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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림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한다

Autor: YuIm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04 13:16:49

서율은 가습기부터 껐다.

기계음이 멎자 복도에 있던 직원이 들어왔다. 직원은 서율과 벽의 족자를 번갈아 보며 걸음을 멈췄다.

“사모님, 이 방은 대표님 허락 없이 물건을 옮기시면 안 됩니다.”

“옮기려는 게 아니에요. 이쪽 좀 봐주세요.”

서율은 그림에 손을 대지 않고 벽을 가리켰다. 가습기 바로 위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작품 밑단은 들떴고, 바닥에는 아주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직원이 무릎을 굽혔다.

“청소하면서 주워버릴 뻔했네요.”

“버리지 마세요.”

서율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직원의 손이 멈췄다.

“그림에서 떨어진 조각일 수도 있어요. 다른 것하고 섞이면 찾기 어려워요.”

서율은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붓을 감싸두었던 깨끗한 보존지를 펴고, 떨어진 조각을 받칠 작은 판을 찾았다. 찻상 위에 놓인 차 도구 상자의 빈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 잠깐 써도 될까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차 도구를 치웠다. 서율은 떨어진 조각을 따로 받쳐두었다. 그림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손대기 전에 어디가 들떴고 어떤 부분이 떨어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담당하는 분 계시면 불러주세요. 가습기는 다시 켜지 마시고요.”

“그렇게 심각한 건가요?”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게 해야죠.”

짧은 대답을 마친 서율은 족자의 아래쪽을 다시 보았다. 갈라진 곳 위로 가지가 이어져 있었다. 한쪽 획의 끝이 떨어져 나가 꽃잎과 나뭇가지의 경계가 끊겼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저런 그림 앞에서 같은 말을 했었다. 작은 조각이라고 먼저 버리지 말라고. 잃어버린 뒤에는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원래 것을 붙여놓을 수 없다고.

“그만.”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율은 손을 멈췄다. 차태혁이 서 있었다. 조금 전 차 안에서 보았던 표정이 아니었다. 웃음이 걷힌 얼굴보다, 문턱을 넘지 않고 방 안의 물건부터 확인하는 눈길이 더 낯설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습기가 너무 많이 닿고 있어서요.”

“누가 만져도 된다고 했어?”

서율은 들고 있던 보존지를 내려놓았다. 직원이 급히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이 그림을 옮기신 건 아닙니다. 가습기만 끄시고?”

“잠깐 나가 계세요.”

직원이 물러났다. 서율은 가방을 닫지 못한 채 작업대 옆에 섰다. 더 손대지 말라고 하면 물러나야 했다. 자기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죄송해요. 먼저 여쭤봤어야 했는데.”

차태혁이 그림 앞으로 왔다. 바닥에 받쳐둔 종잇조각을 보고 멈췄다.

“이게 떨어진 거야?”

“들어왔을 때 바닥에 있었어요.”

“당신이 떼어낸 게 아니고.”

서율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다친 손이 그림 쪽으로 올라갔다.

“만지지 마세요.”

차태혁의 손이 멎었다. 서율도 숨을 멈췄다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누르면 옆에 붙어 있는 부분까지 떨어질 수 있어요.”

그는 손을 내렸다. 한동안 그림만 보았다.

“내 어머니 유품이야.”

서율은 고개를 들었다.

그 말 뒤 차태혁이 더 덧붙이지 않는 동안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서율에게는 상태가 나쁜 그림이었는데, 그에게는 누가 손대도 되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모르고 들어왔어요.”

“알았으면?”

서율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가습기, 젖은 벽, 받쳐둔 조각을 차례로 보았다.

“먼저 차태혁 씨를 불렀겠죠. 그래도 가습기는 껐을 거예요.”

남자가 돌아봤다. 서율은 파우치 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손대지 말라는 건 지킬 수 있어요. 그런데 눈앞에서 망가지는데 못 본 척하는 건 잘 안 돼요.”

차태혁은 탁자 가장자리에 손을 짚었다. 드레싱 아래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어머니 돌아가시고는 이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어. 한동안은.”

“그림도 그대로였고요?”

“옮기는 게 싫었으니까.”

서율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어머니가 쓰던 그릇 하나도 위치가 달라지면 집에 돌아온 느낌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쓰던 사람이 없어진 방은 똑같은 자리에 둔다고 그대로 남아주지 않았다.

“벽에서 조금 떨어뜨릴 수 있도록 담당자한테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요. 상태도 자세히 확인해야 하고요.”

“고칠 수 있어?”

그 질문은 앞선 것보다 낮았다. 서율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일단 제대로 봐야 해요. 어디까지 남아 있는지부터요.”

“지금 보면 되잖아.”

“여기 있는 도구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리고……”

서율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나서는 순간 한서우와는 더 멀어질 것이다. 아침에도 골프 얘기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걸 설명해야 했다.

차태혁이 가방 옆에 펼쳐진 도구를 보았다.

“그런 건 골프 배우다 같이 배운 건가?”

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붓 잡는 손도, 저 조각 만지는 것도 익숙하네.”

그가 더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 서율은 등 뒤가 막힌 기분이었다. 변명할 말을 찾으려다 그만뒀다. 적어도 이 방에 들어온 이유만큼은 거짓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표구사에서 일하셨어요.”

차태혁의 시선이 도구에서 서율에게 옮겨왔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요. 어릴 때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배웠어?”

“처음엔 옆에서 종이만 눌러드렸어요. 제가 조금만 움직여도 풀이 밀린다고 잔소리를 많이 하셨고요.”

그림의 가지를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어려운 일을 시켜놓고 늘 엄하게 혼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서율 몫의 작은 붓을 작업대에 올려놨다.

“부탁도 안 했는데 손댄 건 제 잘못이에요. 다만 더 망가뜨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서율은 차태혁을 똑바로 보았다. 거기까지는 설명하고 싶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서율이 내려놓은 보존지 옆에 비뚤어진 뚜껑을 바로 놓았다. 상처 난 손을 쓰려는 걸 서율이 보고 대신 밀어주었다.

“그 손으로는 하지 마세요.”

“여기서도 환자 취급이군.”

“다치셨으니까요.”

조금 전보다 덜 딱딱해진 목소리에 서율의 어깨도 내려갔다. 차태혁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방의 상태를 기록하고 보존 담당자를 부르라고 했다.

“고치겠다고 바로 뜯지 말고요. 먼저 확인부터.”

그가 전화를 끊었다. 서율은 흩어진 물건을 정리하려 했다. 차태혁이 빈 파우치를 가리켰다.

“이것도 집에서 가져오겠다는 물건들이랑 같은 건가?”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싸구려예요. 오래 쓰기도 했고.”

말하고 나서 왜 그런 설명을 붙였는지 후회했다. 비싼 그림을 함부로 만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먼저 물러선 것 같았다.

차태혁은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잘 쓰는지 물었지, 얼마짜린지 안 물었어.”

서율은 파우치에 붓을 넣다가 멈췄다.

“일단 놓고 가.”

“제 도구를요?”

“그림도. 아직 다 안 봤잖아.”

“제가 계속 봐도 돼요?”

“다른 사람 오면 같이 설명해줘. 아까 본 것부터.”

한서우를 연기하라는 부탁이 아니었다. 서율이 보고 아는 것을 말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서율은 도구를 다시 꺼내놓았다. 손수건 한 장을 접어 소매가 그림에 닿지 않게 정리했다. 차태혁이 그 손을 보고 있다가 낮게 말했다.

“그림 앞에선 아까 식탁에서랑 다른 사람이네.”

서율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어떻게 다른데요?”

“내가 보고 있어도 하던 걸 안 멈춰.”

서율은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그 앞에서 한서율로 있는 순간이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다.

보존 담당자를 기다리는 동안 서율은 별채를 관리하던 직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돌려드려야 하는 고서는 건드리지 말고, 주인에게 하루만 양해를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약속을 미루는 게 마음에 걸려 사과도 덧붙였다. 짐을 찾게 되면 그 책부터 다시 봐야 했다.

보존 담당자가 와서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서율은 다도실을 나왔다. 당장 원형을 되돌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조각을 따로 보관하고, 다음 점검 때 무엇을 더 확인할지 정했다.

그래도 방에서 나올 때는 들어갈 때보다 발걸음이 조금 가벼웠다.

서율은 거실 소파에 앉아 일정표 뒷면을 다시 펼쳤다. 차에 두고 온 줄 알았던 펜은 가방 안쪽에 있었다. 도구 이름을 적다가 한 번 멈추고, 지우지 않고 계속 썼다.

그동안 자신이 쓰는 물건을 이렇게 자세히 챙겨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

안쪽 집무실에서는 차태혁이 강 비서에게 문서를 돌려주고 있었다.

“한양 쪽에서 준 신원 자료, 확인 다시 해요.”

강 비서가 문서를 받았다.

“어느 부분 말씀이십니까?”

“한서우가 최근에 어디 있었는지. 한 회장이 하는 말 말고 실제 일정으로.”

“어제 예식 전후 동선도 확인하겠습니다.”

차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도실에서 서율은 말을 고르느라 잠깐씩 멈췄지만 그림 상태를 설명할 때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봐도 숨기지 않던 손끝이 눈에 남았다.

“배우자 관련 추가 서류는 어떻게 할까요?”

“보류해요. 잘못된 이름에 서명부터 더 받지 말고.”

강 비서가 잠시 그를 보았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차태혁은 닫힌 문을 보았다. 의심한 것이 사실이라면 물어야 할 말이 많았다. 그런데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젯밤 입술을 다친 이유였다.

***

가방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서율은 적던 목록을 접어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한진규에게 답장을 보낸 뒤로 조용하던 전화였다. 이번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언니. 나야.]

서율의 손이 멈췄다.

곧바로 사진 하나가 전송됐다. 화려한 조명 아래, 술잔을 들고 있는 한서우가 보였다. 한쪽 어깨에 걸린 남자의 팔도.

서율은 사진을 확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마카오야. 돈 다 떨어졌어.]

[10억만 보내. 차태혁한테 받으면 되잖아.]

낡은 붓을 몇 자루 더 챙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손으로, 서율은 화면을 꽉 움켜쥐었다.

마지막 메시지가 올라왔다.

[안 보내면 내가 직접 돌아가서 말한다. 언니가 가짜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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