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아주 오랫동안 박도윤은 문채아의 유일한 빛이었다. 박도윤의 입에서 “나 강지유와 약혼할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정부가 되라는 박도윤의 말에 문채아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빛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박도윤의 예비 약혼녀가 인사하러 온 날, 문채아는 망설임 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말했다. 문채아는 박씨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들 그녀가 이틀도 못 버티고 다시 돌아갈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박도윤과 강지유의 약혼식 날,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문채아가 강씨 가문의 장남과 팔짱을 낀 채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문채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박도윤의 여자 친구에서 박도윤이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문채아가 자신 때문에 억지로 결혼했다고 생각한 박도윤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식장에 울려 퍼졌다. “발걸음 떼기 전에 잘 생각해야 할 거야.”
더 보기강재혁은 아주 익숙하게 손을 뻗어 문채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그리고 문채아는 나른한 등이 뜨거운 남자의 가슴팍에 밀착된 순간, 바로 흉흉하기 그지없었던 조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불과 반 시간 전에도 강재혁은 지금처럼 뒤에서 그녀를 세게 끌어안은 후 몸을 바짝 끌어당기며 마치 그녀의 숨을 다 빼앗아 가듯 입을 맞춘 채 몸을 움직여댔으니까.당시 문채아는 억지로 고개가 돌려진 탓에 숨이 모자라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의식을 잃기 전에 강재혁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입술이라도 떼서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눈앞이 까매진 채 쓰러졌을 것이다.그래서 문채아는 지금 강재혁이 또다시 몸을 밀착해 오는 것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안 돼요! 더는 못해요! 이 이상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예요!”문채아는 강재혁의 품에 완전히 안기기 전, 마치 사냥꾼에게 잡힌 토끼처럼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외쳤다.물론 문채아도 한때는 미친 듯이 강재혁을 원했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잠자리도 정도껏 해야지 매일 같이 기절할 때까지 해버리면 그건 더 이상 애정 행위가 아닌 고문이었다.실제로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반질반질해지고 있는 강재혁과 달리 문채아는 시달림으로 그새 몸무게가 2kg이나 빠져버렸다.강재혁은 잔뜩 겁에 질린 채 기겁하는 문채아를 보며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뒤늦게야 며칠을 참은 것 때문에 자신이 무섭게 해 버렸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약 발라주려고 그런 거야. 너 안는 데만 집중하느라 상처 치료해 주는 걸 깜빡했잖아.”사실 문채아를 안으면서 몇 번이고 빨개진 그녀의 목 상처를 봤지만 그만하려고 할 때마다 간드러진 소리를 내며 안겨 오는 문채아 때문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물론 전부 핑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강재혁은 문채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린 후 연고를 짜 아주 조심스럽게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제일 효과 좋은 거로 달라고 했으니까 바르고 나면 좀 편해질 거야. 다른 곳은 병원으로
“영란아, 네 전화를 받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앞으로 나한테 전화하지 마. 뭐, 내가 이런 말을 안 해도 어차피 너는 문채아 때문에 조만간 나한테 전화할 겨를도 없이 감옥으로 옮겨질 테지만. 경찰한테 협조 잘하고 쥐 죽은 듯이 있어.”박진성은 말을 마친 후 천천히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애초에 문영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으니 이런 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도 그로서는 큰 선심을 쓴 것이었다.그런데 이만 끊으려던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칭을 부르며 애교를 떨던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그래서, 정말 나를 구하지 않을 생각이라고?”박진성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영란아, 우리 아름답게 헤어지자. 너 지금 이러는 거 되게 추해.”“당신 말이야. 내가 어떻게 당신이랑 결혼할 수 있었는지 혹시 잊었어?”문영란은 그렇게 말하며 무섭게 웃었다.“내가 강재혁한테 당신이랑 이수연 사이의 일을 다 얘기해버리면 어쩌려고 이래?”“아, 그거?”휴대폰을 쥔 박진성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한발 늦었어. 며칠 전에 내가 직접 얘기해줬거든. 나랑 수연이 사이를.”즉, 문영란의 협박은 아무런 힘도 없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문영란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진성의 말을 듣고는 더 세게 웃어젖혔다.“강재혁한테 얘기해줬다고? 정말?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해준 거 맞아? 아니, 당신은 절대 그러지 못했을 거야. 얘기해줘봤자 당신이 이수연 그 여자의 약혼자였다는 사실밖에 얘기 안 했겠지. 진짜 충격인 건 그 뒷얘기인데 말이야.”“그러니까 다시 한번 대답해 봐. 당신, 정말 강재혁한테 싹 다 얘기한 거 맞아? 당신이 그 여자한테 얼마나 파렴치하고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강재혁은 늘 의문스러웠다. 왜 박진성처럼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남자가 뭐 하나 내세울 곳 없는 문영란과 연애한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했는지 말이다.‘내가 박진성과 결혼할 수 있었던 된 이유가 자기 어머니 덕이었
박진성은 낯선 번호를 봤을 때부터 이미 문영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무시하는 것이 아닌 전화를 받았다. 궁지에 몰린 문영란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키워버리면 안 되니까.“왜?”박진성이 눈을 감으며 물었다.“왜라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문영란은 조금 퉁명스러운 그의 질문에 잔뜩 서러운 얼굴로 철창을 꽉 잡았다.“진성 씨도 들었을 거 아니에요. 강재혁과 문채아가 합심해서 날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물론... 채아 아빠랑 이혼하려고 그때 조금 성급하게 움직였다는 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다 진성 씨랑 결혼하기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문채아 그 못된 계집애가 자기 아빠 한 풀어준다고 나를 벼랑 끝으로 몰려고 하고 있어요. 강재혁을 이용해서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진성 씨가 나 좀 구해줘요. 우리는 아직 13년밖에 함께 있지 못했잖아요. 흰머리가 파 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해야죠. 안 그래요?”문영란은 자기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박진성밖에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영란아,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네 전화를 받지 않았던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 너는 나를 사랑했을지 몰라도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 내가 널 왜 구해줘야 해?”박진성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진성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진성 씨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을 때는 한 번도 이러지 않았잖아요.”박진성은 강재혁처럼 사랑에 올인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문영란이 보이는 사랑에 어느 정도 반응은 해주었다.문영란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모든 걸 다 쏟아부을 때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음을 녹여주기도 했고 문영란이 집안일로 바삐 돌아칠 때면 따뜻한 미소를 건네기도 했다.그래서 문영란도 계속 박진성의 곁에 붙어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아무리 그녀라도 박씨 가문에 모든 걸 다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딸이 박도윤에게 3년이나 농락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
문채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어쩌면 바쁜 것일 수도 있고 발신자가 박도윤이라 받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연이은 세 통의 발신에도 받지 않는 것을 보며 박도윤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러고는 직접 문채아를 만나러 가려는 듯 외투를 챙겼다.오늘만큼은 문채아의 곁에 있어 줘야 했다. 아버지가 타살로 죽었다는 걸 알게 된 문채아가 얼마나 큰 슬픔에 젖어있을지 감히 상상도 안 되니까. 하물며 죽인 사람이 친어머니라 충격이 배로 클 게 분명했다.그런데 병실 문 손잡이에 손을 내려놓은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한 발 더 빨리 문을 열어젖혔다.박진성이었다.박도윤은 박진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손은 다 나은 거니?”박진성이 시선을 내려 붕대로 감긴 박도윤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박도윤은 솜털이 다 삐쭉 섰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 답했다.“아니요.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받고 있긴 한데 남들보다 회복이 더디대요. 사람들의 방해로 스트레스받은 게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보름 정도는 더 지켜보재요.”거짓말은 아니었다.입원해 있는 동안 강지유 때문에 모두가 다 박도윤의 상태를 알게 되어 허구한 날 사람들이 방문하는 데다 소문을 낸 강지유는 틈만 나면 박도윤에게 안기기 위해 거의 덮치듯 그에게 달려들었으니까.박진성은 박도윤의 대답에 피식 웃더니 이내 시선을 위로 올렸다.“도윤아, 너는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네가 정말 상처가 깊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면 애초에 강지유를 이 병실에 들이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상처가 깊어지는 걸 오히려 원하고 있었다는 소리겠지. 그래야 내가 너한테 아무런 명령도 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야?”박진성은 박도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마음을 독하게 먹는 면을 볼 때 박도윤은 아주 완벽하게 그의 유전자를 이어받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에게까지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하지만 박도윤이 문채아를 이토록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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