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차태혁은 잔보다 서율을 먼저 보았다. 서율은 테이블 아래에서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
“죄송하지만 술은 못 마시겠어요.”
민 여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못 마셔? 어제는 와인이 부족하다고 하더니.”
테이블 건너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서율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어제의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기분이 이런 걸까. 대답하기 전에 자꾸 남의 기억부터 찾아야 했다.
“오늘은 속이 좋지 않아서요.”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몸 사리면 되겠니. 우리 집에서 처음 받는 잔인데.”
집사가 술병을 든 채 서 있었다. 서율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민 여사가 웃음을 거뒀다.
“마음만.”
그 말을 천천히 되풀이하는 동안 누구도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서율은 접시 옆에 놓인 수저를 내려다봤다. 집에서도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면 가장 먼저 자신의 잘못부터 찾곤 했다.
손이 잔 쪽으로 움직였다. 마시면 끝날 일이었다. 조금만 넘기고, 아프면 나중에 혼자 참으면 됐다.
차태혁이 잔을 가져갔다.
“안 마신답니다.”
“네가 왜 대답하니?”
“본인이 두 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민 여사는 차태혁을 잠시 노려보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제야 집사가 술병을 들고 물러났다. 서율은 무릎 위의 손을 꼭 맞잡았다.
“태혁이 네가 결혼하면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유난스러울 줄은 몰랐구나.”
“달라진 건 없습니다. 저도 싫은 술 안 마십니다.”
“네 얘기 하는 게 아니잖니.”
“제 아내 얘기여서 하는 말입니다.”
맞은편 남자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형님, 식사 자리에서 너무 날 세우지 마세요. 어머니도 새 식구한테 잘해주시려는 거죠.”
차정민이었다. 차태혁의 이복동생. 아침에 강 비서가 전달한 참석자 이름 옆에 성진물산 상무라고 적혀 있었다.
서율은 그제야 그를 보았다. 차정민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
“형수님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가족끼리인데.”
가족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서율은 고개만 끄덕였다.
식사가 시작됐다.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지자 서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차태혁이 옆에서 물잔을 바꿔놓았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은 자신의 접시 바깥쪽에 내려놨다.
“먹어.”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서율은 국을 한 숟가락 떴다. 따뜻한 국물이 목으로 넘어가는 동안 민 여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달 자선 경매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작품 운송 때문에 애를 먹겠어. 보험 조건도 까다롭고, 일정은 촉박하고.”
차정민이 기다렸다는 듯 가죽 서류철을 열었다.
“한양유통 쪽에 맡기면 되죠. 한 회장님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서율은 수저를 멈췄다. 차정민이 얇은 봉투 하나를 집사에게 건넸다. 봉투는 서율의 접시 옆에 놓였다.
“전달받으셨는지만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어제는 정신없어서 못 드렸네요.”
한양유통 물류시설 사용 협의안.
겉면에 적힌 제목 아래로 한서우의 이름이 보였다. 서율은 봉투를 돌려보았다. 입구는 막힌 채였고, 위에 붙인 작은 종이에는 확인란이 비어 있었다.
“제가 확인하는 건가요?”
“한 회장님이 따님 통해서 받으면 된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양쪽 집안에 다 발 걸치고 계시니 편하잖아요.”
차정민이 펜을 내밀었다. 말은 농담이었지만 손은 기다리고 있었다.
서율은 펜을 받지 않았다.
“내용을 못 봤는데요.”
“읽으시라는 게 아니라 전달 확인입니다.”
“그럼 아버지한테 직접 보내시면 되겠네요.”
민 여사가 물잔을 내려놓았다.
“서우야. 정민이가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게 아니잖니.”
서율은 봉투를 무릎에 내려놓지 않고 테이블 위에 그대로 뒀다. 한진규가 자신을 통해 뭘 받으려는지 모르는데 서우 이름으로 사인할 수는 없었다.
“제가 들고 가는 동안 늦어질 수도 있잖아요. 중요한 서류면 회사로 보내주세요.”
차정민의 펜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옆에 앉은 차태혁이 그 손을 보았다.
“그게 맞겠네.”
차정민이 웃었다.
“형수님이 생각보다 꼼꼼하시네요.”
서율은 봉투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 손이 떨리는 게 보이지 않도록 봉투 모서리를 누른 채 천천히 움직였다.
“받았다고 해놓고 못 전해드리면 제 책임이 되니까요.”
“집안끼리 그 정도 편의도 못 봐주나?”
민 여사가 차태혁을 향해 말했다.
“저 애 아버지 회사 살리는 데 우리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서율은 이미 먹은 음식이 목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집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조건으로 왔는지 잊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아니, 자신에게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차태혁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돈은 제가 검토해서 빌려준 겁니다. 이 사람한테 대신 갚으라고 하실 일 아닙니다.”
“네가 왜 자꾸 대신 대답해?”
“대답을 못 들으신 것 같아서요.”
테이블 끝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서율은 차태혁의 옆얼굴을 보았다. 아침부터 자신의 말 한마디를 그냥 넘기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미 들은 말을 되풀이하게 두지 않았다.
민 여사가 입가를 닦았다.
“한양유통 딸이 시집 잘 온 건 확실하네. 아버지도 이제 한숨 놓으시겠어.”
서율은 눈을 내렸다. 그 말에는 웃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하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맞은편의 차정민이 다시 봉투를 집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 회장님께 말씀드리죠. 따님이 못 받겠다고 하셨다고.”
서율의 손끝이 굳었다. 아버지가 받을 전화의 내용이 머릿속에 바로 그려졌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다가 자신에게만 목소리를 낮출 것이다. 네 어미 자리를 아직도 지킬 마음이 없냐고.
차정민은 그 반응을 보았다. 입가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차태혁이 먼저 말했다.
“내가 회사로 보내라고 했다고 전해.”
“형님.”
“한 회장도 궁금하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하고.”
민 여사가 자리에서 몸을 세웠다.
“고작 봉투 하나 가지고 유세가 대단하구나. 가족이 된 첫날부터 이렇게 굴어서 앞으로 어떻게 보려고 그래?”
손이 움직이며 서율 쪽으로 술잔이 다시 밀려왔다. 차태혁이 자기 앞에 치워놓았던 잔이었다.
“일단 받아. 술 한 잔 받는 것부터 못 하겠다면?”
서율은 잔을 피하려다 팔을 테이블에 부딪쳤다. 잔이 기울어졌고, 차태혁이 손을 뻗었다.
얇은 유리가 접시 모서리에 부딪혀 깨졌다. 테이블보 위로 술이 번지는 동시에 그가 뻗은 오른손 손바닥에 붉은 줄이 생겼다.
“손!”
서율이 냅킨을 집었다. 집사가 달려와 유리 조각을 치우는 동안 차태혁은 다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바로 구급함 가져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요.”
서율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차태혁이 돌아보자 먼저 접은 냅킨을 내밀었다.
“이걸로 누르세요. 내려놓지 말고요.”
민 여사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게들 놀랄 일이니.”
서율은 유리가 섞인 식탁보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술 한 잔만 마시면 끝날 줄 알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자리에서 원하는 건 처음부터 술을 마시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시키는 대로 하는지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태혁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음식도 안 끝났는데?”
“다음에는 술 없는 자리로 하시죠.”
차정민이 따라 일어났다. 그는 수습하듯 웃으며 차태혁의 팔을 잡으려 했다.
“형님, 잠깐만요. 어머니 체면도 생각하셔야죠.”
차태혁이 손을 피했다.
“네가 정리할 일부터 해.”
“무슨 말씀인지.”
“지난달 상하이 법인에 보낸 돈. 증빙 다시 가져오라고 했지.”
처음으로 차정민의 웃음이 사라졌다. 서율은 두 사람 사이를 살폈다. 차태혁은 그 반응을 확인하고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참고 있었는데.”
차정민은 더 붙잡지 못했다. 차태혁이 서율 쪽으로 손을 내밀려다 냅킨을 쥔 자기 손을 보고 멈췄다. 대신 길을 비켜주었다.
“가자.”
서율은 자리에 놓아둔 가방을 들었다. 아버지 회사 이름이 적힌 봉투는 가져가지 않았다.
현관으로 가는 복도가 길었다.
식당에서는 보이지 않던 그림들이 벽을 따라 걸려 있었다. 서율은 평소 같으면 걸음을 늦추고 볼 만한 작품 앞에서도 그냥 지나쳤다. 지금은 앞서 걷는 남자의 손만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가요.”
차태혁이 멈췄다. 서율은 보폭을 따라잡고 그의 손을 봤다. 냅킨을 제대로 누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들고만 있으면 뭐 해요.”
“많이 안 다쳤어.”
“피가 나는데요.”
그가 냅킨을 접어 다시 쥐었다. 서율은 괜히 자기 가방 끈을 고쳐 맸다. 한숨이 나왔다.
“제가 그냥 받아놓을걸 그랬어요.”
차태혁이 그녀를 보았다.
“뭘.”
“술이든 봉투든요. 나중에 안 마시거나 안 보내면 됐는데.”
“그럼 다음엔 또 받으라고 했겠지.”
서율은 입을 다물었다. 차태혁이 한 걸음 가까이 와 목소리를 낮췄다.
“아까 잘했어.”
서율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 때문에 식사도 못 하셨잖아요.”
“배고프면 나가서 먹으면 돼.”
현관문이 열렸다. 대기하던 강 비서가 피 묻은 냅킨을 보자 표정을 바꾸고 전화기를 꺼냈다. 차태혁은 설명 대신 서율의 차 문부터 열었다.
서율은 타기 전에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차태혁 씨.”
“왜.”
“아까 고마웠어요.”
그가 잠깐 말이 없었다. 서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에 올랐다. 어제부터 고맙다는 말조차 조심해야 했는데, 이번엔 그냥 말하고 싶었다.
차태혁이 옆자리에 앉았다. 문이 닫히자 식당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서율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무릎 위에 폈다.
“이제 손 주세요.”
냉장고 문을 연 서율은 고개부터 돌렸다.어젯밤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반찬 냄새가 유난히 강했다. 물병만 꺼내 문을 닫았는데도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싱크대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갈라 검토 결과가 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긴장이 풀려 그런가 싶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은 건 밤늦게 태혁과 마주 앉아 먹은 국수 정도였으니까.거실로 나온 태혁이 빈 컵을 보았다.“벌써 일어났어?”“아침 좀 해보려고요.”그가 주방 시계를 올려다봤다. 늘 준비해주는 사람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오늘 무슨 날인데.”“꼭 무슨 날이어야 해요? 저도 달걀 정도는 구워요.”“그 정도인 줄 알았으면 큰 기대 안 할 걸.”서율이 눈을 흘기자 그가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 달걀을 꺼내려는 손을 서율이 막았다.“주는 대로 먹을 사람은 앉아 있어요.”“물은 내가 끓여도 되지?”두 사람이 좁은 조리대 앞에서 한 번씩 몸을 비켰다. 넓은 주방인데도 같은 서랍을 열려다 손이 겹쳤다. 서율은 수저가 어디 있는지 아직 잘 몰랐고, 태혁은 접시를 찾느라 문을 두 개나 열었다.“여기 사는 분 맞죠?”“대체로 먹는 쪽이었어.”서율은 웃으며 작은 팬을 올렸다. 하지만 기름이 데워지는 냄새를 맡는 순간 입안에 침이 고였다. 불을 끄고 뒤로 물러서자 태혁이 손에 든 접시를 내려놨다.“데었어?”“아니요. 냄새가 좀…….”말을 끝내기 전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서율은 입을 가리
“이 보증서로는 판매할 수 없습니다.”정 팀장이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발급처에서 보내온 원본 사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서율이 먼저 표시했던 먹선 옆의 작은 빈틈이었다. 실물에서는 그 자리가 검게 메워져 있었다.“발급 당시 확인한 작품과 현재 출품작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같은 작품이라고 입증할 자료가 올 때까지 거래를 중단하겠습니다.”민 여사는 손님들이 앉은 쪽을 먼저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번호판을 만지던 노인이 수행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얇아졌다.“보관하면서 수리했을 수도 있잖아요. 소장자에게 물어보면 될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시네요.”“요청한 기록에 그 수리가 없습니다.”서율이 파일을 펼쳤다. 민 여사는 그녀를 보지 않고 정 팀장에게 말을 이었다.“이사장인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박 선임이 서류 한 장을 받침 위에 놓았다. 갈라 전에 출품 담당자에게 보냈던 검토 의견이었다. 수신 확인 옆에는 이사장실로 전달했다는 회신이 붙어 있었다.민 여사의 시선이 그 종이에 닿았다.“제게 올라오는 문서를 제가 일일이 다 읽을 수는 없죠.”“그럼 담당자가 설명하면 되겠습니다.”태혁이 대답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민 여사가 서율에게로 돌리려던 화제를 다시 종이 위로 가져왔다.“오늘 실물을 무대로 바로 옮긴 이유도 같이 듣죠. 약속된 확인 시간을 없앤 사람이 누군지.”진행자가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출품 담당자는 무대 옆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태혁은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해명하라고 몰아붙이는 대신, 거래 중단부터 손님들
“공개 감정을 하라는 말씀이세요?”서율이 묻자 민 여사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감정까지 거창하게 말할 건 없고. 우리 새아가 안목이 어떤지 손님들도 궁금해하시잖니.”“작품을 아직 못 봤어요. 먼저 확인할 시간이 필요해요.”“단상에 올라가면 보일 텐데.”민 여사는 서율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다정한 동작이었지만 놓아주는 시점은 자신이 정하려는 손이었다.태혁이 옆으로 다가왔다.“감정팀하고 약속한 확인 절차부터 진행하시죠.”“태혁아, 오늘은 손님들 모신 자리지 회의실이 아니야. 그 정도 인사도 못 해주겠다는 거니?”서율은 팔을 빼며 먼저 대답했다.“제가 아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거래를 진행해도 되는지는 감정팀에서 확인하셔야 하고요.”민 여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웃음을 되찾았다.“그래.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으니 잘하겠지.”그녀가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가자 태혁이 서율을 봤다.“거절해도 돼.”“알아요. 그런데 자료하고 다른 물건이면 누군가는 말해야 하잖아요.”“네가 꼭 그 사람일 필요는 없고.”서율은 파일을 내려다봤다. 검토자 이름이 적힌 첫 장은 안쪽으로 넣어두었다. 밖에서 자기 이름을 바로 밝히지 않기로 한 일과, 본 것을 말하지 않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다.“제가 발견해서 확인하자고 했어요. 마지막도 보고 싶어요.”태혁은 더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강 비서에게 확인실의 두 사람을 무대 가까이 안내해달라고 했다.객석에 앉은 뒤에도 서율은 물을 많이 마시지 못했다. 컵을 들면 손이 떨리는 게 보일까 봐 한 모금씩만 넘겼다. 태혁이 조용히 속삭였다.“물잔하고 싸우지 말고.”“떨리는 걸 어떡해요.”“나도 조금 떨리는데.”서율이 돌아봤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거짓말.”“지금 저기 올라가라고 하면 나보다 네가 잘할 테니까.”서율은 그제야 조금 웃었다. 태혁은 웃는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물잔을 들었다.경매는 순서대로 진행됐다. 누군가 번호판을 들 때마다 객석의 시선이 움직였다. 서율은 사람
갈라를 사흘 앞둔 오후, 서율은 정 팀장에게 보냈던 비교 사진을 다시 열었다.처음 의문을 적어 보낸 뒤로 2주가 지났다. 출품자는 보수 전후의 차이일 뿐이라고 답했지만, 그 말에 필요한 작업 기록은 아직 다 오지 않았다. 보증서를 발급한 쪽에서 보낸 원본 사진은 오히려 다른 부분을 더 보이게 했다.서율은 두 사진의 같은 글자 옆에 표시했다. 태혁은 맞은편에서 그 자리를 봤다.“사진만 보고 다르다고 할 수 있어?”“그래서 실물을 봐야 해요. 사진 찍은 각도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그런데 왜 자꾸 답을 미루는데.”“그건 제가 모르죠.”서율은 받은 회신을 읽어주었다. 작품은 별도 장소에 보관 중이고, 행사장에 입고된 뒤 지정된 시간에만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장자가 정한 일정이라고 했다.태혁의 표정이 굳었다.“거래 전에 확인부터 해야지. 사람 모아놓고 보여주겠다는 게 말이 되나.”“정 팀장님도 그 말 하셨어요. 확인 끝나기 전에는 낙찰 확정하지 말라고요.”그날 저녁 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실물 확인은 갈라 당일로 잡혔고, 감정팀 검토가 끝나지 않으면 거래를 확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 서율은 확인 메일을 받아 폴더에 넣었다.당일 준비할 자료 목록이 늘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고르기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이었다.“발언하라고 하면 어디까지 할 거야?”태혁이 물었다.“제가 본 차이만요. 누가 가짜를 만들었다는 말은 못 하죠.”“민 여사가 그런 말만 하고 내려오게 둘 사람은 아니야.”서율은 초청장을 내려다봤다. 그 여자는 술 한 잔을 못 받는 것도 집안 예의의 문제로 바꿨다. 오늘은 어떤 말을 꺼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럼 안 나가는 게 나을까요?”“내가 싫은 건 네가 망신당하는 거지, 나가는 게 아니야.”태혁이 파일을 덮었다.“네 판단으로 말할 자리면 가. 한양유통 딸 노릇하러 가는 거면 가지 마.”서율은 그 말이 어렵게 느껴졌다.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같은 사람들 앞에 서는데 두 가지가 나뉠 수 있을까.그녀가
“수리한 적이 있네요.”서율이 족자 아래쪽을 가리켰다. 정 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는 상태표를 봤다.“그럼 위작입니까?”“아직은 모르죠.”서율은 새로 보강된 부분과 그림이 그려진 부분을 나눠 표시했다. 뒤에 댄 종이가 새것이라는 이유로 앞의 글씨까지 가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기 손을 거친 책들도 이전보다 새 종이가 붙어 돌아갔다.“여기 고친 건 맞지만, 언제 무슨 이유로 고쳤는지부터 보고 싶어요.”박 선임이 소장자가 보낸 이력표를 내밀었다. 보수 작업을 했다는 기록은 있었다. 다만 함께 붙어 있는 사진이 너무 작았다.서율은 돋보기를 내려놓고 청자 쪽으로 옮겨갔다. 입구의 작은 흠과 바닥 사진을 번갈아 봤다. 금동불상도 자료에 표시된 부분을 차례로 확인했다. 처음 보는 물건을 두고 자신의 솜씨를 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모르는 것이 나오면 표에 물음표를 그렸다.“금속 쪽은 제가 판단할 범위가 아니에요. 여기 흔적이 수리인지 제작 때 생긴 건지 구분이 어렵네요.”정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전문 담당자 의견을 받겠습니다. 서율 씨는 의심되는 부분만 남겨주세요.”서율은 다시 족자 앞에 섰다. 다른 두 점을 보는 동안에도 두 번째 줄의 먹선이 자꾸 눈에 밟혔다. 글씨가 서툴러서는 아니었다. 잘 쓰려고 멈춘 자리가 이상하게 같은 곳에 모여 있었다.그녀는 작가의 다른 서첩 자료를 부탁했다. 정 팀장이 화면을 열어주자 이번에는 앉아서 오래 봤다.원본 자료에서 빠르게 흘러간 획이 족자에서는 중간에 한 번씩 멎었다. 종이 탓일 수도, 붓 상태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 서율은 한 글자만 골라 말하지 않고 비슷한 흔적을 세 군데 더 찾아 표시했다.“이건 손이 망설인 것 같아요.”박 선임이 가까이 왔다.“왜 그렇게 보시죠?”“앞의 획을 끝내고 다음으로 가는 방향이 여기서 꺾여요. 그런데 다른 글자에도 같은 식으로 멈춘 곳이 있어요. 원래 이런 글씨를 쓰는 분인지부터 확인해야겠지만요.”서율은 자기 손으로 허공에 한 번 획을 그었다
도구를 돌려받고 일주일 뒤, 서율은 처음으로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그녀를 이사장실로 데려가려 했다.“보존팀하고 약속했어요.”서율이 말하자 직원이 방문 명단을 다시 봤다.“사모님께서 오신다고 해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옆에서 강 비서가 나서려는 걸 서율이 작은 손짓으로 막았다. 직원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쪽으로 접수되어 있었을 것이다.“정수현 팀장님한테 연락해주시면 돼요. 자료 보낸 사람이라고 해주세요.”서율은 손에 든 서류봉투를 가슴 아래로 내렸다. 며칠 동안 고른 작업 사진과 기록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에도 순서를 바꿔보다가 태혁에게 잠 좀 자라는 말을 들었다.지금은 그 봉투가 없었다면 여기 왜 왔는지부터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재단 건물은 한진규 집보다 밝았다. 그런데 복도 벽의 안내판에는 모르는 부서 이름이 가득했고, 직원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기 갈 곳으로 걸어갔다. 서율은 그들 뒤에 붙어 어느 문으로 들어가면 되는지 지켜봤다.잠시 뒤 정 팀장이 나왔다.“늦게 내려와서 죄송합니다. 이쪽입니다.”그는 강 비서에게 따로 보고하지 않고 서율을 작업실로 안내했다. 보안문을 통과할 때 방문증을 받았다. 이름란에는 사전에 적어 보낸 한서율이라는 글자가 있었다.“보내주신 이름으로 준비했습니다. 외부 공개 범위는 아직 조정 중이라고 들었습니다.”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필요한 곳에는 제가 설명할게요.”강 비서는 오후에 데리러 오겠다며 문밖에서 돌아갔다. 서율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문증을 옷깃에 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입으로 대답해야 하는 시간이 시작됐다.작업실에는 정 팀장 외에 직원 두 사람이 있었다. 박 선임은 서율이 보낸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있었다. 인사를 받은 뒤 곧바로 질문이 나왔다.“이 작업, 직접 하신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서율은 화면 옆으로 갔다. 집에서 혼자 설명을 연습할 때는 잘 나오던 말이 사람들 앞에서는 목에 걸렸다.“여기 찢어진 부위하고, 하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