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혜연은 왕찬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봐. 기회가 이렇게 왔잖아. 먼저 회사로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시면 돼.”“좋아.”왕찬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진혜연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저에게 무슨 일 있으신가요?”“회사로 와요. 할 얘기가 있어요.”“곧 갈게요.”진한 그룹 대표실 안에서는 허자옥이 진혜연을 기다리고 있었고 유태오는 그녀 뒤에 서 있었다.진혜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며 부드럽게 말했다.“형수님, 이렇게 급히 저를 부른 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가요?”허자옥은 눈가에 피로가 보였지만 조용히 말했다.“알다시피 수혁의 현재 상황 말이에요. 혼수 상태인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고 지금 회사 고위층은 암암리에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요. 이 일은 간접적으로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고 지금 우리에게는 임시 대표를 선출해 사람들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요. 준우 씨가 이미 주주총회를 소집했지만 회사 임시 회장을 선출하려는 것일 뿐이고 능력은 잘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혜연 씨가 대표로 나서서 수혁이 혼수 상태인 동안 회사를 잘 관리하는 거예요. 이건 단순히 수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와 진씨 가문 전체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진혜연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그녀는 허자옥의 표정을 살피며 이 말이 진심인지 속셈이 있는지 판단하려 했다.“형수님, 제가 임시 대표직에 나서지 않으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우리 진씨 가문은 여자가 회사 일을 관리할 수 없잖아요.”진혜연은 눈을 내리깔고 말투에서 체념이 묻어났다.허자옥은 말했다.“이제 어느 시대인데 남녀를 따지겠어요. 내가 혜연 씨 편이니까 끝까지 지지할게요. 내가 회사 관리 경험이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발언권은 있어요. 내가 너에게 임시 대표를 맡기자고 하면 누가 감히 반대하겠어요.”진혜연은 허자옥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마음속 흥분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형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럼 수혁을 위해 회사를 지키고 진씨 가문을 지키도록
“진혜연은 야심이 대단해. 해외에 나가기 전부터 진한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 했는데 진씨 가문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었어. 진싸 가문의 상속인은 남자에게만 전해진다는 것이지.”그래서 말하자면 규칙은 좀 구식이지만 진씨 가문은 확실히 오랫동안 이를 이어왔다.“그 뒤 그녀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진수혁에게 쏟아부었고 진씨 가문에 대한 욕심은 이미 접은 줄 알았어.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 진혜연의 야심은 오히려 더 커졌고 돈과 생명을 가리지 않게 되었어.”허자옥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진수혁은 적어도 그녀의 조카였지만 진혜연은 진씨 가문을 위해서라면 가족마저 외면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강시연은 듣고 나서 천천히 말했다.“어머님, 계책을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진한 그룹 내부의 변덕스러운 인물과 해충들을 뿌리 뽑는 거죠.”그녀에게 이건 최적의 기회였다.진수혁이 했다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을 것이다.허자옥은 강시연을 바라보며 점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역시 두 사람이 오래 함께하니 일 처리 방식도 점점 닮아간다고 생각했다.지금 허자옥은 강시연에게서 아들 진수혁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어머님, 남은 일은 아마 어머님께서 처리하고 조율하셔야 할 것 같아요. 진혜연은 저를 늘 싫어해 왔으니 제가 직접 나설 수 없거든요.”강시연이 말했다.허자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뜻을 보였다.유태오가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시연 씨, 여사님,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되나요?”강시연과 허자옥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진준우는 진수혁이 혼수상태라는 소식을 듣고 그 하찮은 야심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고 곧바로 회사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누군가 임시로 대표 직무를 대리하고 회사의 주요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동시에 진한 그룹의 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다.주가가 계속 하락하면 진한 그룹은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진혜연은 진준우가 주주총회를 연다는 소식을
병원을 나선 진혜연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눈빛은 음침하게 진수혁이 입원한 병동을 돌아보았다.진수혁이 혼수 상태에 빠지자 진한 그룹에는 그 대기업을 이끌 사람이 없어졌다.이런 때에 그가 혼수 상태라는 소식이 새어 나간다면 반드시 회사를 임시로 대리 운영할 사람이 필요해질 것이다.진준우 그 쓸모없는 인간은 아직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으니 자신이 그 자리를 맡는 것이 당연했다.회사를 경영하는 능력만큼은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나야. 나 이쪽에서 한 가지 소식을 터뜨리려고 해...”그날 오후 진한 그룹의 대표 진수혁이 산사태로 인해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도시에 퍼졌다.유태오는 막 장도영과 업무 인계를 마치던 중이었다.그는 뉴스를 보고 얼굴이 확 변했다.회사 고위층들 역시 이 소식을 보고 서로 얼굴만 마주했다.“진 대표님이 다쳐서 혼수상태라고요?”“이 소식 확실한 거예요?”“설마 또 무슨 음모가 있는 건 아니겠죠?”그들은 예전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진수혁이 대표에서 해임되었을 당시 회사는 혼란에 빠졌고 주가마저 요동쳤었다.그들은 다시는 그런 사태를 겪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번 일은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투자자들은 진수혁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앞다투어 주식을 매도했다.손해를 보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것이다.그 결과, 진한 그룹의 주가는 연이어 폭락했다.유태오는 즉시 병원으로 달려왔다.“시연 씨, 대표님 소식이 외부로 새어 나갔습니다. 지금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어요. 회사 주가도 계속 하락 중이고 이대로 가면 주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강시연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진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일은 십중팔구 혜연 고모가 벌인 일이에요.”그녀가 진수혁을 진씨 가문의 후계자로 키워왔다는 사실은 동시에 금융과 경영 감각도 탁월하다는 걸 의미했다.만약 그녀가 진수혁을 해치려 한
강민석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진도현을 데리고 떠났다.진도현이 떠나기 전 강시연에게 큰 포옹을 잊지 않았다.“엄마, 수고했어요.”강시연은 안심된 미소를 지었다.진도현이 점점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한편, 진씨 가문 본가에서는 허자옥이 집으로 돌아와서 진혜연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진혜연은 허자옥을 보고 급한 표정으로 물었다.“형수님, 수혁이 상태가 어때요? 오늘 오후 내내 해외 일 처리하느라 지금에서야 수혁이 산사태를 당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어요.”그녀는 허자옥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모든 세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았다.진수혁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허자옥이 이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허자옥은 소파에 앉아 표정은 수십 년 늙은 듯 창백했다.“의사가 말하길 후두부를 다쳐 대부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지금도 여전히 혼수 상태이며 깨어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요.”진혜연은 혼수 상태라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안도했다.허자옥이 아무 반응도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혼수 상태라면 식물인간이 된다 해도 그녀가 계획한 일이 드러날 걱정은 없었다.진수혁이 깨어나 자신에게 맞설 일도 없었다.혼수 상태라면 누가 자하산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 없었다.진도현도 충분히 시간과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진혜연은 걱정하는 척 연기하며 말했다.“괜히 저쪽으로 가서 산사태를 만나다니.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네요.”허자옥은 손을 저으며 일어섰다.“나이가 들다 보니 몸이 늘 피곤하네요. 나 먼저 위층에 올라가 쉴게요. 시간 나면 수혁 상태도 보러 가려고요.”“네.”진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진혜연은 병원으로 진수혁을 보러 갔다.강시연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진수혁은 여전히 혼수 상태였고 섣불리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하지만 진혜연은 여전히 날카롭게 말했다.“시연 씨, 알아서 수혁에게서 떨어져요. 너
병실 안에서 강시연은 진수혁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썹과 눈가에 복잡한 감정을 가득 담았다.과거의 여러 일을 떠올리며 마음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일었다.그들이 이후 겪었던 일들을 강시연도 느낄 수 있었고 진수혁이 변화한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심하은과 얽히곤 했다.그러나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진수혁이 깨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강시연은 힘껏 심호흡하며 잡념을 떨쳐내려 했다.그때, 병실 문이 두드려졌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유태오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급하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진수혁을 보고 묻는다.“사모님... 시연 씨, 제가 없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전날 해외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해서 진수혁이 다른 사람을 보냈고 안심이 되지 않아 직접 갈 수 없었던 것이다.유태오는 늘 막 도착하자마자 진수혁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강시연은 그가 돌아온 걸 보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최근 벌어진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태오 씨, 진수혁 씨가 혼수 상태인 동안 회사 쪽 움직임을 좀 살펴줘야 할 것 같아요.”강시연의 표정은 심각했다.지난번 일을 겪으면서 진한 그룹 내부에는 이사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이번 진수혁 혼수 상태 소식이 알려지면 진한 그룹은 또 한 번 큰 혼란에 빠질 것이었다.유태오는 약속했다.“시연 씨, 걱정하지 마세요. 회사 쪽은 제가 확실히 살펴볼게요.”“그리고 혜연 고모과 심하은 씨도 감시해 주세요. 이 두 사람이 또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이에요.”진도현의 말을 들은바 심하은과 진혜연이 산 위에서 모의하며 진수혁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강시연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수혁이 진한 그룹에서 가장 적합한 상속자가 된 건 진혜연의 공이 큰데 그녀가 어떻게 진수혁을 죽이려 했는지 의아했다.“시연 씨, 걱정하지 마세요. 일이 잘 처리되도록 할게요. 다만
“너희 둘이 여기까지 온 게 쉽지 않았던 걸 알아. 내 체면을 봐서 수혁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없겠니?”허자옥의 이 말은 간절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강시연은 침묵했다.이번 일을 겪으면서 진수혁에 대한 증오는 확실히 많이 사라졌지만 곧장 용서할 수는 없었다.과거의 고통과 실망은 분명 존재했고 그녀 마음속의 상처와 슬픔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랐다.잠 못 이루던 밤들 속 그녀는 혼자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강시연은 진짜로 두려웠다.그녀는 진수혁의 진심을 믿을 수는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를 통제할 수 없었다.버림받고 싶지 않고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고 매 순간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다.허자옥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강시연의 손을 살짝 토닥이고서야 천천히 자리를 떴다.곧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환자 분의 가족이세요?”강시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남편입니다.”의사는 곧장 상황을 설명했다.“남편분은 현재 위독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만 이번에 후두부를 크게 다쳐 언제 완전히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 확실치 않습니다. 가족분들께서는 심리적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강시연의 가슴이 갑자기 조여왔다.“깨어날 수 있을까요?”의사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죄송합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환자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는 아닙니다. 환자의 귀에 말을 걸어 주세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가능성도 있습니다.”“제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떠났다.강시연은 조용히 병실로 들어갔다. 모든 처치는 이미 끝나 있었고 진수혁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분명 예전에는 생기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영혼을 잃은 듯 보였다.강시연의 가슴은 복잡했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진수혁의 병상 옆에 앉아 그의 윤곽을 눈으로 더듬으며 가슴에 찌릿찌릿한 통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