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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임청연
“상무님, 내일 제가 와서 이사 도와드릴게요.”

설희는 채이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 내내 여러 번 확인했다.

채이가 정말로 태빈과 관계를 정리했고, 회사에서 자신 몫으로 된 것까지 전부 가져가겠다는 사실을.

설희는 채이의 사람이었다.

채이가 떠난다면, 설희도 당연히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희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채이는 혼자 빌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보육원 쪽 번호가 떠 있었다.

채이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원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이야, 부빈그룹 쪽에서 갑자기 보육원 지원을 끊겠다고 연락이 왔어. 병원에 있던 아이들까지 전부 데려가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니?]

보육원.

부빈그룹.

이 두 단어가 함께 나오자 채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부태빈이야.’

표정이 가라앉은 채이가 감정을 눌러 담고 차분하게 말했다.

“원장님, 제가 바로 연락해서 처리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에 원장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부빈그룹의 지원을 받던 아이들 대부분은 선천적인 유전 질환을 안고 있었다.

의료 장비가 잠시라도 멈추면,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태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채이는 망설임 없이 다른 번호를 눌렀다.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였다.

[여보세요, 진도성입니다.]

금방 연결되며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을 쥔 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목소리도 떨렸다.

“오빠.”

도성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뒤,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자유를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집안도 버린 우리 채이 아가씨 아니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했을까? 그렇게 다정하고 완벽하다는 부태빈은 어디 두고?]

채이는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목소리는 끝내 흔들렸다.

“나... 부태빈이랑 헤어졌어. 그리고 부탁할 게 있어.”

채이는 보육원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곳이 과거 자신이 어린 시절 사건 이후 머물렀던 곳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알았다. 그건 내가 처리할게.]

도성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여전히 채이가 독단적으로 선택했던 과거 일들에 마음이 상해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곁에서 지켜본 여동생의 목소리가 이렇게 떨리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말을 멈췄던 도성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배준모랑 혼인 이야기 나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당장 결혼할 생각 없으면, 내가 부모님께 말해줄게. 하지만 부태빈은 안 돼. 채이야, 오빠가 너 잘못되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듣자, 채이의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나도 알아.”

채이는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여기 일만 정리하면 집에 갈게. 진작 오빠 말 들었어야 했어. 부태빈은... 내가 좋아해선 안 될 사람이었어.”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2분쯤 지나 도성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보육원 지원 문제는 정리됐다는 내용과 함께 다른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내일 진씨 집안 명의로 하씨 집안을 방문해서, 하씨 집안의 최고 어른인 하규원의 칠순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여 하씨 집안의 딸 하다윤이 얼마 전 누군가에게 밀려 바다에 빠진 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진씨 집안과 하씨 집안은 오래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인사 차원에서라도 방문하는 게 맞았다.

채이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날 밤, 태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채이의 핸드폰으로 시은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노골적인 문장이었다.

채이는 망설이지 않고 그 번호를 차단했다.

다음 날.

설희가 차를 몰고 채이를 데리러 왔다.

채이는 먼저 목적지를 말했다.

“우리는 먼저 하씨 집안 본가, 하규원 어르신 댁부터 가자.”

그리고 덧붙였다.

“거기 다녀온 다음에 내 짐은 새 집으로 옮길 거야.”

...

채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씨 집안 본가로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채이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을 뻔한 채이는 간신히 발을 디뎠다.

“뭐 하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태빈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채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빈은 채이를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인데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가슴 안쪽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치 손에 쥐고 있던 뭔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보니까 이제야 네가 잘못한 걸 알았나 보네.”

그 말을 들은 채이는 어이없다는 듯 태빈을 한 번 훑어봤다.

더 말을 섞을 생각도 없었다.

채이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오늘 채이는 진씨 집안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채이 언니.”

그때 시은이 앞으로 나섰다.

시은은 부드러운 웃음을 띤 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채이를 바라봤다.

“오늘 대신 와서 사과해 주셔서 감사해요. 언니는 명목상 태빈 오빠 여자친구잖아요. 하씨 집안에서도 언니한테는 함부로 못 할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채이의 마음에 묘한 위화감이 스쳤다.

채이는 시선을 옮겨 시은과 태빈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두 사람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난 너희 때문에 온 거 아니야.”

채이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너희 일은 나랑 상관없어.”

시은은 채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채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언니한테 말해 줄게요. 언니는 절대 저 못 이겨요.”

시은은 웃으며 속삭였다.

“하다윤 씨를 제가 밀어서 물에 빠뜨린 건 맞아요. 그래도 태빈 오빠는 제 편이잖아요. 결국 언니를 불러서 대신 책임지게 하려는 거고요.”

시은의 말투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우쭐함이 담겨 있었다.

“태빈 오빠 마음속에서 언니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말이 끝나자 채이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지면서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하다윤 씨... 네가 밀었어?”

시은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비웃듯 말했다.

“당연하죠. 하다윤 씨가 분수도 모르고 제 거에 손댔잖아요. 다 자업자득이에요.”

말이 끝나자마자 시은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이어지는 두 번의 소리.

짝!

짝!

강하게 울린 소리에 시은의 몸이 휘청거렸다.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이 번졌고, 비로소 상황을 인지한 시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채이 언니!”

태빈은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고 달려왔다.

채이의 손목을 붙잡은 태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쳤어? 이거 놔!”

시은은 멍한 얼굴로 있다가 태빈을 보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저 그냥 채이 언니 걱정돼서 말 건 것뿐인데, 언니가 갑자기 저를 때렸어요. 아무 말도 없이요.”

채이는 손목을 뿌리치듯 빼내며 태빈을 바라봤다. 눈썹을 살짝 세우면서 웃었다.

“왜, 강시은 대신 나한테 다시 한 대 칠 생각이야?”

그 말에 담긴 노골적인 도발을 태빈은 분명히 느꼈다.

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낯설어졌다.

‘예전의 진채이는 절대 이런 말투로 나를 대하지 않았는데...’

태빈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입을 열려는 찰나, 채이가 먼저 말을 잘랐다.

“내가 먼저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너희도 내 인생에 끼어들 생각 하지 마.”

채이는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그리고 강시은 대신 사과하라고? 그건 꿈도 꾸지 마.”

채이는 웃음을 거두었다. 태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우린 이미 끝났어, 부태빈. 제대로 된 전 연인이라면,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그 말을 남긴 채 채이는 두 사람을 뒤에 두고 하씨 집안 본가 안으로 들어갔다.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태빈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은은 몸을 떨며 분노를 누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부드러운 태도를 만들었다.

“오빠...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채이 언니도 저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예요.”

시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직접 하다윤 씨한테 가서 사과할게요. 오빠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태빈은 시은의 손목을 붙잡았다.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이건 내가 처리할 일이야.”

태빈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채이의 뒷모습이 있던 쪽을 바라봤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진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변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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