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부모님은 장녀와 장남, 차녀와 차남을 맺어 주면 더없이 잘 어울리는 혼사가 될 거라 하셨다. 전생의 나는 그저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라 여기며, 별생각 없이 동생과 함께 조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혼인하고 나서야 알았다. 조휘겸이 내 머리쓰개를 걷어 올리던 순간, 눈에 스친 실망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렇게 삼십 년. 그는 매일 일부러 길을 돌아 동생의 문 앞을 지났다. 챙겨 준다는 핑계로 농을 걸고 장난을 쳤다. 그 애의 뜰에 선 대추나무 가지가 담장 밖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문 안쪽에 서서 창호지 너머로 달빛에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죽던 밤, 그는 바깥방에 서서 시종에게 말했다. "옆뜰의 둘째 마님께 오늘 밤은 가지 않는다고 전해라." 내 죽음조차 동생보다 뒷전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혼담이 오가던 그날로 돌아와 있었다. 부모님이 웃으며 물으셨다. "조씨 집안의 장남은 어떠니?" 나는 맞은편의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다 찻잔을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View More연화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언니는 다 가졌잖아요... 제가 언니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아요?"어머니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쨍그랑. 고요한 방 안에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다.윤연화가 홱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시퍼렇게 굳은 얼굴을 보는 순간 온몸에서 뼈가 빠져나간 듯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방 안에는 연화가 억누르는 울음소리와 바닥에서 서서히 식어 가는 찻물만 남았다.책방을 인수하던 날, 벽은 칠이 온통 벗겨져 있었다. 여러 장인을 부를 형편도 되지 않았다.소식을 어디서 들었는지 조진유는 다음 날 회반죽 한 통을 메고 문 앞에 나타났다. 낡은 옷에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렸고 바짓단에는 진흙이 튀어 있었다."어쩐 일이오?""일하러 왔소."그가 허리춤의 호두를 풀어 창턱에 내려놓았다."어느 벽이오?"나는 안쪽 벽을 가리켰다. 조진유는 사다리에 올라 능숙하게 움직였다."예전에 해 본 적 있소?""학당에서 벌로 반년이나 벽을 칠했소.""학당에도 다녔소?""석 달이오. 쫓겨났소.""왜 쫓겨났소?""담을 넘어 술 마시러 나갔소. 반성문에는 '담이 너무 높았다. 다음에는 낮은 담을 고르겠다'고 썼소."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가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웃었소.""벽이나 칠하시오."조진유는 낮은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전생에도 들은 적이 있는 곡이었다. 그가 도성을 떠나던 날 성문 앞에서 부르다가 중간에 성루를 돌아보았다. 당시에는 윤연화를 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연화는 전송 나온 사람들 사이에 없었다. 그 애는 조휘겸의 서재에 있었다."조진유.""네?""전에 그랬소.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할 때 다시 묻겠다고."그의 붓이 멈췄다. 조진유는 몸을 돌려 사다리에 걸터앉은 채 아래의 나를 내려다보았다."솔직히 말하면... 아직 멀었소.""그런데 벽은 왜 칠하오?""벽을 칠하는 건 그냥 힘을 쓰는 일이고, 아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건 다른 문제요. 마지못해
방 안의 모두가 얼어붙었다.가까스로 목소리를 되찾은 어머니가 물었다."둘째 도령... 방금 뭐라고 했나?""제가 큰아씨께 구혼하고 있습니다. 제 형님을 거절했다고 해서 조씨 집안 사람 모두를 거절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인께서도 조씨 집안에 큰아씨와 어울릴 사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마 저일 겁니다."아버지가 그를 뚫어지게 보셨다."진심인가?""진심입니다."그가 나를 향해 돌아서며 목소리를 낮췄다."먼저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서 퇴로를 막아 두겠소. 다시는 누가 함부로 표적으로 삼지 못하게 말이오."조진유는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린 뒤 몸을 돌렸다. 문 앞에 이르러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는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그 호두는 내가 먼저 간직하겠소. 받을 마음이 생기면 그때 주겠소."그는 문턱을 넘어 오후의 햇살 속으로 걸어갔다.이틀 뒤, 조휘겸은 도성 동쪽 찻집으로 나를 불렀다.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창가에 앉아 차를 두 잔 우려 놓고 있었다."아씨, 지난번 아씨가 한 말을 돌아가 오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먼 곳으로 시집갔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씨의 말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저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을 뿐이라는 걸."조휘겸이 나를 바라보았다."그 마음을 잊고 아씨와 새로 시작하겠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혼인한 뒤에도 다시는 길을 돌아 옆뜰 문 앞을 지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조휘겸은 굳어 버렸다. 그는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연화가 옆뜰에 산다는 것, 자신이 대추나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저녁을 보냈는지 내가 안다는 것을.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답이었다.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도령은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집안에 알맞은 맏며느릿감으로만 보셨을 뿐입니다."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아씨."조휘겸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나는 한 걸음 멈췄다."만약..
나는 조진유를 바라보았다."그 말 한마디에 물러날 분입니까?"그가 잠시 생각했다."아닙니다.""그런데 왜 물으십니까?"조진유가 웃으며 호두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아 냈다."확인해 두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조진유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대청에 서 있었다.초희가 들어와 찻잔을 치우며 낮잠이라도 주무시겠느냐고 물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문지방 옆에 복숭아나무 잎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몸을 굽혀 주워 책갈피에 끼웠다.소문이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바깥에서 돌아온 초희는 문부터 닫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씨, 바깥에 소문이... 아씨께서 눈이 높아 조씨 집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도령과도 만나고 다닌다고 합니다."나는 붓을 내려놓았다."누가 처음 퍼뜨렸지?""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집안사람들도 벌써 수군거립니다. 아침에 부엌에 갔다가 나이 든 하녀 둘이 큰아씨에게 다른 정인이 있는 모양이라고 입을 놀리는 걸 들었습니다.""어머니께서도 들으셨니?""아침에 나이 든 시녀를 불러 물어보셨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뜰로 갔다.어머니는 평상에 앉아 염주를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얼굴은 어둡게 굳어 있었다.아버지도 계셨지만 차에는 손도 대지 않으셨다. 윤연화는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고, 금방이라도 울었던 듯 눈가가 붉었다.어머니가 눈을 들어 나를 보셨다."바깥에 도는 말은 들었느냐?""들었습니다.""할 말이 있느냐?"나는 똑바로 서서 대답했다."그 말들은 하나도 사실이 아닙니다."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리셨다."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니. 네가 떳떳하게 행동했다면...""어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그 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묻고 싶습니다. 요 며칠 조씨 저택 꽃놀이에 다녀온 것 말고는 안채 문밖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도령'은 어디서 나타난 겁니까?"윤연화가 고개를 들고 나직이 말했다."언니, 아마 하인들이 제멋대로 퍼뜨린 말일
바람이 멎었다.회랑 아래의 초롱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조진유..."내가 입을 열었다."서둘러 거절부터 하지는 마십시오."조진유가 말을 끊었다. 평소의 능청스러운 기색은 사라지고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조금 묻어 있었다."제가 미덥지 않다는 건 압니다. 빈둥거리며 세월이나 보내고 변변한 재주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된 일보다 호두 굴리는 데 더 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정자에서 아씨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을 세게 얻어맞은 듯했습니다."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은은한 측백나무 향이 풍겼다."예전에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조씨 집안이 먹여 살려 주니 적당히 세월이나 보내면 된다고 여겼는데, 아씨의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 사는 게 참 재미없어 보였습니다.""제가 몇 마디 했다고 저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입니까?""이게 좋아하는 마음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그가 솔직하게 말했다."하지만 아씨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건 싫습니다. 특히 형님과는 더더욱.""왜 그렇습니까?""형님은 아씨와 어울리지 않습니다.""그럼 도령은 어울린다는 말입니까?"그는 잠시 침묵하다 자조적으로 웃었다."지금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그가 몸을 돌려 뜰 밖으로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보았다."지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됐다고 생각할 때 다시 묻겠습니다."그 말을 끝으로 조진유는 떠났다.손안의 호두가 다시 돌기 시작하며 고요한 밤에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나는 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이 둥근 담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전생에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전생의 그는 윤연화와 혼인했고, 갈라섰고, 멀리 떠났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이번 생의 그는 내게 한번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나는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바라보았다.젊고 깨끗하며 아직 누구에게도 잡힌 적 없는 손.회랑 아래의 초롱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나는 돌아서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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