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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By:  맑은 물결 한 자락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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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을 끝내기 위해, 나는 스스로 황명을 청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수인족(獸人族) 부족의 타나오윤과 혼인했다. 혼인 첫날밤, 어느새 초원의 늑대왕이 된 그는 드넓은 초원에서 나와 깊은 정을 나누었고, 우리는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의 나는 타나오윤이 진심으로 나를 연모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훗날 십만 수인족 병사를 친히 이끌고 도성을 짓밟은 이 또한, 다름 아닌 타나오윤이었다. 그는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붙잡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끝까지 지켜보게 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굶주린 늑대 떼에 물어뜯겨 돌아가셨고, 태자 오라버니는 말발굽 아래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어마마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자들은 어마마마의 봉관을 잡아 뜯고 예복까지 찢어 놓은 채, 사람들 앞에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가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 치욕은 끝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타나오윤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눈에는 지난날의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하선, 비록 네가 경국지색이라 하나, 내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느냐?” “진나라(秦國) 황실이 내 부족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아느냐? 고작 너 하나를 보내 놓고 이 피맺힌 원한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냐!” 마침내 타나오윤은 천하를 손에 넣었고, 연모하는 여인을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반면 나는 아무런 명분도 지위도 없이 냉궁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마다, 그는 황릉에서 시신을 파내 내 앞에 가져왔다. 그러고는 뼈를 산산이 부숴 가루로 만들고, 남은 재까지 모조리 흩어 버렸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죽을 생각도 마라!” 그 뒤로 나는 더는 죽으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전 그를 살리려고 삼켰던 고충(蠱蟲)의 독이 발작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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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황후의 생신연을 맞아, 타나오윤은 이례적으로 나를 냉궁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붉어진 눈으로 높은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은 여인의 머리에는 화려한 채익 봉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것은 어마마마께서 남기신 유품이었다.

“무엄하구나! 폐하와 황후마마를 뵙고도 절을 올리지 않다니!”

그때 누군가 내 다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무릎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쳤고, 나는 그대로 이마를 땅에 대고 무표정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

타나오윤은 나를 내려다볼 뿐, 일어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하선. 오늘이 누구의 생신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헌데도 이리 늦은 것은 혹 황후를 욕보리려는 뜻이냐?”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

다리가 성치 않아 냉궁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려면 족히 두 시진은 걸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타나오윤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이제는 제법 고분고분해졌구나.”

문득 지난번 타나오윤의 뜻을 거슬렀다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그는 나를 맹수 우리에 던져 넣고 피를 절반 가까이 뽑아 짐승들에게 먹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나서야 진귀한 약재와 영약을 모조리 구해 오게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숨만 붙여 놓았다.

“이보게, 어서 일어나시게. 그래도 한때는 귀한 공주마마가 아니더냐. 아무리 진나라가 망했다 한들, 어찌 스스로를 천한 몸종처럼 여기는가?”

그렇게 말하며 신은수는 몸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말투는 더없이 다정했으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후벼 팠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내 손목에 감긴 늑대 송곳니 팔찌에 멎었다. 눈빛에 순간 감탄이 어렸다.

그러고는 무척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생신 선물로 달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타나오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팔찌는 오래전 타나오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수인족 부족에서 대대로 전해 온 보물로, 꿰어 놓은 송곳니는 하나같이 귀한 약재였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옅어지지 않는 묘한 향이 배어 있었다.

오래 지니고 있으면 통증을 가라앉히고 수명을 늘리는 효험까지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내게 이것을 건네며, 타나오윤은 평생 무탈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마마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기꺼이 드려야지요.”

나는 손목에서 팔찌를 풀어 신은수의 손에 건넸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단상 쪽에서 술잔이 엎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신은수는 팔찌를 손안에서 이리저리 매만지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네가 춤 한 번으로 도성을 들썩이게 했다지? 모처럼 자리도 마련되었으니, 오늘 모두에게 솜씨를 한번 보여 주는 것이 어떤가?”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 있었다.

하나같이 비웃음과 악의가 서린 눈빛이었다.

그중에는 수인족 장수들도 있었고, 적과 내통해 성문을 활짝 열어젖힌 반역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그때 놋솥에서 갓 떠낸 뜨거운 국물이 그대로 내 몸을 덮쳤다. 살갗이 익어 버릴 듯한 화끈한 통증이 순식간에 번졌다.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망국의 핏줄 주제에 아직도 공주 행세를 하려 들어? 목숨 하나 붙여 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분수도 모르고!”

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발끝을 세웠다.

한때 공주였던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한낱 무희가 되었다.

초원의 풍속은 본래 분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이번에는 겉옷까지 벗으라며 소리 높여 부추겼다.

멀찍이서 내게 닿은 타나오윤의 눈빛은 싸늘하고 깊었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허리끈을 풀었다.

뜨거운 국물에 덴 살과 옷자락이 엉겨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옷을 잡아당기는 순간 살점까지 뜯겨 나가며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회가 끝난 뒤에야 타나오윤은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내게 다가왔다.

차가운 손끝이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스치더니, 뺨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한없이 매정했다.

“진하선, 지금 짐 앞에서 일부러 가련한 척이라도 하는 것이냐?”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래된 지병이 또다시 도졌다.

나는 타나오윤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연신 기침을 쏟아 냈다.

기침이 터질 때마다 속이 뒤집히고 오장육부까지 쏟아질 듯했다.

타나오윤은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듯 옆으로 비켜섰다.

눈가에 어린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 골골대는 꼴을 십 년이나 보아 왔다. 아직도 병든 시늉이 지겹지도 않으냐?”

나는 한때 그가 그저 진나라의 여인들을 못마땅해하는 줄 알았다.

나처럼 병약하고 유약한 여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타나오윤은 신은수에게만큼은 더없이 세심하고 다정했다.

그녀가 미간을 조금만 찌푸려도 태의가 곧장 문밖에 무릎을 꿇고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몸속의 고충이 내 살과 장부를 갉아먹듯 날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타나오윤의 눈빛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어리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진하선, 너를 그리 쉽게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 끝까지 네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그 죗값을 다 치르기엔 너무 짧았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나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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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황후의 생신연을 맞아, 타나오윤은 이례적으로 나를 냉궁 밖으로 내보냈다.나는 붉어진 눈으로 높은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은 여인의 머리에는 화려한 채익 봉관이 씌워져 있었다.그것은 어마마마께서 남기신 유품이었다.“무엄하구나! 폐하와 황후마마를 뵙고도 절을 올리지 않다니!”그때 누군가 내 다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무릎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쳤고, 나는 그대로 이마를 땅에 대고 무표정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타나오윤은 나를 내려다볼 뿐, 일어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이윽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진하선. 오늘이 누구의 생신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헌데도 이리 늦은 것은 혹 황후를 욕보리려는 뜻이냐?”“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다리가 성치 않아 냉궁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려면 족히 두 시진은 걸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타나오윤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이제는 제법 고분고분해졌구나.”문득 지난번 타나오윤의 뜻을 거슬렀다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그는 나를 맹수 우리에 던져 넣고 피를 절반 가까이 뽑아 짐승들에게 먹였다.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나서야 진귀한 약재와 영약을 모조리 구해 오게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숨만 붙여 놓았다. “이보게, 어서 일어나시게. 그래도 한때는 귀한 공주마마가 아니더냐. 아무리 진나라가 망했다 한들, 어찌 스스로를 천한 몸종처럼 여기는가?”그렇게 말하며 신은수는 몸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말투는 더없이 다정했으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후벼 팠다.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내 손목에 감긴 늑대 송곳니 팔찌에 멎었다. 눈빛에 순간 감탄이 어렸다.그러고는 무척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생신 선물로 달라고 했다.나는 말없이 타나오윤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그 팔찌는 오래전 타나오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수인족 부족에서 대대로 전해 온 보물로, 꿰어 놓은 송곳니는 하나같이 귀한 약재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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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몸의 화상은 이미 말끔히 처치되어 있었다.흐릿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곳이 냉궁이 아니라 황제의 침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문득 아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이 떠올랐다.아바마마께서는 자주 나와 태자 오라버니를 품에 안고 이곳에서 글을 읽고 글씨를 가르쳐 주셨다.그때마다 어마마마께서는 손수 만든 계화떡을 들고 오셨다.하지만 이제는 그 맛이 어떠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깨어났군.”그때 타나오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그는 내 턱을 거칠게 붙잡더니, 기혈을 보하는 쓰디쓴 탕약 한 사발을 억지로 입에 들이부었다.그러자 나는 곧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고,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어렸다. “진하선, 그런 가엾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타나오윤이 싸늘하게 비웃었다.“네 손에 직접 우리 부족의 피를 묻힌 적이 없다 한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너 역시 죄가 없지는 않다.”진나라가 멸망하던 날, 타나오윤은 황실의 핏줄을 모조리 죽였다.심지어 내 뱃속에서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아이마저 예외는 아니었다.자신의 친자식이었지만, 그는 살려 두지 않았다.유독 나만 살려두었다.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이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증오이었을까?’‘아마 증오였을 것이다.’‘해서 그 뒤로 밤마다 나를 사향을 풀어 놓은 차디찬 못에 담가 두었겠지.’‘다시는 아이를 품지 못하게 하려고.’‘내가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그는 나를 혐오하고, 내 핏줄을 불결하다 여겼기 때문이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입가에 묻은 약물을 닦아 냈다.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태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하옵니다!”타나오윤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황후가 회임을 했다고?”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 얼굴에는 처음 아비가 된 기쁨이 선명하게 번지고 있었다.고충이 또다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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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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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갑자기 전각 문이 열렸다.타나오윤이 밖으로 나오더니, 나를 내려다보았다.“황후를 시중들라 했더니, 이런 식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느냐?”조금 전 사람이 와서 전갈을 전했다.타나오윤은 아마 정사를 보러 가려는 모양이었다.그는 내게 당장 들어가 신은수의 목욕과 환복을 시중들라 명했다.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신은수의 얼굴에는 혈색이 곱게 돌고 있었다.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나무 대야는 몹시 무거웠다.손목에는 늑대 송곳니 팔찌에 짓눌린 자국이 아직 선명했고, 대야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한편 신은수는 내 앞에 발을 내밀어 길을 막으며 방긋 웃었다.“이봐, 조심하시게. 본궁은 지금 폐하의 아이를 품고 있네. 행여 넘어지거나 데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네 목숨 하나로도 모자랄 것이야.”나는 가까스로 대야를 바로잡았다.그 순간 뜨거운 물이 손등에 튀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참 가엾기도 하지. 예전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일 없이 귀하게 살더니, 이제는 물 한 대야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다니.”주위에 아무도 없자 신은수는 더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대놓고 시비를 거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나는 소리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반역자.”신은수는 노여워하기는커녕 입꼬리를 올린 채, 처참해진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진하선, 넌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복사꽃가루만 닿으면 어김없이 몸이 붉게 돋고 괴로워했지.”신은수는 본래 나와 허물없이 지내던 벗이었다.무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바마마께서도 신 장군을 늘 믿고 중히 여기셨다.그런데 나라가 무너지던 날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이 바로 신씨 가문이었다.내가 처음 냉궁에 갇혔을 무렵, 신은수가 남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그때 신은수는 내게 말했다.“점쟁이가 그러더구나. 우리 신씨 가문의 딸은 타고난 귀한 운명을 지녔으니, 마땅히 황후가 될 팔자라고.”“누가 네 아버지와와 태자 오라버니더러 그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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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타나오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나를 거칠게 밀쳐 냈다.“죽는 것은 네게 너무 쉬운 벌이다. 진하선, 짐은 네가 살아서 평생 고통받기를 바란다!”그는 다시 달여 온 탕약 한 사발을 내밀었다.지독하게 쓰고 비린내까지 나는 약이었다.지난 세월 동안 이런 약을 대체 몇 사발이나 마셨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타나오윤은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말 죽어 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히 살게 둘 생각도 없었다.나는 약사발을 받아 들고 그의 앞에서 단숨에 들이켰다.타나오윤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예전의 나는 쓴 것을 몹시 싫어했다.그가 처음 이 약을 가져왔을 때도 마시기 싫다며 사발을 엎어 버릴 만큼 고집을 부렸다.그래서 그 뒤로는 매번 타나오윤이 억지로 내 입을 벌려 약을 들이부어야 했다.“진하선, 네가 앞으로도 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군다면 짐도 어디 한번 생각해 보마...”타나오윤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그 아이에게 비석 하나쯤은 세워 주는 것을.”그 말에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그 아이는 분명 타나오윤의 아이이기도 했다.그런데도 아이의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는 일조차 마지못해 베푸는 은혜인 듯 말하고 있었다.“오늘은 마당에 꿇어앉아 네 잘못을 뉘우치거라. 네 탓에 황후가 놀라고 뱃속 아이까지 위험해졌으니, 그에 대한 벌이다.”오후의 햇살은 살갗을 태울 듯 독했다.햇볕을 고스란히 받은 청석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나는 마당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어느새 치맛자락까지 피에 젖어 살갗에 들러붙었다.지나가던 궁녀들은 일부러 빗자루질을 하며 먼지를 내 쪽으로 쓸어 보냈다.이때 누군가 낮게 비웃었다.“저 꼴 좀 보아라. 지금 저 모습을 보고 누가 한때 도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인이라 믿겠어?”다른 궁녀도 곧장 맞장구쳤다.“미색도 총애를 잃으면 다 소용없는 법이지. 폐하께서는 이제 눈길 한 번 주는 것조차 싫어하신다잖아.”한낮이 깊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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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귓가에서 누군가가 쉼 없이 내 아명(兒名)을 불렀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애써 억누르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그 이름으로 불려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흐릿한 시야 너머로 검은 곤룡포가 보였다.나는 그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쥔 채, 눈물을 흘리며 불렀다.“아바마마...”정말로 오래전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아바마마께서는 어서방에 앉아 웃으며 나를 무릎 위에 앉히셨고, 태자 오라버니는 곁에서 일부러 글을 틀리게 읽어 나를 허리가 꺾이도록 웃게 하곤 했다.한편 어마마마께서 손수 만드신 계화떡을 들고 들어오셔서는, 두 분 모두 체통이라곤 없다며 타박하셨다.그때의 도성은 참으로 활기찼다.궁궐 담장 밖에는 설탕 공예를 파는 장수가 있었고, 봄만 되면 해자(垓子) 곁 버드나무에서 날린 솜털이 온 하늘을 하얗게 뒤덮었다.나에게도 한때는 그토록 따뜻한 가족이 있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은 훗날 타나오윤의 말발굽 아래 산산이 짓밟혔다.귓가의 목소리가 멎었다.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입안에는 또다시 익숙한 쓴맛이 감돌고 있었다.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타나오윤의 얼굴이 보였다.그는 약을 입에 머금어 내게 직접 넘겨주고 있었다.무슨 상황인지 깨닫는 순간, 나는 거부하듯 얼굴을 돌렸다.타나오윤은 순간 멈칫했다.이내 약사발을 든 손가락이 서서히 굳어졌다. “진하선, 정신이 돌아왔으니, 이제 스스로 약을 들거라!”그의 입술에는 아직 탕약이 조금 묻어 있었고, 미간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짐이 몸소 약까지 먹여 주었거늘, 감히 거부하는 것이냐?”나는 그런 타나오윤을 바라보다 문득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한때는 나도 그가 이만큼 가까이 다가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아픈 내 이마에 손 한번 얹어 보고, 어디가 아프냐고 한마디 물어 주기를 그토록 바랐다.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제야 이루어졌다. 그가 직접 내게 약을 먹여 주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은 오직 내가 너무 빨리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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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타나오윤은 망연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어찌해야 할지 몰라 넋이 나간 사람처럼.하지만 이토록 많은 피를 보고도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마침내 현실을 깨달은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게 아무도 없느냐! 어서 태의를 불러라!”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다쳤을 때 탕약 한 사발만 던져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태의를 불러 직접 진맥하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생각해 보면 그가 내게 먹여 온 약재들은 효험만큼은 참으로 뛰어났다.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번번이 살아남았고, 깊은 상처조차 놀랄 만큼 빨리 아물었다.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했다.태의는 내 맥을 짚자마자 안색이 굳더니,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영안공주께서는 기혈이 크게 쇠하여 몸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신으로서도 더는 살려 낼 방도가 없사옵니다.”그러자 타나오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튼소리!”“짐이 지난 세월 저 아이에게 몸을 보하라고 그토록 귀한 약재를 들였거늘 무슨 기혈이 바닥났다는 것이냐? 인삼과 뱀의 쓸개는 물론이고, 백 년 영지까지 먹였다. 헌데도 몸이 쇠했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너희들이 서로 입이라도 맞춰 짐을 속이려는 것이냐!”태의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폐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신이 아뢴 것은 모두 사실이옵니다!”쾅!타나오윤이 곁에 있던 탁자를 거칠게 뒤엎었다.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는 한마디씩 짓씹듯 내뱉었다.“지금 당장 태의원의 모든 태의를 불러오너라. 영안공주를 살려 내지 못한다면, 모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영안은 내 봉호였다.내가 평생 평안하고 근심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다.하지만 내 삶에는 단 한 번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문득 오래전 현유림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날 타나오윤은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나는 그를 등에 업고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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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무의는 고개를 끄덕였다.“예, 그렇습니다. 다만 그리 빨리 죽지는 않습니다.”“짧으면 십 년, 길면 이삼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제법 오래 사는 셈이지요. 다만... 그동안 조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무의의 손에서 자루를 낚아채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안의 고충을 모조리 삼켰다.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저는 본디 병약하게 태어났사옵니다. 의원들도 일찍이 보통 사람보다 명이 짧을 것이라 하였으니... 이리된다 한들 크게 다를 것도 없겠지요.”그날 내 몸속으로 들어간 고충들은 내 피와 살을 먹고 자라며 지금까지 끊임없이 번식해 왔다.헤어지기 전, 무의는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리석은 사람이로군.”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다.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타나오윤의 태도가 돌연 달라졌다.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밀어내기라도 하듯 한없이 차가워졌다.나는 그 이유가 진나라와 서주의 전쟁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타나오윤은 볼모로 적국에 붙잡혀 있는 동안, 멀리 고향에서 제 부족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 간다는 비보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결국 전쟁은 서주의 패배로 끝났다.서주는 영토를 떼어 주고 소와 양 수만 마리를 비롯한 수많은 물자를 내놓아야 했으며, 매달 진나라에 공물까지 바치게 되었다.그 불평등한 약조가 맺어진 뒤에야 타나오윤도 서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그가 떠나던 날, 나는 뒤를 쫓아 도성 성문까지 따라갔다.“영안공주,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타나오윤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그 눈에는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이 어려 있었다.“다시 만나는 날에는 그대와 나는 적이 될 것입니다.”“아닙니다.”나는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 없습니다. 타나오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서주와 진나라도 서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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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귓가가 몹시 소란스러웠다.눈꺼풀에는 천근의 무게라도 얹힌 듯 눈을 뜰 수가 없었다.아니, 뜨고 싶지도 않았다.‘어째서 나를 잠들게 두지 않는 거지?’‘힘들어, 너무 힘들어...’“폐하, 저 죄인이야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옵니까?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사람을 불러 들인 것이옵니까?”신은수의 곁을 지키던 상궁이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사옵니까. 회임한 몸에는 한 점의 피비린내조차 해롭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이 광경에 놀라 태기까지 불안정해지셨사온데, 정작 곁을 지켜야 할 때 진맥할 태의 한 명조차 없사옵니다, 폐하!”아득히 흩어지던 의식이 억지로 현실로 끌려왔다.그제야 지금이 언제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다시 떠올랐다.진나라는 멸망했고, 지금의 국호는 오(烏)로 바뀌었다.타나오윤의 황후는 신은수였다.그러고 보면 내가 서주로 시집왔든 오지 않았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왕궁이 피로 물들던 날, 그의 수하가 물었다.“영안공주는 어찌하시겠사옵니까?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타나오윤은 나를 한 번 흘겨보았다.그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잔혹했다.아무리 사나운 짐승도 길들이는 그가, 병약한 공주 하나의 반항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그는 말했다.“우선 살려 두어라.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때 죽이면 된다.”그제야 나는 알았다.타나오윤의 가슴속에 맺힌 증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나 역시 그를 증오해야 마땅했다.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타나오윤은 나라를 다스릴 재목을 지닌 훌륭한 왕이었다.그는 천하를 하나로 만들었다.아바마마께서도 이루지 못하신 일을 해냈다.예전에 그가 억지로 나를 시침에 들게 했을 때, 나 역시 틈을 타 그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비녀를 움켜쥔 채 그의 목 가까이 손을 가져갈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그를 죽이고 나면... 그다음은?’‘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지고 전쟁이 일어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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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전각에 들어선 무의는 곧바로 진맥하지 않았다.그는 침상에 누운 나를 무심한 눈으로 훑어본 뒤, 담담히 입을 열었다.“이미 껍데기만 남은 몸이옵니다.”순간 타나오윤의 얼굴이 굳었다.그는 그동안 거금을 들여 천하의 이름난 의원을 모조리 찾아 헤맸다.눈앞의 무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었다.“그게 무슨 뜻이냐?”무의는 담담히 설명했다.“몸속의 고충이 오랜 세월 살과 피를 갉아먹어 왔사옵니다. 이제는 오장육부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사옵니다.”“사실 이 아이가 이토록 심한 고통까지 겪을 필요는 없었을 터인데... 혹 그동안 양기를 크게 돋우는 보약을 자주 먹이셨사옵니까?”타나오윤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의는 한숨을 내쉬었다.“이 고충들은 지극히 음한 기운을 품은 것들이옵니다. 헌데 그동안 양기를 크게 돋우는 약을 계속 먹였으니, 뜨거운 기운과 찬 기운이 몸 안에서 쉼 없이 맞부딪친 셈이옵니다. 그 고통을 어찌 쉽게 견딜 수 있었겠사옵니까.”타나오윤은 눈을 내리깐 채 멍하니 그 말을 들었다.‘그래서였구나. 어쩐지 그동안 자주 피를 토하고 가슴이 괴롭다고 했어.’‘그런데도 타나오윤은 내가 엄살을 부린다며 몇 번이나 나무랐지. 제 앞에서 불쌍한 척하려는 줄로만 알았고.’‘그러고는 나를 살린답시고 그 보약들을 억지로 먹였지.’정신을 차렸을 때, 타나오윤의 손바닥에는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맺혀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허면 이 아이가 앓고 있는 괴병은... 그리고 이 아이 몸속의 고충은 대체 어디서 생긴 것이냐?”“현유림이옵니다.”무의가 답했다.“제가 먹였사옵니다.”현유림이라는 말에 타나오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그리고 뒤이어 무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가운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타나오윤은 어느새 비수를 뽑아 무의의 목을 바짝 겨누었다. “감히 저 아이를 해쳐 놓고 짐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냐?”목에 칼날이 닿았는데도 무의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저 아이가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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