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르베르그룹의 방문 일정은 원래 목요일이었는데 내부 사정이 생겼다며 갑자기 다음 날로 일정을 앞당겼다.여울과 아림은 갑작스러운 준비 때문에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일을 마쳤다.사무실을 나선 여울은 무심코 맞은편 대표실 쪽을 바라봤다.아림이 바로 말했다. “대표님은 오후에 먼저 나가셨어요. 가실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해준이 비서실 문제를 강하게 정리한 뒤 아림도 두 사람 사이가 단순한 상사와 부하직원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래서 평소보다 해준의 움직임을 조금 더 눈여겨봤다.물론 아림 나름대로는 여울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는 마음이었다.아림은 여울과 해준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둘이 정말 사귀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여울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가요. 오늘은 일찍 자야 해요. 내일 오전에 공항 픽업도 가야 하니까.”“실장님, 저는 대표님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아요.”여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아림은 옆에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 저 YL그룹 지원한 것도 처음엔 대표님 때문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대표님이 학교에 특강하러 오신 적이 있거든요.”“그날 학생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첫 지원서를 여기 냈는데 이렇게 진짜 붙을 줄은 몰랐죠.”여울은 그 이야기에 작게 웃었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생은 저런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반면 여울의 대학 시절은 수업과 공부, 아르바이트 공고를 확인하는 일로만 채워져 있었다. 누가 잘생겼는지 관심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여울이 웃자 아림은 혹시 말을 잘못했나 싶어 급히 덧붙였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대표님이 정말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만약 대표님이 실장님을 좋아하신다면 한번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여울은 아림을 돌아봤다. 목소리는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러웠다.“어떤 부분에서 대표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어요?”아림은 비서실을 강하게 정리한 일과 오세화를 두고 화냈던 일을
이선영은 계속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결혼할 때부터 잘못 선택했지. 누구는 시댁에서 결혼 준비도 해 주고 살면서 도움도 받는데 나는 늘 내가 다 알아서 했잖아.”“이제 큰돈 들어가는 병까지 걸렸네. 치료가 잘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집안 돈 다 병원으로 들어가게 생겼어. 예성이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진씨 집안 어른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진대호는 형제 중 막내였다. 진대호가 결혼할 당시 예식 준비며 살림 장만까지 큰누나인 진미숙이 대부분 챙겼고,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게 해 줬다.이선영이 지금 여울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며 푸념하는 이유는 뻔했다. 여울에게 치료비를 보태 달라는 요구였다.여울의 생각이 맞다면 이선영은 이미 진미숙에게도 같은 하소연을 했을 것이다.그래서 진미숙이 아까 그렇게 울면서 전화했을 것이다. 다만 치료비를 도와 달라는 말까지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병원에 입원했으면 큰일인데 외숙모, 태희 언니랑 예성이한테는 말씀하셨어요?”진대호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딸 태희는 해안시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아들 진예성은 현장직이라서 일을 따라 지역을 자주 옮겨 다녔다.진대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선영이 먼저 대답했다. “아직 말 안 했어. 애들 놀랄 텐데 적당한 때에 이야기해야지.”여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진대호에게 말했다. “외삼촌, 푹 쉬세요.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시면 돼요. 저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그래. 얼른 가서 일 봐라.”여울이 병실을 나가자마자 이선영은 크게 눈을 흘겼다.“친외삼촌 보러 온 사람이 저렇게 정 없기도 힘들겠다. 걱정하는 척만 하고.”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들으라고 더 크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여울은 복도까지 따라 나온 말을 전부 들었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한진도 마찬가지였다.여울은 한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한진도 가볍게 웃었다. “집안마다 한두 분씩은 꼭 계시잖아요. 상대하기 어려운
진미숙의 서러운 울음을 듣자 오히려 여울의 마음에는 씁쓸한 슬픔이 차올랐다.예전에 진미숙의 언니가 아이를 낳다가 큰 출혈이 있었고 합병증까지 겹쳐 위험했을 때도 진미숙이 이렇게 울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진미숙은 언니의 치료비를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를 두고 언니의 시댁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여울은 펜을 내려놓고 미간을 눌렀다.“알았어요. 엄마는 너무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여울은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고 병원에 다녀올 준비를 했다.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 때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도운이었다.“여보세요, 주 선생님.” 도운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친구라고 해도 되지 않아요? 이름으로 불러요. ‘주 선생님’이라고 들으면 괜히 지금 진료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에요.]뒤의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알아들은 여울도 호칭을 바꿨다.“도운 씨, 저희 외삼촌이랑 외숙모는 괜찮아요?”[지금은 많이 진정하셨어요. 입원 절차도 잡아 뒀고요.]“제가 지금 병원으로 갈게요. 자세한 건 가서 들을게요.”[알겠습니다.]통화를 끝낸 여울은 해준의 대표실로 향했다.문을 두드렸는데 한참 답이 없어 외출한 줄 알고 돌아서려는 때 문이 열렸다.“대표님, 저 병원에 잠깐 다녀와야 해서 말씀드리려고 왔어요.”해준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같이 가.”여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잠깐 보고 올 거예요. 큰일도 아니고요.”해준은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으로 여울 얼굴을 바라봤다.몇 초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진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말이 끝나자마자 해준은 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울이 거절할 틈은 없었다.해준이 직접 따라오는 것보다는 한진이 데려다주는 편이 눈에 덜 띄었다.여울은 비서실에 돌아가 몇 가지 업무를 맡겨 놓고 나왔다. 한진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울이 차 키를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한진이 말했다. “대표님 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여울은 잠깐 멈칫했다. 무슨 차
여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준을 가볍게 밀어내며 일부러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표님, 회사입니다. 체면 좀 지키세요.”해준은 붉어진 귀를 보자 최근 여울이 제 품에서 그만하라고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생각이 떠오르자 재빠르게 행동했다.해준은 여울의 귀에 짧게 입을 맞췄다.여울은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바로 두 걸음 물러났다. 놀란 눈으로 천장 쪽을 올려다봤다.“걱정 마. 전용 엘리베이터 카메라는 평소엔 꺼져 있어. 켜져 있어도 밖에 말할 사람 없어.”마침 관제실에서 장비 점검을 하던 보안 직원은 화면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마시던 차를 삼키는 것도 잊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영상은 상시 모니터링하지 않았지만 장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려고 정해진 시간마다 점검 화면을 띄웠다.하필 그날 화면을 켜자마자 방금 장면이 잡힌 것이다.‘설마 대표님이 구 실장님을 좋아하는데 구 실장님이 선을 긋는 건가?’같은 시각, 옆 직원용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조금 전 로비에서 해준과 현수가 나눈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해준과 여울 두 사람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여울이 당한 일 때문에 비서실 전체를 문책하고, 약혼 상대의 어머니를 두고 난동을 부린 외부인이라고까지 했다.규리가 정말 해준의 아내가 될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울이 해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비서실에는 전에는 없던 정적이 흘렀다.모두 제자리에서 조용히 일했고 물을 마실 때조차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유일하게 아림만 평소와 같은 자세로 여울을 대했다.여울이 들어오자 아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여울은 다른 직원들을 한 번 둘러본 뒤 아림에게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아림은 곧장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서실 일 들으셨죠? 대표님 진짜 멋있었어요. 저 오늘부터 대표님 팬 할래요.”여울은 웃으며 자기 사무실로 걸었다. “내가 준 자료는 다 봤어요?”“일부만 봤어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고요.”
안내데스크 직원 둘은 방금 대화를 들킨 줄 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두 사람이 어쩔 줄 모르며 변명할 말을 찾고 있을 때 왼쪽 앞에서 다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대표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앞으로는 정말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같은 실수 절대 안 하겠습니다.”막 로비로 들어오던 직원들도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상황을 지켜봤다.YL그룹에서 대표이사 비서실 직원들은 경영진 바로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회사에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비서실에 들어가기가 본사 입사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준과 함께 일하는 자리인 만큼 채용 기준도 까다롭고 처우도 일반 직원보다 좋았다.해준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현수였다. 여울과 비슷한 시기에 비서실에 들어온 직원이었다.해준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정 비서가 왜 잘렸는지는 알아?”현수는 해준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업무 시간에 딴짓한 거랑... 여자친구를 사무실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한진은 해고 통보를 하면서 진짜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그 정도면 승진에 불이익 주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어. 정 비서가 잘린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어.”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구여울은 비서실장이고 정 비서의 직속 상사야. 지난주 금요일 외부인이 비서실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는데, 정 비서는 옆에서 한 마디도 안 했지.”“상사가 모욕당하는 걸 보고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했어. 책임감도 없고 비겁한 데다 남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더군. 그런 사람을 내가 왜 내 비서실에 둬야 하지?”현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가 붉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해준은 현수를 지나쳐 다시 걸었다.“대표님, 그래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현수가 뒤를 돌아 소리쳤다. “그날 말 안 한 사람이 저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왜 저만 해고입니까?”해준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눈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담겼다. “정말 여기서 정 비서가
여울이 뭘 묻고 싶은지 이미 안다는 듯 해준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너랑 같이 출근할 거야.”여울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얼마 전 비서실 사람들 앞에서 해준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선을 그어 놓고, 오늘 같은 차에서 내려 회사에 들어가면 스스로 했던 말을 뒤집는 꼴이었다.“그럼 제 차 타고 가세요. 저는 지하철로 갈게요.”해준이 여울을 돌아보며 손에 든 넥타이를 흔들었다. “그 전에 이것부터 매 줘.”예전에도 몇 번 해 준 일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사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여울은 고개를 숙인 채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정리했다.“우리가 몇 년 동안 같이 드나들었는데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자꾸 피하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여. 어차피 우리 둘 실제로 만나는 사이잖아. 굳이 숨길 이유 없어.”여울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이게 무슨 뜻이지?’‘우리 관계를 공개하겠다는 건가?’해준이 낮게 말했다. “네가 공개하고 싶다면 나도 반대 안 해.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막 떠오르던 기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해준의 말이 맞았다.규리와 약혼한다는 기사가 이미 퍼진 상황에서 두 사람 관계가 알려지면 결국 욕을 먹는 쪽은 여울이 될 것이다.‘설마 규리와 약혼한 뒤에도 나랑 지금 같은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는 건 아니겠지.’가슴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겁고 답답해졌다.윤명희와 해준이 같은 생각이라면, 자신은 지난 몇 년 동안 사람을 완전히 잘못 본 셈이었다.“여울아.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다 정리할게. 너한테 손해 가는 일 없게 할 거야.”“그럼 지금 인터넷에 난 약혼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힐 수 있어요?”말이 나가자마자 여울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할 수 있었다면 이미 진작 해명했을 것이다.여울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해준의 셔츠 깃까지 정리해 주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가요. 늦겠어요.”해준은 여울의 눈을 오래 바라봤다. 기대가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