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인 재단 최상층, 이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탁 트인 통유리창이었다. 환한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창밖으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펼쳐졌다.
깔끔함을 선호하는 방 주인의 취향에 맞춰 짙은 월넛 색상의 책장과 검은 대리석 바닥, 낮은 채도의 회색 벽이 공간을 채웠다. 벽 한쪽에는 국내외 대학과 기간에서 수여한 감사패와 공로패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정인 재단이 후원한 장학생들의 단체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뒤로 ‘미래를 밝히는 올바른 인재 육성’이라는 정인 재단의 슬로건이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사장 명패가 빛나는 책상 위에는 그 어떤 따뜻함도 없었다.
넓은 원목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만년필, 일정표가 놓여있었고, 한쪽에 자리 잡은 서류들은 단 한 장도 흐트러짐 없이 정렬되어 있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백재연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녀의 손이 마지막 장을 다 넘겼을 때,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짧은 한마디가 울리고, 곧이어 보고서와 태블릿 PC를 손에 든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그가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다가와 보고서를 건넸다.
“이번 장학생 후보 명단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의대생 비율은 2퍼센트 더 올려서 잡았습니다.”
“거기 올려놔.”시선은 떼지 않은 채 그녀가 가볍게 턱짓하며 말했다.
남 비서는 개의치 않은 듯 쌓여있는 서류 뭉치 위로 보고서를 올린 뒤 반듯하게 각을 맞췄다.
익숙하게 보고서를 올린 그가 이번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태블릿 PC를 꺼냈다.
“지난번 보고드렸던 작가 미팅은 수월하게 진행되어서, 이번 작품도 저희 미술관에서 독점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전시회는 4월 오픈 목표로 잡아놨고, VIP 대상으로 사전 오픈 진행할 예정입니다. 현재 홍보팀 통해서 언론 보도 일정 잡아 놨고, 컨펌 완료되는 대로 기사 나갈 예정입니다.”
문제없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일에 백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모든 게 다 그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별다른 문제가 발생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순간 종이를 넘기던 백재연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라는 단어가 나와서는 안 됐다. 그건 그녀의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남 비서를 향했다.
“그런데?”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남 비서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 의료 센터 설립에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탁!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순간 울려 퍼졌다.
“문제?”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그녀의 계획에 ‘문제’는 없었다. 있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문제가 없도록 철저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게 백재연이었다.
그런데 지금, 감히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고 보고라니.
날카로운 그녀의 표정에 남 비서는 순간 아차 싶은 얼굴로 황급하게 말을 정정했다.
“…… 죄송합니다. 사소한 일입니다.”
하지만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문제’라는 단어가 나온 이상, 백재연은 이를 가만히 넘기지 않았다.
“줘.”
백재연이 그가 들고 있는 태블릿 PC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 비서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돌리고 그녀에게 태블릿 PC를 건넸다.
그에게 건네받은 태블릿 PC에는 AI 연구 및 치료 센터 설립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기사와 부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있었다.
‘진실을 외면한 책임 없는 의료 AI 연구 반대’, ‘정인 재단은 의료 AI 오진을 인정하고 진실로 사과하라!’
유가족들의 외침과 현수막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백재연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 비서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가족 측에서 정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백재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했잖아.”
“그건…… 사과가 아니라고 합니다.”허. 그녀의 입에서 짧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그들이 원하는 건 뭔데? 뭐 내가 돈다발이라도 들고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주길 원하나?”
“아뇨, 저희도 계속 보상을 제시하고 있지만 다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들 말로는…… 의료 AI 기술의 실수를 인정하고, 대신 책임을 물어 해고당했던 의료진들에게도 진실한 사과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실수?”날카로운 목소리에 남 비서는 말끝을 흐렸다.
백재연은 사과라는 단어보다 실수라는 단어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에게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백재연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유가족들이 주장하는 ‘의료 AI 기술 오진’은 분명 존재했다.
8년 전, 정인대 병원은 백재연이 직접 도입한 의료 AI 시스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의료진의 경험에 의존하던 기존 진료 체계에서 벗어나, AI가 진단과 치료 방향을 우선 제시하는 새로운 의료 시스템이었다.
당시 일각에서는 아직 임상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며 시기상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백재연은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도입을 추진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시범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정인대 병원에서 환자 한 명이 사망했다.
유가족은 의료 AI의 잘못된 판단으로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쳤다고 주장했고, 의료진은 AI의 판단을 신뢰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진술했다. 반면 AI 개발팀은 최종 진료 결정은 의료진의 권한이라며 책임을 부인했다.
사고의 책임은 서로를 향했고, 진실 공방은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백재연은 여론이 한쪽으로 치우치기 전에 곧바로 입장문을 발표했다. 내부 조사 결과, AI가 아닌 담당 의료진들의 오진으로 환자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내부에서 징계 절차가 진행되었고, 해당 환자를 담당했던 의료진은 모두 병원을 떠났다.
그러나 유가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병원 측에서 제시하는 그 어떤 보상도, 그들의 입장문도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하나였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의료 AI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과문을 작성하는 것. 그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들이 원하는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재연은 절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남 비서.”
“…… 네, 이사장님.”백재연의 날카로운 눈이 남 비서를 관통했다.
“남 비서 눈에는 내가 실수나 할 사람으로 보여?”
차가운 그녀의 말에 남 비서는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재연은 그를 노려보다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고작 그거 때문에 공사를 못 한다?”
“생각보다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의료 AI 시스템에 거부 반응도 꽤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김 회장이 갑자기 투자를 철수해서…….”남 비서의 말에 백재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 그 늙은이.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던지듯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그때 일 때문에 삐쳤다니?”
“그런 걸로 보입니다.”남 비서의 말에 백재연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그 추한 늙은이. 같이 밥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얼마나 더 추잡하게 늙다가 가려고 그러나.”
김 회장은 정인 재단의 사업과 운영에 있어 필요한 큰 손 중 하나였다. 백재연은 최대 투자자인 김 회장을 위해 늘 주기적으로 접대 자리를 마련했고, 그날도 김 회장을 위해 마련된 식사 자리였다.
평소처럼 그의 기분만 적당히 맞춰주며 식사만 하고 끝내려고 했지만, 욕심 많은 늙은이는 그 이상을 원했다. 탐욕에 미친 인간. 그런 인간은 백재연에게 윤 원장 하나면 족했다. 기분을 맞춰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그 이상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결국 모두의 눈앞에서 그에게 굴욕을 안겨줬다.
사실 백재연은 겨우 그게 굴욕인가 싶지만, 어쨌든 김 회장에게는 굴욕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협박 수단인지 갑자기 정인 재단의 사업에 하던 투자를 모두 철회했다. 다른 이였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김 회장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무시할 수는 없고, 어떻게 구슬리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 최근 그녀에게 한 가지 좋은 묘수가 생겼다.
백재연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계획을 짰고, 바로 실행에 옮겼었다.
가로 젓던 고개가 멈추고, 백재연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이동했다.
“윤채원한테 연락은?”
백재연의 말에 남 비서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입니다.”
아직? 순간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계획은 이미 시작됐고, 지금쯤이면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할 때였다. 그런데 아직도 연락이 없다니?
“다시 연락해 봤어?”
“어제부터 시도하고 있는데, 계속 핸드폰이 꺼져 있습니다.”남 비서의 답변에 백재연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 온 사춘기 같은 것도 아니고, 감히 핸드폰을 끄고 연락 두절이 된다는 게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직접 찾아가서-”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
자신의 말을 뚝 잘라버리는 언짢은 타이밍에 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잠깐 덜컹하더니, 이내 천천히 문이 조금 열리고 긴장한 표정의 여직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무슨 일입니까?”백재연 대신 그 앞에 있던 남 비서가 물었다.
여직원은 남 비서를 한 번 바라보곤 살짝 볼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아, 저,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여직원의 말에 남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백재연의 스케줄에 예정되어 있던 미팅은 없었다.
자신이 실수했을 리는 없다고 확신하며 남 비서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예정된 미팅은 없습니다.”
“아, 미리 약속을 잡으신 게 아니라 갑자기 오신 거라…….”갑자기 찾아온 손님이라니. 계획에 없던 변수는 백재연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말끝을 흐리며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여직원에 남 비서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냥 돌려보내면 되지, 뭣 하러 굳이 찾아와서 보고합니까?”
아니꼬운 그의 목소리에 여직원은 말을 얼버무리다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게…… 강태건 본부장이라…….”
“…… 강태건?”뜻밖의 이름에 백재연의 귀가 반응했다.
곧이어 문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다급하게 말리는 다른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이사장실 문이 벌컥 젖혀졌다.
“어, 어…….”
“…… 하.”당황한 여직원의 얼굴 위로, 당당한 표정을 짓던 강태건의 얼굴이 나타났다.
태건은 제 앞에서 얼을 타는 여직원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그녀를 옆으로 치우고 당당하게 이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남 비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건은 그 뒤에 앉아 있는 백재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장모님.”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