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맑은 물결 한 자락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몸의 화상은 이미 말끔히 처치되어 있었다.

흐릿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곳이 냉궁이 아니라 황제의 침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아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바마마께서는 자주 나와 태자 오라버니를 품에 안고 이곳에서 글을 읽고 글씨를 가르쳐 주셨다.

그때마다 어마마마께서는 손수 만든 계화떡을 들고 오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맛이 어떠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깨어났군.”

그때 타나오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내 턱을 거칠게 붙잡더니, 기혈을 보하는 쓰디쓴 탕약 한 사발을 억지로 입에 들이부었다.

그러자 나는 곧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고,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어렸다.

“진하선, 그런 가엾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

타나오윤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네 손에 직접 우리 부족의 피를 묻힌 적이 없다 한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너 역시 죄가 없지는 않다.”

진나라가 멸망하던 날, 타나오윤은 황실의 핏줄을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내 뱃속에서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아이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친자식이었지만, 그는 살려 두지 않았다.

유독 나만 살려두었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증오이었을까?’

‘아마 증오였을 것이다.’

‘해서 그 뒤로 밤마다 나를 사향을 풀어 놓은 차디찬 못에 담가 두었겠지.’

‘다시는 아이를 품지 못하게 하려고.’

‘내가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그는 나를 혐오하고, 내 핏줄을 불결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입가에 묻은 약물을 닦아 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태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하옵니다!”

타나오윤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황후가 회임을 했다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처음 아비가 된 기쁨이 선명하게 번지고 있었다.

고충이 또다시 몸속을 갉아먹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아팠다.

나는 처음에 고독이 발작하면, 냉궁에서 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나오윤은 하필 이때 나를 신은수의 곁으로 보내 시중들게 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해야 가장 고통스러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 목숨만 끊으면 그만일 터, 하지만 그는 기어이 내 두 눈으로 다른 여인이 그의 아이를 품고 낳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려 했다.

정작 우리 아이는 그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

그 아이는 지금도 뒷산에 홀로 묻혀 있었다.

비석 하나조차 세워지지 않은 채 홀로 외로이.

한편 신은수는 나를 향해 온화하게 웃었다.

“동생은 본디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니던가. 폐하께서 내 시중을 들라 하셨다 해도 차마 험한 일을 시킬 수야 없지.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나 깨끗이 쓸어 주게.”

나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 가득 떨어진 복사꽃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궁녀들은 내 처지가 우스운 듯 거리낌 없이 흘겨보며 저마다 조롱을 늘어놓았다.

“망국의 공주를 냉궁에 가둬 두는 데 그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 황후마마께서 워낙 어지시니 아직도 친하게 대하는 것이지?”

“금지옥엽은 무슨. 이제는 가장 천한 첩실보다도 못한 신세면서. 폐하께 진작 버림받고도 저리 악착같이 살아 있는 걸 보면 참 낯도 두껍지.”

그 말을 듣는 동안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이 하나둘 돋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코끝을 타고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무심코 손을 들어 훔쳐 본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악!”

신은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타나오윤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은 채 내 뺨부터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몸이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흩어진 복사꽃잎이 허공으로 와르르 날아올랐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지금 피 냄새조차 맡아서는 아니 되거늘, 네년은 지금 일부러 황후를 해치려는 것이냐?!”

타나오윤의 눈빛은 살을 에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네년이 아이를 잃었다고 그 한을 남에게 풀려는 것이냐? 진하선, 짐의 명을 거역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벌써 잊었느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온몸을 파고드는 가려움과 오장육부를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모두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모두 이 미천한 것의 잘못이오니,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어마마마의 유해는 이미 채찍에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아바마마와 태자 오라버니의 무덤 또한 불에 타 흔적조차 남지 않았사옵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폐하... 이제 제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사옵니다.”

타나오윤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손끝으로 내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

“누가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느냐?”

“뒷산에 아직 하나 묻혀 있지 않느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21화

    순간 온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하지만 타나오윤은 누구에게도 반대할 틈을 주지 않았다.사흘 만에 황위를 넘긴다는 교서를 작성하고 옥새까지 내놓았다.타나오윤이 왕으로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진하선의 장례를 황후의 예에 따라 성대히 치르는 것이었다.봉호는 영안이었다.진하선은 황릉 한가운데에 안장되었고, 바로 곁에는 ‘안청’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모자는 그제야 다시 만났다.진하선을 입관하던 날, 타나오윤은 새로 만든 황후의 예관을 직접 관 안에 넣어 주었다.신은수가 썼던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순금과 동해의 진주로 밤새 새로 만들게 한 것이었다.진하선은 살아 있는 동안 황후의 예복을 입어 보지도, 책봉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후궁으로서의 명분조차 없었다.타나오윤은 살아생전 주지 못했던 모든 것을 죽은 뒤에야 내어 주었다.하지만 관 속의 진하선은 이제 다시 눈을 뜰 수 없었다.타나오윤은 관 옆에 서서 뚜껑에 채 마르지 않은 칠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었다.“영안아.”대답은 없었다.꺼지지 않는 촛불만 가볍게 흔들리며 흰 상복을 입은 타나오윤을 비추었다.하룻밤 사이에 타나오윤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황위를 넘기는 날, 타나오윤이 소년에게 옥새를 건네자 소년은 두 손으로 옥새를 받아 들고 눈앞의 수척한 사내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타나오윤은 한마디만 했다.“해마다 청명절이 되면 황릉에 갈 수 있게 해다오.”소년은 오랫동안 침묵했다.문득 죽음을 앞둔 고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백성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니 더는 싸우지 말라던 말이었다.소년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타나오윤이 몸을 돌려 높은 단상에서 내려오자, 신하들은 감히 그를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양쪽으로 갈라설 뿐이었다.걸음은 느렸고, 이따금 비틀거리기까지 했다.소매가 흘러내리자 손목을 가득 메운 칼자국과 고독이 퍼뜨린 검은 무늬가 드러났다.그날을 끝으로 도성에서 타나오윤을 보았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어떤 이는 그가 서주의 옛터로 떠났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20화

    점점 가늘어지는 진하선의 숨결은 한 줄기 바람에도 꺼질 듯 위태로운 촛불 같았다.타나오윤은 마지막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진하선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댔지만, 끝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이윽고 진하선의 입술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영안아.”타나오윤이 갈라진 목소리로 불렀다.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진하선.”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공주마마...”끝내 대답은 없었다.타나오윤은 진하선의 이름과 신분, 자신이 불러 왔던 모든 호칭을 하나씩 불러 보았으나, 진하선의 가슴은 다시는 오르내리지 않았다.입가에는 긴 고통에서 마침내 벗어난 듯 평온한 미소가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타나오윤은 점점 식어 가는 몸을 품에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전각 밖에서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태의가 문턱 앞에 무릎을 꿇었다.“폐하, 소신이...”“꺼져라!”모래를 삼킨 듯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였다.태의는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바로 그때 고독이 전보다 백 배는 거센 기세로 타나오윤을 덮쳤다.뼛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고통이 온몸으로 번지며, 수많은 벌레가 살과 피를 모조리 갉아 먹는 듯했다.타나오윤은 등을 활처럼 웅크렸다.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졌고 목구멍에서는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진하선은 죽었다.그런데도 독은 사라지지 않았다.무의는 목숨을 잇는 피가 한 번 몸에 섞이면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진하선이 살아 있을 때는 고독이 두 사람의 피를 따라 오가며 모두를 괴롭혔다.그러나 진하선이 죽어 고충이 본래 주인을 잃자, 그 반식(反噬)은 모두 타나오윤 한 사람에게 쏠렸다.타나오윤은 온몸을 거세게 떨면서도 진하선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팔을 풀면 마지막 온기조차 남기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았다.그때 태감 하나가 부축하려 다가서자, 타나오윤이 홱 고개를 들었다.핏빛으로 충혈된 눈이 번뜩이는 순간, 손에 쥔 비수가 칼집에서 빠져나왔다.모두가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9화

    짙고 곧은 눈썹, 굳게 다문 턱선...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서 얼핏 태자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소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내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소년의 피부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나는 문득 웃었다.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아비를 똑 닮았구나.”소년은 눈시울을 붉힌 채 앙상한 내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님,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늦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너를 보았으니 늦지 않았어.”타나오윤은 문밖에 선 채 들어오지 않았다.다만 촛불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어, 문틈 너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타나오윤은 내가 진나라 황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그런데 이제는 진나라 황실의 마지막 핏줄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고모라 부르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소년도 문밖에 누가 있는지 알아챈 듯했다.내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쥔 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칼을 뽑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소년의 손은 언젠가 태자 오라버니가 내 손을 잡고 글씨를 가르쳐 주던 때처럼 힘이 넘쳤다.“고모님,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소년이 말했다.“여기를 떠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지요.”나는 희망으로 가득한 젊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나는 이제 아무 데도 갈 수 없단다.”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나는 무언가 말하려는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고모 말을 잘 들어라.”나는 힘겹게 숨을 고른 뒤 겨우 입을 열었다.“이제 싸움은 그만두어라. 백성들은 더 버틸 수 없다. 이 나라를 누가 다스리든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냉궁에서 지내는 동안 수없이 많은 울음소리를 들었다.나라를 잃고 우는 이도 있었고, 자식을 잃고 우는 이도 있었다. 굶주린 채 궁궐 밖에서 쫓겨나며 우는 백성도 있었다.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이 아이마저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8화

    “진씨라고 했느냐?”나는 눈을 뜨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침상 곁에 앉아 전장에서 올라온 보고를 살피고 있던 타나오윤은 내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았다.“깨어났구나.”타나오윤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끝에 사실을 털어놓았다.“네 태자 오라버니의 핏줄이다. 도성이 함락되던 날, 누군가 아이를 몰래 성 밖으로 빼돌렸다고 한다.”“살아 있었구나.”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이토록 감정이 격해진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태자 오라버니에게 아직 후손이 남아 있었다.진나라 왕실의 핏줄은 끊기지 않았다.필사적으로 참았지만, 눈물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타나오윤은 복잡한 얼굴로 내 눈물을 바라보았다.그동안 타나오윤은 어떻게든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며,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끌어내려 애썼다.그러나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데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소년이 너무도 쉽게 나를 울리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진압해야 한다는 말이 빗발쳤다.”타나오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허나 짐은 허락하지 않았다.”나는 아무 말 없이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이불을 세게 움켜쥐었다.타나오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내게 등을 돌렸다.“영안아, 그 아이를 만나고 싶으냐?”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입을 열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타나오윤은 뒤돌아 내 눈물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어려운 결정을 내리려는 듯,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타나오윤은 이내 전각 밖으로 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명을 전하라. 성문을 열되 군사는 단 한 명도 세우지 말고, 의병(義兵)의 수장을 궁으로 들이라.”밖이 삽시간에 술렁였다.“폐하, 아니 되옵니다!”“저들은 반군이옵니다! 성안으로 들였다가는...”“물러가라.”타나오윤의 목소리에는 어떤 반박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그는 다시 안으로 들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7화

    타나오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나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여며 준 뒤돌아서 나갔다.전각 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꽃병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이내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그날 이후로 깨어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눈을 떴을 때는 대낮이었는데, 다시 눈을 뜨면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있곤 했다.하지만 깨어날 때마다 타나오윤은 늘 곁에 있었다.어느 때는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느 때는 침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는데, 잠든 채로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무어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영안아... 가지 마라...”타나오윤은 전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턱선은 칼로 깎아 놓은 듯 날카로웠고, 눈 밑의 짙은 그늘은 눈두덩과 맞닿을 만큼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그때 전각 밖에서 다급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변방에서 급보가 왔사옵니다. 북적(北狄)이 국경을 침범하였사오니 속히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승상을 찾아가거라.”타나오윤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허나 폐하께서는 벌써 이레째 조회에도 들지 않으셨사옵니다...”“꺼져라.”발소리가 황급히 멀어졌다.언젠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연히 타나오윤의 손목을 보았다.그곳에는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빼곡히 뒤엉켜 있었다. 이미 딱지가 앉은 것도 있었고, 아직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있었다.하루 세 그릇씩 필요한 피.타나오윤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이제 그만하십시오. 더는 헛되이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되옵니다.”타나오윤은 내게 약을 먹이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그러고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다시 숟가락을 내 입가로 가져왔다.나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폐하, 폐하는 진나라 왕실을 증오하셨잖습니까. 이제 저 하나만 남았습니다.”나는 침상 휘장에 수놓인 봉황을 바라보며 남의 일이라도 말하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가 죽으면 폐하의 복수도 끝나는 건데 잘된 일 아닙니까?”숟가락이 그릇에 떨어지며 작게 부딪치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6화

    타나오윤은 내가 머무는 침전을 예전 모습 그대로 꾸미게 했다.책장에는 내가 어릴 적 즐겨 읽던 시집이 꽂혀 있었고, 창가에는 한때 내가 기르던 난초 화분이 놓여 있었다. 피우는 향마저 기억 속 공주부에서 쓰던 것으로 바꾸었다.타나오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아무런 온기를 느끼지 못했다.“영안아, 배고프지 않으냐?”타나오윤이 계화떡을 담은 접시를 들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내 곁에 놓았다.떡은 모양도 빛깔도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이 정갈하게 빚어져 있었다.나는 한 조각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혀끝에 단맛이 번졌지만, 한참을 씹다가 끝내 내려놓았다.“이 맛이 아닙니다.”타나오윤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어마마마께서 만드시던 계화떡에는 소금이 아주 조금 들어갔습니다.”나는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단맛에 짠맛이 살짝 돌아야 물리지 않는다고 하셨지요.”“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겠습니다.”창살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전각 안이 고요해졌다.타나오윤은 아무 말 없이 접시를 거두어 갔다.요 며칠 내내 그런 식이었다.어떻게든 지난 잘못을 만회하고, 내가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 애썼다.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오후 무렵, 고독이 또다시 도졌다.아무런 기미도 없이 검은 피가 목구멍으로 치밀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어디서 나타났는지 타나오윤이 달려와 나를 와락 품에 안았다.“영안아! 영안아...”어쩔 줄 몰라 하며 내 피를 닦아 내는 타나오윤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바로 그 순간, 타나오윤의 몸도 갑자기 뻣뻣하게 굳었다.고독이 되받아친 것이다.무의는 내가 고통을 느낄 때 타나오윤도 똑같이 아플 것이라고 했다.타나오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그런데도 이를 악문 채 신음 한 번 흘리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