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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임청연
설희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채이의 뒤를 따랐다.

걸음은 자연스럽게 늦어졌고, 시선에는 망설임과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기색을 알아챈 듯, 채이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설희를 바라봤다.

채이의 깊은 눈동자는 잔잔했다.

“하다윤 씨가 물에 빠진 일,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조사해.”

“네, 상무님.”

설희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곧바로 방향을 틀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에는 일의 경중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 특유의 단정함이 배어 있었다.

채이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 앞으로 갔다.

가늘고 세련된 손으로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붉은 액체가 잔 안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채이는 잔을 가볍게 기울인 채 몇 걸음 옮겼다.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차분했다.

곧 연회장 안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채이를 알아본 이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민경애가 다가왔다. 허리를 살짝 틀며 걷는 모습에는 과장된 여유가 묻어 있었고, 입가에는 비아냥에 가까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 상무님, 오늘은 부 대표님이 안 보이시네요?”

경애는 말끝을 일부러 늘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흥미롭다는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예전에는 달랐다.

태빈과 채이가 함께 나타나는 자리라면, 늘 사람들의 시선이 그 둘에게 쏠렸다.

어디를 가든 떨어져 있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중심이 됐다.

채이는 외모로도, 능력으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연애와 일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그 모습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반면, 경애의 결혼 생활은 달랐다.

결혼한 지 7년.

경애는 누군가를 의심하며 뒤쫓는 쪽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결국 다 비슷해.’

경애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삼켰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하는 거지.’

채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경애는 갑자기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경애는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이었다.

“아까 입구에서 부 대표님이랑 그 동생, 강시은 씨가 같이 있는 걸 본 것 같은데요. 혹시 못 보셨어요?”

말투는 태연했지만 의도는 분명했다.

마치 감춰진 이야기를 들춰내는 사람처럼.

채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 깊숙한 곳에 차가운 기색이 스쳤지만,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채이는 잔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속도를 늦춘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걸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부태빈 씨랑은 이미 정리했습니다. 조만간 결혼할 예정이라서요. 그때는 사모님께도 청첩장 보내 드리죠.”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경애는 잠시 채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입꼬리를 더 올리며 채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채이의 얼굴에서 상처나 동요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설마 빈말은 아니시겠죠? 진 상무님이랑 부 대표님 두 분, 워낙 사이 좋기로 유명했잖아요. 그때 그 모습들, 다들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요.”

경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이유로 다 내려놓는다고요? 솔직히 말해서... 정말 그렇게 쉽게 놓을 수 있으세요?”

채이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 채, 천천히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는 두 손을 앞에서 가지런히 겹쳤다.

시선은 차분하게 경애를 향해 있었다.

“미련이 남느냐 아니냐는 이미 지나간 일이죠.”

채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설마 사모님처럼 진심을 멧돼지 같은 인간한테 쏟고 살자는 건 아니겠죠?”

채이의 시선은 경애를 지나, 경애 뒤쪽에 서 있는 인물을 향했다.

경애의 남편 옆에는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여자가 바짝 붙어 있었다.

정성 들인 화장과 노출이 있는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새처럼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있었고,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다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애는 채이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경애는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잔들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와인이 튀면서 흰 테이블보를 적셨다.

“지만일, 이 미친 자식아!”

경애의 고함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주변의 대화가 일순 멎었다.

채이는 살짝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잔을 정리하며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몸을 돌리는 순간, 채이의 시야에 시은과 태빈이 들어왔다.

시은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결한 꽃처럼 꾸민 차림이었다.

빠르게 다가온 시은이 자연스럽게 채이의 팔짱을 꼈다.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니, 태빈 오빠는 아직 언니랑 결혼 얘기한 적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말끝은 미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태빈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앞으로 나섰다.

“내가 결혼 안 한다고 한 적은 없어. 다만 지금은 아니라고 했잖아.”

태빈은 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도 좀 상황 파악 좀 해. 꼭 이런 자리에서 이런 소리까지 해야겠어?”

태빈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오늘 하씨 집안 사람들한테 사과하고, 네가 잘못했다고 하면 요즘 네가 부린 그 성질, 다 없던 일로 해줄게.”

말투에는 참을성이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채이가 괜히 떼를 쓰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태빈과 시은은 늦게 도착한 탓에 채이가 ‘곧 결혼한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 앞뒤 사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거리낌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채이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똑바로 섰다. 눈빛은 차가웠고,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

“부태빈.”

채이는 또렷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끝났어. 나는 보름 뒤에 결혼할 거고.”

잠시 말을 끊은 뒤, 채이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날엔 너를... 아니, 너희를 초대할게.”

그 말은 단호했다.

흔들림도, 어떤 여지도 없었다.

잠시 말을 잃은 듯하던 태빈이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그만 좀 해라.”

태빈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같이 지낸 게 7년이야. 네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그런 말로 나 자극하려고 하지 마.”

태빈의 눈에는 채이를 얕잡아보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채이가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는 눈빛이었다.

‘진채이는 나 없이는 못 살아.’

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 부모도 널 버렸잖아. 나까지 떠나면, 너 진짜 혼자가 되는 거야.”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채이의 표정이 변했다.

밝았던 얼굴은 단숨에 어두워졌다.

채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드러났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역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법이네.’

한때는 따뜻했던 기억들이... 지금은 전부 날이 선 칼날이 되어 채이의 마음을 하나씩 베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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