅킨을 조금 들어 보였다.
“이거 치우면 차 더러워질 텐데.”
“시트 걱정은 나중에 해요.”
서율은 손수건을 남자의 손 아래 받쳤다. 접힌 냅킨 사이로 깨진 유리 조각이 보였다. 무심코 집으려던 손을 멈추고 강 비서를 불렀다.
“병원으로 가는 거죠?”
조수석의 강 비서가 고개를 돌렸다.
“네. 진료실 준비 중입니다.”
“지금은 이대로 대고 계세요. 자꾸 들여다보지 말고요.”
“내 손인데 구경도 못 하나?”
“네. 지금은 안 돼요.”
서율이 단호하게 대꾸하자 앞좌석에서 짧게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차태혁이 강 비서를 흘끗 봤다.
“웃었습니까?”
“아닙니다.”
“앞이나 봐요.”
차가 저택을 빠져나왔다. 서율은 상처에 손대지 않은 채 냅킨이 밀리지 않도록 그의 손을 받쳤다. 생각보다 무겁고 큰 손이었다. 어젯밤에는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었는데 지금은 손가락 끝이 차가워지는 게 먼저 신경 쓰였다.
차태혁이 맞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피 봐도 안 무섭나 봐.”
“무서워요.”
“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해?”
“제가 놀라면 피가 멎나요.”
남자가 서율을 보았다. 장난스럽던 기색이 사라지자 서율도 늦게 자신의 말투를 의식했다. 동생은 어땠더라. 손톱이 깨졌다고 집안이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건 알아두면 좋잖아요. 집에서도 다치는 사람이 있으니까.”
뒤늦게 설명을 붙였지만 차태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겠지.”
믿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서율은 그 어중간한 틈이 제일 어려웠다.
강 비서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는 말을 전했다. 서율이 손을 놓으려 하자 차태혁이 먼저 물었다.
“같이 들어갈 거지?”
“그럼 저 여기 두고 가시게요?”
“혹시 질렸을까 봐.”
서율은 피 묻은 냅킨을 보았다.
“질릴 건 본가에서 다 질렸어요.”
차태혁의 입에서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서율도 모른 척하지 않았다.
***
진료실 앞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의료진이 차태혁을 안으로 안내하는 동안 서율은 가방을 무릎에 얹고 의자에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어깨가 한꺼번에 무거워졌다. 어젯밤부터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을 빼면 줄곧 다른 사람 앞에 서 있었다.
손수건에 묻은 피가 말라가고 있었다. 새것으로 살 수도 있는 물건인데 자꾸 접힌 모서리를 펴게 됐다. 어머니가 끝을 꿰매준 자리가 그 안에 있었다.
강 비서가 다가와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보관하실 거면 여기 넣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서율은 손수건을 접어 넣었다. 강 비서는 곁에 서 있다가 한 걸음 떨어진 의자를 가리켰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꿨다.
“아까 식사 자리, 원래 그런가요?”
물어놓고 후회했다. 한서우라면 이미 알고 있을 일인지도 몰랐다.
강 비서는 잠깐 생각했다.
“편한 자리는 아닙니다.”
그 대답에 서율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더 묻지 말라는 뜻 같기도 했고, 자신만 이상하게 느낀 건 아니라는 뜻 같기도 했다.
“봉투는 본사로 돌려보냈습니다. 한 회장님께도 전달 경로 변경이라고만 알릴 겁니다.”
서율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부탁한 건 아닌데요.”
“대표님 지시입니다.”
강 비서는 덧붙이지 않았다. 서율은 닫힌 진료실 문을 보았다. 차태혁은 자기 손을 제대로 누르지도 않으면서 그런 지시는 언제 해둔 걸까.
가방 안에서 전화가 진동했다. 한진규였다.
화면을 보는 서율의 표정이 굳자 강 비서는 시선을 돌려주었다. 서율은 바로 받지 못했다. 전화를 받으면 여기서도 입술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진동이 멎었다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떴다.
[정민이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야.]
[회사 망하는 꼴 보고 싶어? 전화 받아.]
서율은 답장을 쓰려다 지웠다. 길게 설명하면 또 말꼬리를 잡힐 것이다. 화면 위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서류는 회사로 보낸대요. 차태혁 씨하고 직접 말씀하세요.]
보내고 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금 전 식탁에서 차태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와 자신의 사이에 문 하나를 닫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메시지는 곧바로 오지 않았다.
서율은 전화를 가방 안쪽에 넣었다. 강 비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조용한 배려 덕분에 휴대전화를 숨기는 동작이 덜 초라하게 느껴졌다.
잠시 뒤 차태혁이 나왔다. 손에는 새 드레싱이 감겨 있었다. 의사가 뒤에서 주의사항을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율을 보았다.
“왜 그런 얼굴이지?”
“어떤 얼굴인데요.”
“혼자 사고 친 얼굴.”
서율은 가방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한테 직접 전화하시라고 했어요.”
차태혁이 강 비서를 한 번 봤다. 강 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했네.”
또 그 말이었다. 서율은 수긍하고 넘어가기가 어려워 물었다.
“귀찮게 하실 텐데요.”
“원래 귀찮게 하는 분이야.”
차태혁은 멀쩡한 손으로 서율의 가방을 집으려 했다. 서율이 먼저 끌어안자 그가 손을 내렸다.
“그건 계속 직접 드네.”
“가벼워요.”
“무거워 보이던데.”
“중요한 게 들어 있어서요.”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차태혁은 지퍼 틈으로 나온 낡은 파우치 끈을 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간 서율이 끈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 뺏어.”
“뺏을 거라고 안 했는데요.”
“그렇게 안고 있길래.”
서율은 가방을 조금 내려놓았다. 차태혁은 먼저 걸어가지 않고 옆에서 기다렸다.
***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태혁은 휴대전화로 보고를 받았고, 서율은 창밖을 보았다. 골목에 작은 표구점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말려둔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차가 신호에 걸리자 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기울였다.
가게 안쪽에 작업대가 보였다. 종이를 눌러둔 무거운 판, 벽에 기대놓은 족자 봉. 낯선 곳인데도 잠깐 들어가 앉고 싶었다.
“아는 집이야?”
차태혁이 통화를 끝내고 물었다.
“아니요.”
서율은 다시 등을 기댔다. 신호가 바뀌고 가게가 뒤로 멀어졌다.
“저…… 집에 놓고 온 물건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필요한 건 사면 되는데.”
“살 수 없는 것도 있잖아요.”
차태혁이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율은 괜히 더 설명했다.
“오래 쓴 거라 손에 익어서요. 여기 새 물건이 싫다는 뜻은 아니고요.”
“누가 싫다고 했나.”
그가 강 비서에게 말했다.
“한양 쪽에 연락해서 짐 보내달라고 해요. 본인이 고른 것만.”
“알겠습니다.”
서율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아버지한테 말씀하시면 다르게 보내실 수도 있어요. 그냥 제가 부탁할게요.”
강 비서가 차태혁을 보았다. 차태혁은 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에 자기 짐 가져오는 데도 허락받아야 해?”
“물건이 섞여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율이 쓰던 도구에도, 복원해 둔 작품의 포장에도 한서우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어떤 것을 자기 물건이라고 고를 수 있는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차태혁은 조금 길게 침묵했다.
“목록 적어줘. 다른 건 건드리지 말라고 할 테니까.”
서율은 가방에서 펜을 꺼냈다. 아침에 받은 일정표 뒷면에 필요한 물건을 적기 시작했다. 회색 작업 앞치마, 나무 붓통, 어머니 서책 두 권.
서책이라고 쓰고 멈췄다. 표구사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을까. 차태혁은 서율이 펜을 멈춘 걸 보았지만 종이를 들여다보진 않았다.
“급하게 안 적어도 돼.”
“급해서요.”
“왜.”
“다른 사람이 먼저 치울까 봐.”
차태혁은 앞좌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리하지 말라고만 먼저 전해요.”
그 말을 듣고서야 펜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서율은 목록을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차태혁은 그 종이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서율이 그의 드레싱을 보았다. 끝부분이 소매에 걸려 조금 들떠 있었다. 손을 뻗자 차태혁이 가만히 있어주었다.
“이쪽 접히면 불편해요.”
들뜬 끝만 바로잡고 손을 떼려는데 그가 자신의 손을 뒤집어 보았다.
“예쁘게도 만지네.”
“습관이에요.”
“무슨 습관?”
서율은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삐뚤어진 걸 그냥 못 보는 거요.”
차태혁이 서율의 스카프를 봤다. 출발할 때보다 매듭이 조금 돌아가 있었다.
“자기 건 놓쳤는데.”
그가 멀쩡한 손으로 스카프 끝을 가리켰다. 서율은 목 뒤가 드러날까 봐 급히 바로잡았다. 그가 거들지 않고 손을 내리는 바람에 오히려 얼굴이 뜨거워졌다.
“스카프까지 검사하실 건 없잖아요.”
“잘 어울려서.”
서율은 고개를 돌렸다. 창에 비친 입가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웃을 이유가 없는 날에 자꾸 웃게 되는 게 불편했다.
***
펜트하우스에 돌아오자 강 비서는 보고 서류를 들고 차태혁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서율은 혼자 거실에 남았다. 잠시 앉으려다가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별채에 있을 때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연락할 말을 정리하려고 가방에서 일정표를 꺼냈다.
펜이 보이지 않았다. 차 안에 두고 온 듯했다.
직원에게 필기구를 물으려고 복도로 나갔다가 작은 다도실 앞에 멈췄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낮은 기계음이 들렸다.
벽에 걸린 묵매도 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지 끝에 성기게 맺힌 꽃이 좋았다. 서율은 습관처럼 그림 아래쪽까지 시선을 내렸다가 얼굴을 굳혔다.
족자 밑에 놓인 가습기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벽 가까이로 종이가 들떠 있었다.
먹선이 이어져야 할 자리에 가느다란 틈이 보였다.
서율은 손에 쥔 종이를 내려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 보증서로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정 팀장이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발급처에서 보내온 원본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서율이 먼저 표시했던 먹선 옆의 작은 빈틈이었다. 실물에서는 그 자리가 검게 메워져 있었다.“발급 당시 확인한 작품과 현재 출품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같은 작품이라고 입증할 자료가 올 때까지 거래를 중단하겠습니다.”민 여사는 손님들이 앉은 쪽을 먼저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번호판을 만지던 노인이 수행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얇아졌다.“보관하면서 수리했을 수도 있잖아요. 소장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시네요.”“요청한 기록에 그 수리가 없습니다.”서율이 파일을 펼쳤다. 민 여사는 그녀를 보지 않고 정 팀장에게 말을 이었다.“이사장인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박 선임이 서류 한 장을 받침 위에 놓았다. 갈라 전에 출품 담당자에게 보냈던 검토 의견이었다. 수신 확인 옆에는 이사장실로 전달했다는 회신이 붙어 있었다.민 여사의 시선이 그 종이에 닿았다.“제게 올라오는 문서를 제가 일일이 다 읽을 수는 없죠.”“그럼 담당자가 설명하면 되겠습니다.”태혁이 대답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민 여사가 서율에게로 돌리려던 화제를 다시 종이 위로 가져왔다.“오늘 실물을 무대로 바로 옮긴 이유도 같이 듣죠. 약속된 확인 시간을 없앤 사람이 누군지.”진행자가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출품 담당자는 무대 옆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태혁은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라고 몰아붙이는 대신, 거래 중단부터 손님들
“공개 감정을 하라는 말씀이세요?”서율이 묻자 민 여사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감정까지 거창하게 말할 건 없고. 우리 새아가 안목이 어떤지 손님들도 궁금해하시잖니.”“작품을 아직 못 봤어요. 먼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요.”“단상에 올라가면 보일 텐데.”민 여사는 서율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다정한 동작이었지만 놓아주는 시점은 자신이 정하려는 손이었다.태혁이 옆으로 다가왔다.“감정팀하고 약속한 확인 절차부터 진행하시죠.”“태혁아, 오늘은 손님들 모신 자리지 회의실이 아니야. 그 정도 인사도 못 해주겠다는 거니?”서율은 팔을 빼며 먼저 대답했다.“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거래를 진행해도 되는지는 감정팀에서 확인하셔야 하고요.”민 여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웃음을 되찾았다.“그래.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으니 잘하겠지.”그녀가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가자 태혁이 서율을 봤다.“거절해도 돼.”“알아요. 그런데 자료하고 다른 물건이면 누군가는 말해야 하잖아요.”“네가 꼭 그 사람일 필요는 없고.”서율은 파일을 내려다봤다. 검토자 이름이 적힌 첫 장은 안쪽으로 넣어두었다. 밖에서 자기 이름을 바로 밝히지 않기로 한 일과, 본 것을 말하지 않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다.“제가 발견해서 확인하자고 했어요. 마지막도 보고 싶어요.”태혁은 더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강 비서에게 확인실의 두 사람을 무대 가까이 안내해달라고 했다.객석에 앉은 뒤에도 서율은 물을 많이 마시지 못했다. 컵을 들면 손이 떨리는 게 보일까 봐 한 모금씩만 넘겼다. 태혁이 조용히 속삭였다.“물잔하고 싸우지 말고.”“떨리는 걸 어떡해요.”“나도 조금 떨리는데.”서율이 돌아봤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거짓말.”“지금 저기 올라가라고 하면 나보다 네가 잘할 테니까.”서율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태혁은 웃는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물잔을 들었다.경매는 순서대로 진행됐다. 누군가 번호판을 들 때마다 객석의 시선이 움직였다. 서율은 사람
갈라를 사흘 앞둔 오후, 서율은 정 팀장에게 보냈던 비교 사진을 다시 열었다.처음 의문을 적어 보낸 뒤로 2주가 지났다. 출품자는 보수 전후의 차이일 뿐이라고 답했지만, 그 말에 필요한 작업 기록은 아직 다 오지 않았다. 보증서를 발급한 쪽에서 보낸 원본 사진은 오히려 다른 부분을 더 보이게 했다.서율은 두 사진의 같은 글자 옆에 표시했다. 태혁은 맞은편에서 그 자리를 봤다.“사진만 보고 다르다고 할 수 있어?”“그래서 실물을 봐야 해요. 사진 찍은 각도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그런데 왜 자꾸 답을 미루는데.”“그건 제가 모르죠.”서율은 받은 회신을 읽어주었다. 작품은 별도 장소에 보관 중이고, 행사장에 입고된 뒤 지정된 시간에만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장자가 정한 일정이라고 했다.태혁의 표정이 굳었다.“거래 전에 확인부터 해야지. 사람 모아놓고 보여주겠다는 게 말이 되나.”“정 팀장님도 그 말 하셨어요. 확인 끝나기 전에는 낙찰 확정하지 말라고요.”그날 저녁 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실물 확인은 갈라 당일로 잡혔고, 감정팀 검토가 끝나지 않으면 거래를 확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서율은 확인 메일을 받아 폴더에 넣었다.당일 준비할 자료 목록이 늘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고르기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이었다.“발언하라고 하면 어디까지 할 거야?”태혁이 물었다.“제가 본 차이만요. 누가 가짜를 만들었다는 말은 못 하죠.”“민 여사가 그런 말만 하고 내려오게 둘 사람은 아니야.”서율은 초청장을 내려다봤다. 그 여자는 술 한 잔을 못 받는 것도 집안 예의의 문제로 바꿨다. 오늘은 어떤 말을 꺼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럼 안 나가는 게 나을까요?”“내가 싫은 건 네가 망신당하는 거지, 나가는 게 아니야.”태혁이 파일을 덮었다.“네 판단으로 말할 자리면 가. 한양유통 딸 노릇하러 가는 거면 가지 마.”서율은 그 말이 어렵게 느껴졌다.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같은 사람들 앞에 서는데 두 가지가 나뉠 수 있을까.그녀가
“수리한 적이 있네요.”서율이 족자 아래쪽을 가리켰다. 정 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는 상태표를 봤다.“그럼 위작입니까?”“아직은 모르죠.”서율은 새로 보강된 부분과 그림이 그려진 부분을 나눠 표시했다. 뒤에 댄 종이가 새것이라는 이유로 앞의 글씨까지 가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손을 거친 책들도 이전보다 새 종이가 붙어 돌아갔다.“여기 고친 건 맞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고쳤는지부터 보고 싶어요.”박 선임이 소장자가 보낸 이력표를 내밀었다. 보수 작업을 했다는 기록은 있었다. 다만 함께 붙어 있는 사진이 너무 작았다.서율은 돋보기를 내려놓고 청자 쪽으로 옮겨갔다. 입구의 작은 흠과 바닥 사진을 번갈아 봤다. 금동불상도 자료에 표시된 부분을 차례로 확인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두고 자신의 솜씨를 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모르는 것이 나오면 표에 물음표를 그렸다.“금속 쪽은 제가 판단할 범위가 아니에요. 여기 흔적이 수리인지 제작 때 생긴 건지 구분이 어렵네요.”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전문 담당자 의견을 받겠습니다. 서율 씨는 의심되는 부분만 남겨주세요.”서율은 다시 족자 앞에 섰다. 다른 두 점을 보는 동안에도 두 번째 줄의 먹선이 자꾸 눈에 밟혔다. 글씨가 서툴러서는 아니었다. 잘 쓰려고 멈춘 자리가 이상하게 같은 곳에 모여 있었다.그녀는 작가의 다른 서첩 자료를 부탁했다. 정 팀장이 화면을 열어주자 이번에는 앉아서 오래 봤다.원본 자료에서 빠르게 흘러간 획이 족자에서는 중간에 한 번씩 멎었다. 종이 탓일 수도, 붓 상태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 서율은 한 글자만 골라 말하지 않고 비슷한 흔적을 세 군데 더 찾아 표시했다.“이건 손이 망설인 것 같아요.”박 선임이 가까이 왔다.“왜 그렇게 보시죠?”“앞의 획을 끝내고 다음으로 가는 방향이 여기서 꺾여요. 그런데 다른 글자에도 같은 식으로 멈춘 곳이 있어요. 원래 이런 글씨를 쓰는 분인지부터 확인해야겠지만요.”서율은 자기 손으로 허공에 한 번 획을 그었다
도구를 돌려받고 일주일 뒤, 서율은 처음으로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그녀를 이사장실로 데려가려 했다.“보존팀하고 약속했어요.”서율이 말하자 직원이 방문 명단을 다시 봤다.“사모님께서 오신다고 해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옆에서 강 비서가 나서려는 걸 서율이 작은 손짓으로 막았다. 직원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쪽으로 접수되어 있었을 것이다.“정수현 팀장님한테 연락해주시면 돼요. 자료 보낸 사람이라고 해주세요.”서율은 손에 든 서류봉투를 가슴 아래로 내렸다. 며칠 동안 고른 작업 사진과 기록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에도 순서를 바꿔보다가 태혁에게 잠 좀 자라는 말을 들었다.지금은 그 봉투가 없었다면 여기 왜 왔는지부터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재단 건물은 한진규 집보다 밝았다. 그런데 복도 벽의 안내판에는 모르는 부서 이름이 가득했고, 직원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기 갈 곳으로 걸어갔다. 서율은 그들 뒤에 붙어 어느 문으로 들어가면 되는지 지켜봤다.잠시 뒤 정 팀장이 나왔다.“늦게 내려와서 죄송합니다. 이쪽입니다.”그는 강 비서에게 따로 보고하지 않고 서율을 작업실로 안내했다. 보안문을 통과할 때 방문증을 받았다. 이름란에는 사전에 적어 보낸 한서율이라는 글자가 있었다.“보내주신 이름으로 준비했습니다. 외부 공개 범위는 아직 조정 중이라고 들었습니다.”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곳에는 제가 설명할게요.”강 비서는 오후에 데리러 오겠다며 문밖에서 돌아갔다. 서율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문증을 옷깃에 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입으로 대답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됐다.작업실에는 정 팀장 외에 직원 두 사람이 있었다. 박 선임은 서율이 보낸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있었다. 인사를 받은 뒤 곧바로 질문이 나왔다.“이 작업, 직접 하신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서율은 화면 옆으로 갔다. 집에서 혼자 설명을 연습할 때는 잘 나오던 말이 사람들 앞에서는 목에 걸렸다.“여기 찢어진 부위하고, 하단부
어머니 사진은 그대로 있었다.서율은 봉안당 유리 앞에 서서 한동안 꽃병만 보았다. 저번에 놓고 간 꽃이 끝부터 시들어 있었다. 새 꽃을 꽂으려고 가져온 봉투가 손에서 바스락거렸다.옆에서 태혁이 물었다.“여기야?”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식당에서 헤어진 다음 날이었다. 명의 관련 검토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잠을 자다 깨면 빈 유리장부터 떠올라 아침 일찍 오겠다고 했다.태혁은 차를 준비해놓고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서율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한 번도 같이 온 적 없는 곳이었다.새 꽃의 포장을 벗기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태혁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이것만 들고 있을게.”서율은 마른 꽃을 거두고 물을 갈았다. 꽃의 방향을 바로잡느라 고개를 숙였는데, 옆에서 기다리는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왠지 어머니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꽃잎만 만졌다.“엄마, 나 왔어.”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며칠 못 올 줄 알았는데…… 그냥 왔어.”태혁은 사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누군지 길게 소개하지 않았고, 딸을 평생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발 물러서주자 서율은 유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거스른 것 때문에 이 얼굴까지 빼앗길 것 같아 겁이 났었다.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그 말을 믿었다.“다음에는 내 손으로 다 챙겨올게.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서율은 유리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뒤돌아보니 태혁은 복도 끝에서 빈 꽃봉투를 접고 있었다.관리 사무실에서는 미리 연락받은 직원이 계약 사본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법무 담당자는 기존 계약과 가족관계를 확인할 자료를 함께 검토하기로 했다. 서율은 자리에서 직접 이름을 말하고, 어떤 연락을 누구에게 보내는지 하나씩 물었다.그동안 변동 사항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서율은 그 말만으로도 의자에 기대고 싶었다. 아버지가 가능하다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