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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6 07:28:20

그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넣었다.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깨는 것은 거친 내 숨소리와 창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빗소리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붙들려 있었다.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마음속에서는 죄책감과 혼란이 뒤엉켰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걸까?

내 결혼식 날 나를 납치한 남자.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그런데 그는 내게 자신이 내 남편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우리에게 딸까지 있다고 했다.

Declan이 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어두운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딸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다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는 6년 동안 널 기다렸어.” 그가 낮게 말했다. “더는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그는 나를 붙들고 있던 것을 풀어 주었다.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허리를 받쳐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젖은 재킷을 집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일단 이걸 입어. 클레어가 네 모습을 보고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마치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라도 있다는 듯이.

그는 내 목덜미에 손을 얹고 방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현관에는 금발의 어린 여자아이가 Luka와 함께 서 있었다. 전용기에서 노트북을 사용하던, 다른 사람들보다 차분해 보였던 남자였다.

아이가 나를 발견한 순간, Declan을 꼭 닮은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엄마…?”

그 목소리에는 나를 무너뜨릴 만큼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클레어.

아이는 망설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그러더니 내게 달려와 작은 팔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얼굴이 내 가슴에 파묻혔다.

“엄마… 돌아왔구나… 정말 돌아왔어…”

나는 얼어붙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 본능처럼 깊이 자리한 무언가가 아이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아이의 등을 감쌌다. 어린아이 특유의 샴푸 향과 달콤한 냄새가 느껴졌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저려 왔다.

“나… 나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아…”

클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하고 눈부신 미소가 번졌다.

“괜찮아. 아빠가 엄마가 지금 기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어. 그래도 괜찮아질 거야. 내가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줄게.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도 알고, 정원에 있는 비밀 장소도 알고, 그리고…”

아이는 6년 동안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내듯 빠르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아이를 안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지만, 가슴속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사랑이 밀려들었다.

Declan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순간도 우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눈빛에는 자부심과 소유욕,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Luka가 헛기침을 했다.

“Matt를 집에 데려다줄게. 너희 셋이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도록.”

Matt가 누구지?

Luka가 떠나고 나자 우리 셋만 남았다.

클레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다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처럼 오히려 더 세게 끌어안았다.

“엄마, 이제 다시 떠나지 않을 거지?” 아이가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는 엄마가 이제 우리 곁에 영원히 있을 거라고 했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의 머리 너머로 Declan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숨 막힐 듯한 강렬함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의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다고 말해.’

목이 꽉 막혔다. 클레어는 젖은 얼굴을 내 가슴에 묻은 채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를 납치한 남자에 대한 공포와, 내가 낳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를 향한 설명할 수 없는 사랑 사이에 갇힌 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여기 있을게.”

클레어는 기쁨에 찬 작은 흐느낌을 터뜨리며 나를 더욱 세게 안았다.

Declan은 미소 지었다. 느리고 어두우면서도 승리에 찬 미소였다.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 한 팔로 두 사람을 함께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머리카락 사이로 낮게 속삭였다.

“착한 아이.”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나는 이제 쉽게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을 해 버렸다.

클레어는 단 한순간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의 작은 심장이 내 가슴에 닿아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더 무너져 내렸다.

“엄마, 떨고 있어.” 클레어가 속삭이며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었다. 푸른 눈에는 순수한 걱정이 가득했다. “추워? 아빠가 엄마한테 겉옷을 가져다줄 수 있어. 내가 추울 때마다 아빠가 항상 그렇게 해 주거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꽉 막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저택도, 벽에 걸린 사진들도,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이 아이도.

Declan은 내 뒤에 서 있었다. 그의 큰 몸이 내 등 가까이에 있었고, 한 손은 내 허리에 놓여 있었다. 그 손길은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웠다.

“괜찮아, 공주님.” 그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여행 때문에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네 방으로 올라갈까?”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계단 위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내 방은 엄마랑 아빠 방 바로 옆이야. 엄마가… 잠들어 있는 동안 엄마한테 보여 주려고 그림을 많이 그렸어. 그리고 엄마가 내가 아기였을 때 선물해 준 곰 인형도 아직 있어. 매일 소중하게 돌봐 줬어.”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악몽 속을 걷는 사람처럼 계단을 올라갔다. 등 뒤에서는 Declan의 시선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방에 다시 들어선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방 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방이었다. 부드러운 크림색 벽, 하얀 침대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 창가에 놓인 오래된 망원경.

그리고 임신한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 아기였던 클레어를 안고 있는 사진들, 벽에 기대어 놓인 기타 한 대.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잘못 들어온 침입자처럼 느껴졌다.

클레어는 나를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러더니 내 무릎 위에 앉아 다시 나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 밤 여기서 자는 거지? 나랑 아빠랑 같이?”

나는 문가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Declan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 잘 모르겠어.” 내가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 밤은 여기서 잘 거야, 클레어.” Declan이 방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그는 뒤에서 문을 닫았다. “우리와 함께.”

클레어는 안도한 듯 미소 지으며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아이를 안아 주었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내 몸은 그 움직임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Declan이 다가와 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양치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시간이야, 우리 공주님. 내일은 하루 종일 함께 보낼 거란다.”

클레어는 작게 투덜거렸지만 결국 말을 따랐다. 방을 나서기 전, 아이는 나를 다시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엄마. 아직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아. 엄마가 기억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게.”

아이가 방을 나가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Declan이 문을 잠갔다.

나는 침대에서 재빨리 일어나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당신이 나를 여기서 자게 강요할 수는 없어.”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젖은 셔츠를 벗자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가슴과 복부의 근육이 드러났다. 목에 걸린 체인이 움직이며 반지가 피부 위에서 흔들렸다. 나는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어.”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거야.”

그는 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너무 가까워서 그의 체온이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나를 원하지 않는 척해도 상관없어. 울어도 되고, 죄책감을 느껴도 돼.” 그가 손을 들어 내 턱을 잡았다. “하지만 오늘 밤 넌 우리 침대에서 잘 거야. 내가 네 곁에 있을 거고, 네가 잠든 동안 널 지켜볼 거야. 넌 내 아내니까. 난 그 순간을 다시 맞이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는 침을 삼켰다.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무서워.” 나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는 몸을 조금 숙여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기댔다.

“좋아. 두려움은 시작으로 나쁘지 않아.” 그가 낮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누구였는지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야. 내가 서두르지는 않겠어.”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내 남편이라는 증거는 사진과 반지, 그리고 클레어의 존재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낯선 집에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내 과거에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침대 쪽을 가리켰다.

“오늘 밤은 쉬어.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나는 망설이다가 침대에 앉았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왜 나를 그냥 보내 주지 않는 거야?” 나는 물었다. “내가 정말 당신의 아내였다면,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거지?”

그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내 아내이기 때문이야.” 그가 대답했다. “널 잃었을 때 내 삶도 끝났어. 그리고 다시 찾은 지금, 또다시 널 잃을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거야. 하비에게도, 네 기억이 사라진 지금의 상황에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용한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그의 존재가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목소리, 익숙하게 느껴지는 향기, 그리고 내 과거에 대한 확신.

마치 내 몸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미워.” 나는 속삭였다.

Declan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대답했다.

“나를 미워해도 괜찮아. 네가 느끼는 감정을 억지로 바꿀 필요는 없어. 다만 네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클레어가 잠들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남자와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나는, 마침내 지친 몸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아직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는 이 저택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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